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폐족(廢族)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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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춘훈(언론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 집은 추징금으로 몰수하고, 캐시가 29만원밖에 없다는 ‘극빈 노인’인 그는 집세 걱정-밥 굶을 걱정 없는 백담사로 다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며칠 전 한 언론인은 실제로, 친분이 있는 백담사의 주지 스님께 (손님이 곧 갈테니) 방 하나를 비워달라는 공개편지를 썼습니다. 추징금 문제로 5000만 국민과 운명(?)의  마지막 한판 승부를 펼치고 있는 전두환 내외가 그나마 부처님의 자비의 품 안에서 극락왕생 할 정토(淨土)로는 역시 백담사만한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두환은 요즘 바깥출입도 제대로 못하고, 좋아하는 골프도 못치고, 과거 ‘꼬붕’ 들 모아놓고 ‘개 폼’ 잡던 재미도 없이,  ‘죽은 듯‘ 살고 있습니다. 재임 중 부정하게 모은 돈 보따리를  움켜쥐고 “이 돈은 알토란같은 내 돈”이라며 추징금 납부를 거부하고 있는 이 ‘개념 없는’ 맹자단청(盲者丹靑)을 바라보는 국민들 마음은 비통스럽고 착잡하기만 합니다.


세조 쿠데타와 전두환 쿠데타


전두환은 조선조의 세조임금과 비유되는 인물입니다. 재임 중 두 사람 다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잡은데 따른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세조는 계유정난과 단종 폐위, 전두환은 12.12 군사반란과 광주학살로, 손에 피를 묻히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헌데 두 사람의 집권 후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세조가 참회의 항심(恒心)으로 오직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치려 노심초사한데 반해, 전두환은 자신과 신군부로 불리는 권력 엘리트들의 집단 이익을 위해 민주주의를 압살하고 많은 국민들에 고통을 주는데 오직 ‘노심초사’ 했습니다. 세조는 자신의 집권과정에서 희생된 숱한 충신 학자들을 신원(伸寃)해 주며 화해와 통합의 ‘통 큰 정치’로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지요.
 평생 수양대군의 불법 쿠데타를 인정하지 않고 세조임금을 저주한 여섯 명의 충신을 역사는 <생육신>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 중심인물이 매월당 김시습입니다. 세조가 단종과 사육신을 죽이고 보위에 오르자 당대 최고의 지성 김시습은 머리 깎고 중이 되어, 계룡산 동학사에 사육신의 넋을 부르는 초혼각(招魂閣)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소문이 나면서 동학사에는 전국에 숨어살던 반체제 인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이곳은 어느새 반정부 절신(節臣)들의 아지트가 됐습니다. 이들은 폐위된 단종이 입던 어의(御依)를 부둥켜 안고 통곡하며 세조를 저주했습니다.


죽은 정적 위해 눈물 흘린 세조


세조 3년 임금은 계룡산 동학사에 산행 차 들렀다가 자신의 집권에 반대하다 참형된 사육신을 기리는 초혼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해마다 반정부 인사들이 모여 단종 ‘초혼치제’를 치르며 자신의 이름을 능욕하고 저주한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지게 되지요. 세조는 8폭 짜리 비단에다 손수 병자원적(丙子寃籍)이라는 글을 써 내리고, 아울러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는 원혼기(寃魂記)를 짓게 합니다.
원혼기엔 자신이 죽인 단종을 비롯해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충신 황보인과 김종서, 사육신 및 그 부자형제, 연좌제에 걸려 이들과 함께 죽은 일가권속 등 280여명의 이름을 써 모시라는 어명을 내립니다. 서울로 발길을 옮길 때 세조는 후회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바위에 올라 뒤돌아보며 꺼이꺼이 울었고, 몇 걸음 내딛다 다른 바위에 올라 또다시 소리 내 울었습니다. 동학사 입구엔 처음 세조가 울었다는 ‘울바위’와 두 번째 자작거리며 울었다는 ‘자작바위’가 지금도 남아 있다지요.
조선왕조 내내 시대의 불의에 항거하며 수절하던 충신 선비들은 저마다 동학사 초혼각을 찾아 참배했습니다. 연산군 폭정 같은 난세 때, 초혼각에 엎드려 통곡하고, 돌아 갈 때면 울바위에서 한번 울고 자작바위에서 또 한번 우는 게 선비들의 순례의식이 됐습니다. 이들은 초혼각에서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고 충신들의 살신성충(殺身成忠)에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의 희생을 함께 슬퍼한 ‘가해자’세조의 참회, 그리고 그가 집권기간 내내 추구한 화해와 용서와 통합의 ‘큰 정치’를 천착했습니다. 조카인 임금까지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세조를 역사가 가혹하게 ‘치리’하지 않는 까닭을, 바로 이 동학사 산문(山門)에 어린 역사의 숨결에서 느낍니다.


연희동 빨간 바지의 추억


전두환의 처 이순자는 지금도 남편을 각하라 부릅니다. 이불 속에서야 그렇게 부르지 않겠지만, 남들 앞에서 부르는 3인칭 대명사는 어김없이 각하입니다. 내 남편, 저 양반, 애들 아버지 정도면 되는 3인칭 호칭에 굳이 각하를 쓰고 싶은 이 80 다 된 노파의 멘털리티는, 50년 전 연희동 빨간 바지 아줌마로 불리며 부동산 시장을 누비던 초급장교 ‘여편네’ 시절의 정신 수준 그대로입니다.
대통령에 대한 각하라는 칭호는 20년 전 김영삼 정부 이래 사라져, 지금은 전혀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더구나 전두환은 반란죄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중범 전과자입니다. 이런 남편한테 굳이 각하라는 극존칭을 쓰는 이순자에게 국민들은 “각하라니? 놀고 있네…”라며 냉소적입니다. 이들 부부에게선 인간의 양심, 수치심, 국민과 역사에 대한 한 조각의 예의나 경외심 같은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최대 9000억원이나 된다는 전두환 일가의 숨겨놓은 불법자금을 찾기 위해 국회가 서둘러 만든 특별법이 전혀 맥을 못 추고 있고, 검찰조사 역시 계속 헛돌고 있는 것은, 이들 일가의 피에 흐르고 있을 바로 이 ‘빨간 바지 DNA’의 염력(念力)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전두환 일가 단죄 특별법만으론 안 돼


손에 피를 묻히고 정권을 강탈했더라도, 세조의 길을 갔더라면, 오늘 전두환이 저 모습이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정치에서 부패와 폭력의 고리를 끊어 내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포용하고, 법과 정의에 의한 사회지배, 그리고 대통령 자신과 집권세력 모두가 스스로에게 추상(秋霜)같은 국가경영을 했더라면, 전두환에게도 역사와 화해할 길은 분명 있었습니다. 돌팔매 맞을 각오로 매년 5월 광주를 찾아, 자신이 죽인 원혼들의 넋을 달래는 초혼제를 지내며 세조 임금처럼 꺼이꺼이 울었더라면…. 12.12 반란에 맞서다 죽거나 다친 장병들, 강제로 옷을 벗겨 옥살이를 시킨 장성과 고급장교들을 끌어안아 함께 갔더라면….
전두환의 5공은 그러나 모든 게 거꾸로 간 ‘역주행 정권’이었습니다. 정치적 폭력으로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국가재정은 그들 일파의 쌈짓돈이, 국가권력은 사유물이 됐습니다. 전두환이 재임 중 조성한 비자금만도 7000억원입니다. 검찰의 발표인데, 아마도 실제금액은 이보다 훨씬 많아 1조원이 넘을 것으로 정치권은 보고 있습니다. 요즘 가치로는 줄잡아 3~4조원은 되겠지요. ‘신군부’로 불린 ‘전두환의 킷스(kids)들’이 집권 7년 동안 챙긴 불법자금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전두환 내외와 아들 재국 재용 재만, 딸 효선, 동생 전경환, 처남 이창석등 빨간 바지 패밀리가 전두환 추징금 환수를 위한 검찰의 은닉재산 찾기 수사선상에 올라 있습니다. 이 중 이창석과 이재용 전경환은 감옥엘 이미 다녀왔고, 전두환 자신도 옥살이와 백담사 유폐로 험한 꼴을 당했습니다. 탈세, 불법 외화 밀반출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아들 재국과 재만, 딸 효선, 그리고 아직도 수천억원의 수상한 돈을 보유 관리하고 있다는 빨간 바지 아줌마의 남동생 이창석이 다음 차례입니다.
 이들은 버틸 때 까지 버틸 겁니다. 아들들은 요즘 아버지의 치매 얘기를 자주 합니다. 추징금 면탈의 구실을 전두환의 ‘중병’에서 찾으려는 꼼수는 아닐까요. 장남 재국은 파산설을 슬슬 흘리고 있습니다. 추징금 땡전 한 푼 못 낸다는 트릭 같습니다. 이들을 상대하려면 ‘보통의 특별법’으론 안 되고 ‘특별한 특별법’이 필요합니다. 이 고비만 넘기면 앞으로 몇 대가 떵떵거리고 살 수 있다는 헛 꿈에서 벗어나게, 거의 폐족 수준의 법적-사회적-정신적 응징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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