프란치스코 교황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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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프란치스코 교황은 등극 후  지난 14일 최초로 전 세계에서 모인 수백여 명의 기자들과 의 만남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처럼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면서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얼마나 좋은가”라고 밝혔다. 프란치스코 로마교황은 자신의 즉위명을 프란치스코로 택한 것은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며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한 교회’가 될 것을 다짐했다.  교황의 이같은 언급은 천주교회가 여러모로 변화할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앞으로 교회의 사회참여, 세계평화, 빈민구제, 인권 개선, 노동문제 등등에서 세계를 향한 목소리를 이전 보다 더 크게 낼 것으로 보인다.
<성진 취재부 기자>
 














로마 가톨릭 교회 제266대 교황 프란치스코 교황은 19일 취임 미사에서 교회의 세속화를 강하게 경계해 앞으로 천주 교회가 여러모로 다양하게 변화될 것을 암시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날 즉위미사에서 강론을 통해 “가족이 서로 보살피고, 부모와 자녀가 서로 돌보며, 우리가 신뢰와 존중, 그리고 선으로 참된 우정을 쌓는 것이 우리들의 소명”이라고 설명했다.
또 교황은 “인간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 때마다, 또 피조물과 형제자매를 돌보지 못할 때마다 파괴의 길이 열리고 마음이 완고해진다”고 주위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인류의 평화와 안녕의 근본임을 역설했다.
그는 그러면서 “경제, 정치, 사회계의 책임 있는 지위에 있는 모든 선의의 사람들에게 간곡히 요청 한다”면서 “피조물의 보호자, 자연 안에 새겨진 하느님 계획의 보호자, 인간과 자연의 보호자가 되도록 하자”고 사회적으로 책임있는 지도자들의 자세를 설명했다.

이날 즉위 미사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로마 주교(교황)의 소명”이라면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소외된 자의 목자’로서 교황직을 수행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그는 특히 교황 선출 직후와 마찬가지로 이날 미사 강론에서도 교황을 ‘로마의 주교’로 언급했다.
교황은 러시아어, 프랑스어, 아랍어, 스와힐리어, 중국어 등 5개 언어로 신자들을 대표해 교회 공동체가 나아갈 바를 소망하는 보편지향 기도를 드렸다. 하느님의 복음이 지구촌 외진 곳으로 전파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유대교ㆍ이슬람교ㆍ불교ㆍ시크교ㆍ자이나교 등 여러 종교의 지도자들이  이날 즉위식에 참가해 종교와 정파를 넘어 화합의 장이 마련됐다.
교황청은 이날 즉위식에 특정인을 초청하지 않고 대신 모든 사람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초청받은 사람과 초청받지 못한 사람들 간에 거리를 두지 않겠다는 교황의 뜻에 따른 것이다.
현지 언론과 소식통은 신자와 관광객을 포함해 100만명 정도가 이날 즉위식 미사를 보기 위에 바티칸을 찾은 것으로 추산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지난 14일 교황청 시스티나 성당에서 콘클라베에 참여했던 추기경 114명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미사를 집전하면서 설교를 통해 “우리가 신부가 되고, 주교가 되고 추기경이 되어도 복음을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십자가 없이 걷고, 십자가 없이 뭔가를 짓고, 십자가 없이 예수의 이름만을 부른다면 우리는 주 예수의 제자가 아닌 세속적인 존재일 뿐”이라며, 세속적 가치를 바탕으로 어떤 일을 이룩하려 한다면 어린이가 쌓은 모래성처럼 모두 무너져 버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우리가 어디든 갈 수 있고 많은 것을 지을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지 않는다면 단지 인심 좋은 사회단체에 지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한편 교황 프란치스코는 고국 아르헨티나의 신자들에게 자신의 즉위 축하 미사에 참석하기 위한 로마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하면서 “그대신 여행 경비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할 수 있도록 자선단체에 기부”하라고 당부했다.
바디칸 교황청 관계자들은 신임 교황이 과거 요한 23세 교황 때처럼 가톨릭의 새로운 변화를 몰고 올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1960년대 교황 요한 23세(재위: 1958-1963)는 온화하고 탈권위적이었는데 재위기간 중에 가톨릭교회에 대변혁을 불러일으킨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소집하였으며, 1963년 4월 11일 최초로 가톨릭 신자에게 만이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에게 보낸 회칙 <지상의 평화(Pacem in Terris)>를 반포하였다. 
이 회칙은 세계 평화, 빈부격차 문제, 노동 문제 등 현대 인류 사회의 여러 가지 현안 문제의 해결에 기여하려 노력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특히 그는 당시 미국과 소련 사이에 고조되었던 핵 전쟁의 기운을 차단하고 분쟁도 조절하였다.

이번에 신임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한 인간적인 면모도 새롭게 알려져 바디칸이 보다 서민적인 분위기로 바뀔 것이란 성급한 전망도 나오고 있다. 교황에게는  인간적인 매력이 발견됐는데 바로 그가 축구광이라는 사실이다.
이번 교황의 선출을 보고 조선일보의 강천석 주필은 ‘시대의 정답’ 꺼낸 바티칸, 종교인만이 아니라 정치인들도 ‘로마의 이틀’(추기경들은 2일만에 교황을 선출했다)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고 칼럼을 통해 강조했다.
그는 “새 교황 프란치스코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읽는 동안 내내 기분이 즐거웠으며 이 대목 저 대목에서 우리 곁을 떠난 김수환 추기경, 한경직 목사, 성철 스님 같은 분을 다시 떠올려 보는 기쁨 또한 쏠쏠했다.”고 적었다.

이어 “추기경 시절 번듯한 공관을 마다하고 작은 아파트에 들어가 혼자 밥하고 해진 옷을 바느질해 기워 입으며, 운전사 딸린 자동차 없이 버스나 지하철을 즐겨 이용했다는 새 교황이다. 몇몇 신부가 돈을 모아 교황 선출을 위한 로마 회의에 참석하러 떠나는 그의 낡은 구두를 새 구두로 바꿔줬다는 얘기도 들려 왔다. 그런 인품이니 비행기 비즈니스석을 예약하려던 비서 신부를 타일러 일반석을 사도록 한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호 문제만 해결된다면 지하철 속에서 교황을 만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서민적 교황을 소개했다.

이어 그는 “프란치스코의 이런 생활이 어마어마하게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하나가 작지만 은은하게 빛난다. 신앙이 없는 사람조차 새 교황에 얽힌 사연을 좇다 한나절이 절로 가며 즐거워지는데 가톨릭 신자들은 얼마나 흐뭇하고 떳떳하고 자랑스럽겠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여기 계시지 않는 바보 김수환 추기경을 또 한 번 그리워했을 거고, 개신교나 불교 신자들은 한경직 목사와 성철 스님이 떠난 빈자리가 더없이 허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사람은 가도 향기는 남는다’는 말이 틀린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결론적으로 “우리 종교인들은 새 교황 프란치스코와 바티칸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난상토론 한 번 없이 오로지 이심전심만으로 프란치스코라는 ‘시대의 정답’을 뽑아낸 ‘로마의 이틀’을 더 열심히 연구해야 할 사람들은 우리 정치인들이다.  대통령, 새누리당, 민주당이 ‘로마의 이틀’을 거듭 살펴 보면 그 안에 지난 석 달 국민이 왜 그렇게 속이 터졌는지 이유가 담겨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교황은 그리스도의 지상 후계자

교황에 선출되면 이름, 국적 및 시민권을 포기

교황(敎皇, 라틴어: papa)은 교황청 연감에 따르면 로마의 주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며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다. 기독교 창시 이래 2천 년 동안 총 265명의 교황이 있었다.
교황의 직위를 가리켜 교황직(敎皇職, papatia)이라고 부르며, 교황이 통치하는 세속적 영역은 ‘성좌’(Sancta Sedes) 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순교한 로마 위에 세워진) ‘사도좌’로 불린다.
옛날부터 로마는 역사적으로 초기 기독교의 사도이자 제1대 교황이었던 성 베드로가 순교한 땅이자 그의 묻힌 장소로서 하나의 성지로 중요시됐다. 일찍부터 이곳에는 교회가 세워졌으며, 로마 교회 신자들의 지도자인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일정한 권위를 지닌 존재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신약성서의 마태오 복음서 16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최초의 제자인 성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마태 16, 18)라고 한 말이, 교황을 성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권위를 높이려는 의도에 따라 강조되었다.

초기 교황들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고 교리적 논쟁을 해결하는 데 몰두하다가 차츰 세속 문제에도 개입하여 수천 년간 서유럽에서 황제의 대관식(샤를마뉴는 교황을 통해 즉위한 최초의 황제였음)을 주관하였으며 세속 통치자들끼리의 각종 분쟁에 개입하였다. 중세 시대에 세속 군주들과 권력 다툼을 벌여왔던 교황들은 가톨릭 개혁 이후로 점차 세속 권력이 약해지자 본연의 임무인 종교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수세기가 넘도록 교황의 종교적 권한에 대한 주장은 1세기 이후 더 명확해진 가운데 신앙이나 도덕에 관하여 엄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교황 무류성 선언은 최고조에 달했다(교황무류성으로서의 마지막 선언은 1950년 성모승천 교리임).
근대 이후 교황들은 고고한 권위를 누리는 군주로서의 모습보다는 목자로서의 모습을 의연히 지키며, 대중에게 친숙한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20세기 교황들은 단순히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고 초국가적 입장에서 국제문제를 비롯한 각종 윤리와 사회문제를 지도해왔으며 세계평화에도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교황에 선출되면 자신의 이름, 자신의 국적 및 시민권을 버려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때로는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전부 규제를 받는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고해신부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한다. 교황의 고해성사를 담당하는 사제는 예수회 사제이다. 고해 사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정해진 시간에 바티칸을 방문하여 교황이 고백하는 죄를 듣고 사해 준다.
교의상 로마 가톨릭 교회 전체를 통솔하는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다. 교회 안 모든 법령은 교황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교황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선례를 따를 수도 있고, 무시할 수도 있다. 전통을 폐지하고 교회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수 있으며, 교서를 발표할 수 있고, 협의를 거치지 않고도 교회 안 규정을 바꿀 수 있다.
어떤 문제들에 관해서는 추기경단의 자문과 충고를 받도록 되어 있지만, 모든 일에 있어 교황 자신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고 조처를 취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세속적인 재판은 받지 않기에 일반 법정에 소환되지 않을 권한을 갖는다.



신임 교황 프란치스코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를 천명하면서 자신이 즉위명으로 삼은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떠올려 새삼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교황이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을 소개한다. 기독교의 성인이자 수사였던 성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으로 가난을 실천했다는 사실은 부자가 되려는 기독교인들과 교회에 교훈이 된다. <편집자>

성 프란치스코(St. Francisco, 1182년~1226년 10월 3일)는 이탈리아 중부 아씨시(Assisi)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에는 무모할 정도로 방탕의 세월로 보내다가  나중 기사가 될 꿈을 안고 전투에 참가했지만 포로로 잡혀 투옥되기도 했다.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옛 생활로 돌아가는 듯 보이다가 중병을 앓았고, 병에서 회복한 뒤로는 딴사람이 되었다.
그는 어느날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느꼈는데, 이때 “내 교회를 고쳐라”는 말씀을 들으면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는 아씨시에 있는 평원으로 말을 타고 나가곤 하였는데, 거기에는 나환자촌이 있었다. 그는 그 한센병 환자를 보고 놀랬지만 말에서 내려와 그 사람에게로 가서 돈을 쥐어 주고는 평화의 입맞춤을 하였다.

그는 그의 삶 전체를 통해서 이때 만남을 가장 소중히 여겨 마음에 간직하였는데, 유언에서 “주님께서 나 프란치스코에게 이렇게 회개생활을 하도록 해 주셨습니다”하고 회상한다.
1205년에 가서는 또 다른 만남이 그를 전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번에는 낡고 반쯤은 버려진 아씨시 밑 쪽에 위치한 성 다미아노 성당에서였다. 그 성당은 한 가난하고 늙은 신부가 담당하고 있었는데, 그 신부는 너무 가난해서 십자가 앞에 불을 밝힐 기름을 살 돈도 없었다.
프란치스코는 그 성당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에 매료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 성당의 보수를 위해 아버지의 가게로 가서 값비싼 포목을 꺼내 가지고는 폴리뇨 시장에 가서 죄다 팔았고 그는 자기가 번 돈을 그 성당의 신부에게 갖다 주기 위해 돌아왔는데, 그 신부는 그 돈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그 대신 프란치스코에게 봉사자로서 교회에서 일하는 것은 허락해주었다.













▲ 루벤스의 작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의 주인공은 예수회 공동 창립자이며 아시아 선교사였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다. 하비에르 발치의 두루마기처럼 보이는 옷을 입은 남성은 조선인 안토니오 코레아로 알려졌다. /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이일로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와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가 성당 수리를 위해 벽돌을 구걸하러 돌아다니고,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에게 돈을 주는 모습을 못마땅해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백성들과 함께 살기 위해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다.
실례로 그는 “나는 가난이라는 부인과 결혼했다”라고 말하면서 가난을 몸소 실천했다. 부자의 아들로 자란 그는 부가 선망의 대상이 아닌, 인생의 족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상속권을 박탈당할 위기에 놓였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에게 상속권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위해 시의 집정관들에게 데리고 갔다.
그러나 이 문제는 종교적 문제였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주교의 권한에 달려있었다. 그래서 산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에서 가까운 주교관에서 재판이 열렸다. 아씨시의 귀도 주교는 프란체스코가 가지고 있는 돈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라고 권유하였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순명하여,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주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다 벗고는 옷들과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부터 저는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려, 그 분을 하늘에 계신 저의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아버지는 당황한 채로 집에 돌아갔고,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자의 옷을 입고 아씨시를 떠났다. 가는 길에 프란치스코는 강도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는 자신이 “위대한 왕의 사자”라고 말하였다. 그 강도들은 그를 정신병자 정도로 생각하여 그를 구덩이에 던져 넣고 떠났는데, 프란치스코는 거기에서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후 프란치스코의 삶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이 생겼고, 이 소식을 들은 친구들 11명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고, 3년 후인 1210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가 가난하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프란치스코의 요청을 인준했다. 이것이 ‘작은 형제회’, 곧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시작 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작은 형제 공동체는 노동과 묵상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이러한 전통에 따라 프란치스코 수도회인 ‘작은형제회’에서 수사들이 약 1개월동안 세속에서의 노동을 함으로써 실천하고 있다.

1212년에 그는 성녀 클라라(Clara)와 함께 ‘가난한 부인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이때 그는 회교인 모슬렘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직접 찾아갈 정도로 선교에 대한 열정에 불타고 있었다. 그래서 1219년에 십자군을 따라 이집트로 갔다가 술탄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그는 결국 사라센 선교가 실패로 끝난 줄 알고 성지를 방문한 뒤에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1217년부터 이 수도회 안에는 새로운 기운이 치솟기 시작하여 조직이 강화되면서 성장이 되었다. 커다란 조직체인 관구가 형성되고 영국을 비롯한 외국으로 선교사를 파견 하는 등 참으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복음에서 가르친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을 자신과 형제들에게  준 것으로 받아들여 여러 곳을 다녔고, 이 평화의 메시지를 이탈리아에만 전파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전세계를 여행해야 한다는 강한 선교 소명을 느꼈다.  프란치스코의 제자들은 시초부터 모든 이들에게로 향하였다. 이들은 마호멧교도 들이 있었던 아프리카와 시리아, 다양한 부류의 신앙을 지니고 있던 소아시아와 동유럽, 유럽의 그리스도 교화를 보충하기 위한 발트 해안, 아시아의 중국 등지까지 선교 활동을 하였다.

1224년 그가 라 베르나 산에서 기도하던 중에 그리스도의 다섯 상처를 자신의 몸에 입었는데, 이것은 최초로 공식 확인된 오상(5개의 상처)이었다. 그리스도의 오상은 그의 일생동안 계속 되면서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는 오상으로 인한 고통 중에도 당나귀를 타고 움브리아 지방을 다니며 계속 복음을 전하다가 기력이 쇠하여지고 눈마저 실명되어 갔다. 그런 고통의 와중에서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노래’를 지었다.
병세가 깊어지자 성 프란치스코는 포르치운쿨라로 숙소를 옮겼다. 미리 유서를 작성하고 자신의 죽음의 다가온 것을 알자 그는 알몸으로 자신을 잿더미 위에 눕혀달라고 하였다. 그리고 수사 들에게 요한 복음서의 수난기를 읽게 한 후 시편 43장을 노래하며 1226년 10월 3일 ‘자매인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유해는 다음날 아씨시에 있는 산 조르조(San Giorgio) 성당에 안장되었다. 프란치스코는 2년 후인 1228년 7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에 의해 시성 (성인 반열) 되었으며, 1230년 5월 25일 그의 유해는 엘리아가 그를 기념하여 지은 프란치스코 대성전의 지하 묘지로 이장되었다.
지금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공경은 세계 도처에서 활기차게 이루어지고 있고, 그가 세운 재속 프란치스코 회원들도 다른 재속회원과 비길 수 없을 정도로 많아져 그의 성덕을 본받고 가난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1979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를 생태학자들의 수호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아씨시의 가난뱅이 프란치스코만큼 교회 안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다시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는 오늘날 가톨릭 교계 사회에서 ‘제2의 그리스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신임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톨릭에서 청빈과 교육을 으뜸으로 삼는 수도단체 ‘예수회(Society of Jesus)’ 소속으로 최초로 교황이 됐다.
“예수회가 뭔지 모른다면, 프란치스코 교황의 삶을 들여다보라. 그는 겸손, 교육, 그리고 사회 정의라는 예수회의 덕목을 몸소 실천해온 사람이다.”
프란치스코 교황 선출 뒤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그와 그가 소속된 ‘예수회’에 관해 이렇게 표현했다. 예수회는 전 세계 1만8000명 회원이 소속된 가톨릭 최대 사제 수도회. 가톨릭 교회가 사상 최악의 위기를 겪던 16세기, 예수회는 교회의 수호자로 태어났다. 한국에는 예수회가 세운 서강대학교가 있다.
예수회의 시발점은 종교개혁과 맞물려 있다. 1517년 독일의 젊은 수도사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정문에 교황청을 꾸짖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면서, 유럽은 단박에 종교개혁 열풍에 휩싸였다. 독일에서 시작된 바람은 네덜란드와 북구로 번지며 빠른 속도로 남하했다.
이때 가톨릭의 방파제 역할을 한 것이 예수회다. 1534년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는 청빈•순명•정결 등 일반적 수도회 원칙에 ‘교황에 대한 충성서약’을 더해 예수회를 세웠다. 교회를 수호하고 종교 개혁 세력을 물리치는 데 앞장섰다.



18세기가 되자 예수회는 그저 수도회를 넘어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엘리트 조직이 됐다. 힘이 커지면서, 교황의 이익을 위해 다른 나라에 사회 분쟁을 조장한다는 등의 혐의가 따라붙었다. 남미에서 원주민 노예무역에 반대하다 프랑스•스페인 등과 갈등을 빚었고, 정치적 압박을 받은 교황이 한때 해산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볼테르의 ‘캉디드’, 아베 프레보의 ‘마농 레스코’’ 등 18세기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 소설에서 예수회 사제가 자주 음험한 음모가로 그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음모론자들은 지금도 예수회의 수장인 총장을 ‘검은 교황(Black Pope)’이라고도 부른다. 검은 수단(발목까지 오는 긴 사제복)을 입고 교황을 꼭두각시처럼 뒤에서 움직이는 자라는 혐의를 씌우는 것이다.
유럽에서 가톨릭의 방파제 역할을 했던 예수회는 다른 대륙에서는 선교사로 맹활약했다. 교회의 위기로 탄생한 예수회는 언제든 필요한 현장으로 떠날 수 있도록 ‘사도적 기동성’을 중시했다. 공동 시간 전례나 고행이 없고, 고유의 수도복도 없다. 교구 신부들처럼 검은 수단을 입는다. ‘시체가 복종하듯 복종하라’는 모토가 있을 정도로 상하 복종 관계가 명확하다. ‘신의 해병대’(뉴욕타임스) 라는 별명도 붙었다.
이런 장점을 살려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 중남미, 아프리카 정복 과정에서 군대보다 먼저 들어간 것이 예수회 선교사였다. 공동 창립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인도와 일본, 중국까지 갔다. ‘천주실의’를 쓴 마테오 리치, 영화 ‘미션’의 가브리엘 신부도 예수회 소속이었다.


서강대는 예수회가 세운 대학


지금의 예수회는 교육, 선교, 자선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다. 미국에 28곳 등 전 세계 100여 개국에 226개의 대학을 세웠다.
한국에는 1954년 들어왔으며, 1960년 서강대를 세웠다. 국내에선 전 의정부교구장 이한택 주교가 예수회 출신 첫 교구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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