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 도발의 노림수…그가 김기춘을 물고 늘어지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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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김 대표는 추석 전 있었던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과 함께 차기 대권후보 지지도 공동 1위에 오르며 분위기를 타고 있다. 여기에 고무된 김 대표는 여세를 몰아 점차 자신의 존재감을 확대시키는데 전력을 쏟아 붓고 있다. 특히 ‘기춘대원군’으로 불리는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직설적으로 비판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현재 여권 내부에서 묘한 권력 투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특히 친박으로 불리는 전ㆍ현직 의원들이 상당수 김 대표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세를 규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청와대에서는 김 대표의 이런 행보가 여간 불쾌하지 않은 분위기다. 특히 공격을 받고 있는 김 실장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청와대 내 실세인 문고리 3인방 역시 김 대표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최근 김무성 대표와 관련해 불거지고 있는 딸의 수원대 교수 특혜 채용 문제도 여권 일각에서 흘러나오고 있다는 전언이다. 결국 추석 이후 정국에서는 당청 관계의 한바탕 불꽃이 튈 전망이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당 대표 출마 때부터 김기춘 실장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으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해왔다. 급기야는 최근 본국의 한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 행적’논란과 관련, “그런 유언비어가 퍼진 건 국회에서 답변을 잘 못한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책임이 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야당이 박 대통령의 7시간 행적을 계속 겨냥하고 있다”는 질문에 이 같이 밝히며“ ‘박 대통령이 사고 당일 분 단위로 이렇게 움직였다’고 밝혔으면 됐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문제가 커진 것 아니냐”며 “비서실장이 열 번이라도 국회에 나와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줘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김 실장 측이) ‘국회에 장시간 나와서 다 답변했는데 또 불러내느냐’는 식으로 나오니 국민들이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김 실장 측은 ‘(야당이) 협상 용도로 나를 (국회로) 부른다’고 반발하는데 이는 (김 실장이) 국민에게 무언가 숨기려 한다는 오해의 빌미를 제공할 뿐이다. 답답한 사람들이다”라고 덧붙였다.

김기춘 공격은 계산된 시나리오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김 실장은 ‘답답한 사람들’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등의 표현을 써가며 청와대, 특히 김 실장을 공격했다. 김 대표가 김 실장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지만 대통령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비서실장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그 파장도 만만치 않다. 당장 청와대에서 불쾌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청와대 관계자는 본지 기자와의 통화에서 “여당 대표가 청와대 비서실장을 언론을 통해 공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며 “본인의 정치적 입장도 있지만 결국 정권의 성공이 본인의 성공을 이끈다”고 말했다.

차기 대권 후보 1위

김 대표가 대통령의 사생활에 대해 비서실장을 공격하고 나선 것은 최근 그가 차기 대권 여론 조사에서 선두권에 오른 것과 무관치 않다는 반응이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여야 차기 대선주자 지지도 2014년 9월 1주차 주간집계 결과 박원순 서울 시장이 1.9%p 상승한 18.6%로 1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0.1%p 상승한 17.7%로 2위에 올랐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1.0%p 하락한 14.3%로 3위를 기록했다. 또 다른 여론 조사에서 김 대표는 공동선두까지 올랐다. 이런 분위기가 그로 하여금 대권에 대해 욕심을 갖게 만들게 되는 분위기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현직 대통령을 공격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가장 좋은 방법인 셈이다.

사실 이런 당청 관계는 김 대표가 당권에 도전했을 때부터 예견됐다. 김 대표가 당권에 도전했을 때부터 여권 주변에서는 “박근혜 대통령과 김 의원과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껄끄럽다”며 “그런 김 의원이 당권을 잡는 상황이 청와대에서는 반가울 리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애증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YS계로 정치에 입문한 김 대표의 친박 계보 첫 장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근혜 대통령은 2005년 1월 김 대표를 발탁해 사무총장 자리에 앉혔다. 김 대표는 3선 의원으로 친화력과 추진력을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됐다. 당시까지만 해도 당 장악력이 부족한 박 대통령의 빈 곳을 채워줄 인물로 꼽혔고 김 대표는 위기 국면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박 대통령의 원조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하던 김 대표는 같은 해 11월 당직에서 물러났다. 경질성이라기보다는 차기 대선 준비를 위한 일보후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정치 스타일은 달랐다. 김 대표는 2006년부터 박 대통령의 대선 준비팀을 가동했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꺼리면서 둘 관계는 하강국면으로 흘렀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2007년 박 대통령의 대선 캠프 조직 총괄본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신뢰를 회복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선에 당선되면서 친박계였던 김 대표는 이듬해인 2008년 18대 총선에서 소위 ‘보복공천’의 희생양이 됐다. 위기는 기회로 반전됐다. 김 대표는 친박 무소속으로 부산에서 당선돼 국회에 복귀하면서 친박 좌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고난 끝에 입성한 국회에서 박 대통령과 김 대표의 관계는 매끄럽지 못했다.

차기 대권 후보 1위 무대의 반란

2009년 친이계가 김 대표를 원내대표로 추대했으나 박 대통령이 이를 거부하면서 김 대표와의 골은 깊어졌다. 같은 해 가을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친이계가 제시한 세종시 수정안은 친박계 분열의 씨앗이 됐다. 당시 김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에 7개 독립기관 이전을 담은 수정안을 제시하며 중재에 나섰다. 박 대통령은 원안을 고수하며 김 대표와 사이가 멀어졌다. 같은 해 김 대표는 원내대표에 도전했다. 박 대통령은 “친박계 좌장은 없다”고 선을 그으며 경고했으나 김 대표는 아랑곳 않고 친이계 지지를 받아 원내대표에 당선됐다. 이 때부터 김 대표는 친박계 좌장 꼬리표를 잃고 ‘탈박’(탈박근혜계)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김 대표는 2012년 3월 박 대통령이 주도한 19대 총선 공천에서 탈락한 후 이를 수용, 백의종군하는 모습을 보였다. 18대 총선처럼 김 대표가 탈당, 무소속 출마를 감행했다면 당이 쪼개질 위기에 내몰릴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평이 나온다. 김 대표와 박 대통령이 다시 손을 잡은 것은 2012년 대선국면이었다. 박 대통령은 김 대표에게 대선 캠프 선대본부장, 총괄선대본부장을 맡겼다.
하지만 지난 대선 때의 전략적 동거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간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다는 게 대체적 관측이다.
김 의원은 비단 박 대통령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청와대 내 대통령 주변에 있는 인사들과 더욱 껄끄럽다는 것도 공공연한 비밀이다. 김 의원이 친박에서 밀려난 것도 이들과의 갈등 때문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특히 5선인 김무성 의원이 이른바 친박 보좌관 출신 인사들이나 ‘신박(新朴)’ 의원들을 낮게 보는 분위기가 있고 이것을 기분 나빠 하던 인사들이 이른바 김 의원의 ‘비토’ 세력이 되어 권력 주변에서 그를 밀어냈다고 알려졌다. 그런 대통령 보좌진들이 김 의원이 당권을 장악하고 나아가 대권에 까지 도전하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따라서 청와대 내에서는 김기춘 실장과 문고리 3인방이 김 대표에 대한 상당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최근 김 대표 장녀의 수원대 특혜 채용이나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도 대부분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 보도된 것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는 분석이다.
김 대표가 대권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당선 가능성을 낮게 보는 이유는 그가 검증받아야 할 사안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청와대에서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넘어야할 산 많은 대권가도

본지에서 보도했던 것처럼 한국 대통령으로 당선되기에는 국민들의 반감을 살 만한 약점이 많다. 우선적으로 부친의 친일행적 논란이 있고, 형제들간 재산 분쟁, 딸의 특혜 채용 등이 꼽힌다. 본지가 이미 보도한대로 그는 자수성가형이라기보다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유복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 김 대표의 부친인 김용주 선생은 전남방직그룹 창업자이자 회장으로 해방 직후 신한제분을 운영하고 대한해운공사 사장과 주 일본공사관 공사를 지냈다. 그는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기도 한다.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으며, 전쟁동원 친일단체인 조선 임전보국단 간부로서 황군(일본군)에게 ‘위문편지 보내기 운동’을 주도한 사실이 1941년도 매일신보에 실려 있다. 매일신보에는 “금전용주(金田龍周)씨로부터 황군 장병에게 감사의 전보를 할 것을 긴급동의하야 만장일치로 가결”됐다는 내용이 적시되어 있다.

김 전 회장은 원래 전라도 토박이 사업가였으나 해방 직후 도망치듯이 부산으로 이사를 갔다. 그리고 부산에서 카페(음식점)을 하던 김무성 대표의 어머니를 만나 김 대표를 출산했다. 김무성의 의원은 배다른 형제들과도 현재 재산문제로 지금까지 대립관계에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LA 얼바인에 살고 있는 동생 김남권 씨와 형 김한성 씨는 하와이에서 ‘토다이’라는 일식부페를 경영하고 있다. 그러나 김무성 대표와는 소원한 관계로 이들과는 거의 왕래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사회에서 친일이나 특혜채용, 형제간 분쟁은 선출직 정치인으로서는 치명적이다. 국회의원까지는 몰라도 전국구 단위 선거에서는 더욱 그렇다. 여당이 이를 가만히 놔둘리 없다.
김무성 대표는 공식적으로는 부인하고 있어도 현재 대권에 대한 꿈을 익혀가고 있다. 하지만 현 정권이 그를 밀어줄지는 미지수다. 다른 사람은 되도 김 대표만은 안 된다는 것이 현재 분위기기 때문이다.
김 대표는 이럴수록 청와대와 각을 세우며 자신의 존재감을 세우려 할 것이다. 차기 대권을 둘러싼 당청간의 갈등이 하반기 본국 정치권 태풍의 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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