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정밀취재4> 한국판 웨런버핏을 꿈꾸는 월셔은행 고석화 이사장 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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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거상(巨商) 임상옥은 “사람이야말로 장사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이윤”이라고 했다. 거상은 위기에 강한 법이라고 한다. 위기를 기회로 삼고 이를 극복한 거상이 오히려 사업체를 키워나간 계기를 만들기도 한다. 미국 내 한인은행들의 수는 본국에서 진출한 2개 은행을 합해 모두 20개다. 총 자산규모도 지난해 현재로 200억 달러를 돌파했다. 이들 한인은행들에서 근무하는 직원도 3,700명에 이르고 총 지점 수도 240개가 넘는다. 이 많은 은행들 임원 중에서 유독 윌셔 은행의 고석화 이사장(70, 미국명Steven Koh)은 독특한 면모를 지닌 거상이라 불린다. 그는 윌셔은행 한 곳에서만 무려 35년을 지냈다. 한인은행 이사장 중에서 그가 유일하다. 한 우물을 파도 이 정도면 미국 은행 에서도 찾기가 힘들다. 윌셔은행은 고석화 이사장에게 분신이나 다름없다.
지난해 4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14 가장 신뢰할 만한 50대 미국 금융회사’에 윌셔은행이 뽑혔다. 이 은행은 2014년 현재 미국 전역에 35개 지점과 7개의 대출 사무소를 두고 있으며 자산규모 39억 3,204만 달러로 40억 달러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인 은행 중에서 BBCN와 한미은행과 경쟁을 하는데 두 은행과 달리 윌셔은행은 고석화 회장의 은행이라는 점에서 이의를 달리할 사람은 한명도 없다. 윌셔은행의 신화를 만든 고석화 이사장의 꿈은 뱅커(Banker)가 아니다. ‘노블리제 오블리주’를 실천하고픈 ‘나눔’의 꿈, 자선사업가 (Philanthropist)가 그의 인생 목표다.  <성 진 취재부 기자>

‘여러분의 꿈을 윌셔은행이 이뤄드리겠습니다’
윌셔은행은 올해 초부터 big 3 한인은행 중에서 선두로 영화배우 겸 탤런트 차인표를 내세운 스타 광고로 고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성실함과 신뢰성으로 대표되는 차인표의 이미지는 윌셔은행의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는 데 적지않은 공을 세웠다는게 은행가의 이야기다. 차인표 광고를 통해 ‘한인 최초은행에서 한인 대표은행으로’라는 이미지를 강조한다
고석화 월셔은행 이사장도 “돈은 버는 것보다 가치 있게 쓰는 것이 중요하다” 며 매년 기부에 나서고 있다. 지난 2005년에 사재 500만 달러를 출연해 기부 재단 ‘고선재단’을 설립한 그는 ‘한국의 워런 버핏’이 꿈 이다. 모교 연세대에 1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세계 속 한국인 부호의 한 사람으로 주목받는 그에게 이유는 따로 있다. 오늘날 국경이 희미해진 시대에서  세계 속에서 일으키는 “경제적 한류”가 단순히 적은 밑천으로 위기를 이겨내고 성공한 것에서만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또 다른 기업방침은 기업을 통한 부의 축적은 인생의 마지막 목적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 목표인 보람된 일이라는 것이다.

기부천사 웨렌 버핏이 롤 모델

윌셔은행의 성공 신화를 이룬 고석화 이사장에게 가장 존경하는 기업인이 누구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서슴없이 미국 사람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크다는 웨런 버핏을 네세운다. 이유는 간단하다. “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쓰기 때문이다.”며 “웨런 버핏은 기업인의 표상이다.” 라며 그를 롤 모델 로 꼽고 있다. 언론과 인터뷰를 할 때면 자신이 맡고 있는 고선재단을 홍보하거나 자신에 대한 자랑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웨런 버핏의 부모처럼 고석화이사장도 돈에 관한 모든 것을 어릴 적부터 배웠다고 한다. 고석화 이사장은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사회는 고통과 슬픔을 계속 안고 나갈 것이다”라며 돈에 대한 명쾌한 가치관을 설명했다.
어렸을 적부터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는 부모의 가르침에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소위 몸에 밴 체화 (embodied)된 부자가 바로 고석화 이사장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부터 자선사업가를 꿈꾸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성공신화를 개척한 그의 진정한 꿈은 지난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 이사장은 2005년 말 개인 재산 500만 달러를 출연 “고선재단(Koh Charitable Foundation)”을 설립했다. 이에 대해 고 이사장은 “남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위해서 재단을 만들었다”며 “이는 기업인의 가치관이자 자신의 가치관이다”고 밝혔다. 기업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는 대목이다.
‘고선재단’은 신체적으로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어려운 학생들과, 메디컬 연구기관 등에 후원 활동 을 하고 있으며 3년 전 모교인 연세대에 성적은 좋은데 가난해서 등록금 납입이 어려운 학생들 에게 100만 달러의 장학금을 쾌척했다.
고 이사장은 “기부문화, 기부운동, 재단운영의 철학 등은 개인이나 기업인의 삶의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 며 “기부는 돈을 건네주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마음, 인생을 나눌 때 순수하다.”며 기부의 의미를 해석했다.

 ▲ 고석화 이사장 부동산 보유현황

고석화의 분신 윌셔은행

월셔은행은 지난 1980년 자본금 500만 달러로 LA에서 최초로 한국계 은행으로 출발했다. 1986년에 이르러 은행이 심각한 경영난에 봉착하자 고석화 이사장이 이에 전격 투자했다. 당시 한인들이 금융기관 지분을 10%이상 보유하면 개인자금 운용에 각종 제약이 따르는 규정 탓에 투자를 꺼릴 때 그는 과감히 지분26%를 확보하며 최대 주주가 된다.
이때 들고 나온 것이 눈에 보이는 성장보다 수익위주의 경영방침을 천명했다. 또한 직원들과의 친화를 바탕으로 상생의 원칙을 구현했다. 점차 경영정상화가 이뤄질 즈음인 1989년 은행이 일부 경영진의 스캔들로 또 다시 존폐위기에 처한다.
이런 가운데 고 이사장은 동포은행을 살리자는 호소로 위기를 극복하여 마침내 2003년에는  478개 지방은행 가운데 1위로 뽑힌데 이어 2004년에는 미국 내 전체은행 61위로 선정됐다. 이어 2005년과 2006년에는 포춘지 선정 “최근 3년간 초고속 성장기업”에서 당당히 79위와 70위에 랭크되었다.
윌셔은행은 한인자본과 유대인자본이 합작해 은행을 경영하고 있는 독특한 은행이다. 고석화 이사장의 독특한 면모와 일치한다. 유대인들이 파트너가 됨으로써 그들의 지혜와 끈기 및 성실함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다.

고석화 이사장은 경영철학에 대해 “기업은 스스로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사람이 기업을 망하게 만든다.”며 인재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의 이론은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므로 사람이 변하고 뚜렷한 목표를 세워 노력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런 면에서 윌셔은행도 스스로가 변해 상하조직에서 평면조직으로 혁신하고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인센티브 프로그램을 개발한 덕분에 지난 2000년에서 2006년까지 예를 들면 주가가 2,000% 이상 오를 수 있는 탄탄한 은행이 되었다.
이같은 초고속 성장의 바탕에는 고석화 이사장이 직접 나서기보다는 은행 경영인들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소신 있게 경영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 주는 것이 그이 역할이었다.
고석화 이사장의 성공비결은 경영인들이나 직원들이 최선을 다하도록 밀어주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 내부에서는 종종 그를 “응원단장”이라고 불린다.
10년 전에 그는 직원들에게 사무실에서 앉아서 계획하고 진출하는 것은 옛날식 세일즈 컨셉이라는 것이기에  마케팅 컨셉을 바꾸어 목표는 미국1위이자, 세계1위 은행을 따라 잡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에서 가장 큰 은행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작할 때 금문교 근처 방 한 칸에서 “뱅크오브 이태리”라는 이름으로 시작했지만 오늘날 세계 일류은행이 되었다. 윌셔은행도 미주 동포를 위해 설립됐지만 BOA처럼 되지 못한 법은 없다며 ‘미국 아니 세계최고의 은행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강조한다.

성공의 비결과 핵심전략

고 회장은 은행에서 이사장이지만 별명이 ‘응원단장’이다. 그가 직접 나서기 보다는 다른 경영인이나 직원들이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하고 소신 있게 경영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해 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며, 최고의 경영자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의 성공비결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상하조직에서 분권화조직으로 바꾼 것이다. 각 부서 자체적으로 예산을 세우고 수익을 추구 하는 평면형 조직으로, 팀워크에 치중하면서 진정한 시너지효과를 달성하고 있다.
둘째는 유대인 자본과의 합작에 따른 효과이다.

 ▲ 고석화 이사장 엘리스 아일랜드상 수상

한국계 은행 중 유일하게 비 한인 임원들이 가장 많다. 이것이 처음에는 한인 타운에서 약점이었으나, 지금은 반대로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파트너가 됨으로써 그들의 지혜와 끈기 및 성실함을 잘 활용하고 있으며, 좀 더 건실 하고 경쟁이 덜 심한 시장 개척은 물론 미국 주류사회 진입이 훨씬 용이해졌다.
셋째, 은행업은 대출이 부실화되지 않도록 하는 리스크 매니지먼트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미 연방정부의 중소기업육성 융자보증 프로그램 등 각종 중소기업지원 제도를 적극 활용했다. 이런 프로그램들은 정부 보증이 융자액의 70~80%에 이른다. 그 덕분에 한인 중소기업들에게 좀 더 많은 자금지원을 해줄 수 있었고 은행 자산건전성도 확보됐다.
여기에 고석화 이사장은 한국 금융의 국제화에도 주목을 했다. 한국 금융의 국제 경쟁력이 극히  미흡한 상태였던  2006년 국제경영개발원(IMD) 발표에 따르면 한국 금융 서비스의 국가경쟁력은 37위로 글로벌 수준에서 크게 미달하고 있다. 당시 홍콩(2위), 대만(16위), 싱가폴(19위), 말레이시아(33위) 보다도 뒤져 있는 상태였다.
국제이동 자본의 누적액(Accumulated Flow of Capital)을 기준으로 한 국제화 정도에서도 선진국의 1/6~1/3 정도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었다. 금융의 국제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글로벌 스탠더드 (Global Standards)’를 충족시켜야 하는 것이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단일화 되어가는 세계시장에서 통용되는 국경을 초월한 약속이자 세계적으로 인정되는 표준으로 이를 이행하지 않은 기업은 세계시장에서 소외되고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한국 금융의 문제도 부분적으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한국 금융의 미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어 경험과 경쟁력을 키우는 것이다.
고석화 이사장은 2007년 5월, 뉴욕 나스닥시장의 폐장을 알리는 종을 울렸는데, 미국 서부지역의 한인이 나스닥 폐장 종을 울린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이는 월셔은행을 자본금 500만 달러로 시작해  당시 총자산 25억 달러의 대표적인 지역은행으로 성장시킨, 고 이사장의 경영실적을 높이 평가 해 나스닥이 폐장의 종을 울리는 영광을 주었던 것이다.

“베스트뱅크’ 만드는 것이 꿈”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2014년에 윌셔은행을 ‘2014 가장 신뢰할 만한 50대 미국 금융 회사’에 선정했다. 이는 한인사회뿐만 아니라 소수계 커뮤니티의 경사이기도 했다. 이는 기업의 투명성과 윤리적인 경영을 인정받은 것이다.
포브스는 미국의 은행과 보험사 8천 개 가운데 각각 25개를 선정해 발표했는데 한국계 은행 가운데 유일하게 뽑힌 윌셔은행은 금융 투명성 부문에서 100점 만점으로 최고의 신뢰를 받았다. 당시 뉴욕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나스닥 건물 전광판에는 선정을 축하하는 광고가 떴을 정도다.
당시 고 이사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포브스가 전 세계 상장기업들의 실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을 비롯해 사회•경영•회계와 관련된 위험 요소를 연구 조사하는 ‘GMI 레이팅’에 집계를 의뢰해 공정성을 높였다”며 “선정 기업들은 회계, 리스크 관리, 수입•지출상환 방식, 부도 위험성 등에서 최고 평가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윌셔은행은 미국 구글에서 ‘베스트뱅크’라는 검색어를 쳤을 때 1위로 나오는 은행이 되는 것이 목표”라며 “앞으로 미국 경제의 활성화를 바탕으로 현재 갖춰놓은 틀 속에서 경쟁력과 수익 증대를 위해 시장 다변화를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월가의 투자 전문가와 증권 전문가들이 읽는 신문인 월스트리트저널 등은 1년에 한 번 순위를 매겨 구글에 ‘베스트뱅크’를 올린다. 윌셔뱅크는 1983년 딱 한 번 1위를 차지했고, 그 영광을 바탕으로 고속 성장을 이뤘다. 지금 고 이사장은 1983년의 영광을 재현 하겠다며 의지를 다지고 있다.
지난 2013년 ‘윌셔스테이트뱅크’에서 ‘윌셔뱅크’로 개명한 이 은행은 설립 역사상 가장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해 10월과 11월 자산 2억 달러의 뱅크아시아나와 자산 6억 달러의 새한은행을 인수합병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시장 경쟁력을 확보한 것은 물론 수익성도 탄탄해졌다. 이제는 타 민족 고객 확보에 명운을 걸고 있다.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2007년과 2010년 뉴욕 나스닥 증권거래소의 개장, 폐장을 알리는 종을 한인으로는 두 번이나 쳤다. 나스닥은 재정 상태와 경영 실적이 우수한 기업의 경영진이나 이사진을 초청해 오프닝과 클로징 벨 타종을 맡기고 있다.

‘구글 검색의 1위 은행 목표’

윌셔은행에도 어려움이 많았었다. 지난 2012년 5월 윌셔은행이 금융감독국의 행정제재 (MOU)에서 벗어난 데 이어 윌셔은행의 지주사인 윌셔뱅콥(나스닥심볼 WIBC)도 MOU에서 벗어났다.
윌셔뱅콥은 지난 2012년 5월 26일자로 연방금융감독당국인 FRB로부터 MOU를 해제 받았다. 윌셔는 금융위기로 인한 부실대출이 급증하면서 지난 2011년 6월29일 FRB 로부터 MOU를 받았다가 1년4개월여 만에 제재에서 풀려났던 것이다.
이에 앞서 윌셔은행은 지난 5월18일자로 지난해 5월 6일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와 캘리포니 아주 금융감독국(DFI)로부터 받았던 MOU에서 빠져나왔다.
또한 연방 구제기금인 TARP자금도 모두 상환했고 2012년 주주총회를 통해 최대 발행 가능 주식수를 8천만 주에서 2억 주까지 늘려놓았다. 인수합병(M&A)을 위한 증자 가능성을 두고 준비한 조치였다. 은행의 운영 및 성장 전략을 펼치는 데 걸림돌이 된 장애물이 모두 제거된 윌셔은행의 행보는 자연스럽게 M&A쪽으로 향했다.
세계적인 경제권위 매체인 월스트리트저널은 한때 윌셔은행과 한미은행의 합병 가능성을 언급 한 적이 있다. 새한은행과의 합병 이전 때다.
윌셔은행이 M&A를 추진하면 규모가 작은 은행을 인수하는 방법도 있지만 효과가 크지 않다는 점에서 BBCN이나 한미은행을 상대로 합병할 가능성을 미주류사회에서는 높게 보고 있다. 특히 BBCN뱅크의 대항마가 되기 위해서 외형 자산규모를 키울 것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여기서 최대의 관건은 윌셔은행에서 절대적인 파워를 지닌 고석화 이사장의 결단 여부였다. 윌셔은행이 비슷한 규모의 한미은행이나 기타 상대와 합병하게 되면 고 이사장의 지분율과 그에 따른 영향력은 감소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점 때문에 윌셔의 성장전략 가운데서 M&A를 통한 외형적 규모화는 현실적으로 어려울 것 이라는 시각도 많았으나 2013년 새한은행 등 2개의 은행을 무리 없이 합병했다. 하지만 대주주의 위상 때문에 윌셔은행이 규모의 경쟁을 포기하고 실질적인 효과가 미미한 군소은행 인수 쪽으로 방향을 잡아 경쟁력 측면에서 대형화된 BBCN 등과 겨루기 쉽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러나 야심찬 고 이사장의 숨겨진 전략에는 장차 BBCN이나 한미은행과의 합병도 생각하고 있다고 분석 하는 경제인들도 상당수다.
“윌셔은행은 미국 구글에서 ‘베스트뱅크’라는 검색어를 쳤을 때 1위로 나오는 은행이 되는 것이 목표이다“라고 밝히는 고석화 이사장은 자신의 총 재산가치중 윌셔은행 주식의 비중이 50% 정도 된다고 밝힌바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고 이사장의 보유주식 가치와 더불어  그의 소유인 오크쿼리 골프장, 퍼시픽 스틸 회사 등을 포함한 부동산 사업체 등을 취합해보면 그의 총 재산 은 약 2억 달러 정도로 추정된다.

 

신용과 인내심은 비즈니스의 덕목

 

 

고석화 이사장은 지난 1971년 처음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온 동포다. 한마디로 ‘올드 타이머’이다. 한국에서 철강회사에 근무하다 학문의 뜻을 두고 건너왔지만 미국에서 곧바로 철강비즈니스에 뛰어들게 됐다.
비즈니스 운도 작용했겠지만 고 이사장의 성공은 결국 비즈니스에 대한 철학과 신조에서 따라왔다.
그의 사업 철학은 비즈니스에서 평범한 명제로 통하는 ‘신용’이다. 고 이사장의 성공과 신용에 대한 믿음을 설명할 때 유명한 일화가 거론된다.
철강 수입은 원자재이기 때문에 분기별로 그 수입의 양이 정해지는데 양이 많을 경우 가격도 다소 떨어진다는 것. 때문에 비슷한 시기이지만 먼저 구입하는 업체는 결과적으로 더 비싸게 구입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고 이사장은 이때 떨어진 가격만큼을 소급 환불해주면서 고객업체들로 부터 신뢰를 얻게 됐다고 한다.
신용과 함께 고 이사장은 또 인내심을 비즈니스의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꼽았다. 사업가로 꿈을 키우는 후배들에게 고 이사장은 “신용을 지키면서 최소한 10년 이상 참는 인내심을 가지면 사업은 성공하게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 이사장이 강조하는 인내심은 자신의 사업뿐 아니라 이사장을 맡고 있는 윌셔은행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됐다.
80년대 초 윌셔은행과 인연을 맺었던 고 이사장은 당시 위축된 시장 환경과 당국의 제재조치 등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윌셔은행의 주식을 90년대 초 대거 매입 최대 대주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윌셔은행의 시대를 열었었다.

현재 고 이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총 560여만주. 윌셔은행의 총 발행주식 중 7%가 넘으며 마켓 벨류로 따져도 6천여만달러에 이른다.
윌셔의 주식가치는 90년대 후반부터 최근까지 20배 넘게 뛰었지만 막상 고 이사장이 뛰어들던 80년대 중반에는 주식가격이 뛴다는 기대감은 고사하고 투자한 돈을 제대로 보존이나 할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러나 고 이사장에게는 어려운 시절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스스로도 노력을 쏟아 부었다. 한인타운 경제에 있어서 은행이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될 것이라는 비전과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경영진을 도왔다.
윌셔은행이 고속성장으로 가속도를 올릴 즈음 고석화 이사장에게는 민수봉 행장과 숙명적인 인연을 맺게 되어 은행을 업그레이드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한국 은행가의 베테랑인 민 행장과의 처음 만날 때 고석화 이사장은 당시 민 행장이 ‘저는 고객 명단 리스트가 없다. 윌셔은행에서 새롭게 출발할 것’이라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초창기 윌셔은행은 경제인들이 가장 많이 본다는 인베스터스 비즈니스 데일리에 의해 2003년 478개 지방은행 가운데 1위로 뽑힌데 이어 2004년에는 미국 내 전체은행 61위로 선정 했고 1990년부터 2004년까지 윌셔은행의 주가 수익률은 무려 1천900%로 웬만한 벤처기업의 신화를 능가했다. 그럼에도 겉으로 보이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믿는 그의 사무실은 대주주 참여 이후 지금까지 변한 것이 없어 일반 중역들의 사무실 보다 오히려 작을 정도다.
월드옥타 (세계한상대회)제15대 회장을 지낸 그는 미국 소수민족연대협의회(NECO)로부터 미국 최고의 이민자로 선정돼 엘리스 아일랜드상을 받았다. 2007년 무역 증진과 ‘미주 한인의 날’ 제정에 이바지한 공로 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동백장도 받았다.
미국내 아시아계 은행 중 최고의 은행의 하나로 키운 고 이사장의 마지막 목표는 은행이 아닌 자선 사업가가 되는 것이라는 봉사와 나눔의 철학이다.

나눔의 봉사가 생의 목표

올해 윌셔은행 창립35주년을 맞아 지난 6월 25일 윌셔은행 고석화 이사장은 물론 광고모델인 차인표와 유재환 행장을 선두로 많은 직원들이 나서서 LA다운 타운 미드나이트 미션에서 노숙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는 등 봉사활동을 폈다.
지난 1914년 설립돼 100년 넘게 노숙자 보호에 앞장서온 미드나잇 미션에 윌셔은행 직원 50여 명이 새벽 6시와 오후 12시 두 조로 나눠 총 1100명의 노숙자들에게 식사 대접을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이들은 노숙자들과 나란히 앉아 식사도 함께 했다. 그들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말동무가 되어 줬다.
고석화 이사장이 개인재산 500만 달러를 출연해 설립한 고선재단(Koh Charitable Foundation)은 선은 높고 많이 할수록 좋다는 뜻으로 이름 지은 사회사업재단으로 본인 세대에서 뿐만 아니라 나중에도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경제는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부모의 가르침을 받으며 사업가로 성공해 자선사업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설정했던 고 이사장은 고선재단 출범으로 궁극적인 성취감은 자선사업을 실현했을 때라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게 됐다는 것이다.
고 이사장은 자선사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고 믿고 2004년부터 구체적인 재단 설립에 착수했다며 2남1녀의 자녀를 포함한 10명의 이사진으로 구성된 가족 재단으로 출범 했는데, 이는 내 아이들에게 남과 어울려 사는 법, 베푸는 참 뜻을 알려주고 싶었던 데다가 신규 재단이 겪을 수 있는 한계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석화 이사장은  이 재단을 통해 매년  지역사회  20여개 비영리단체에 거액의 후원금을 쾌척하며 자선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매년 총 10만 달러 의 자선기금을 샬롬장애인선교회, 밀알선교단, 비전시각장애인센터, 아태여성보호센터, 성모 마리아 봉사의 집 등 한인 단체와 LA 도심 노숙자 들을 위한 최대 규모의 봉사단체 ‘더 미드나잇 미션’, 홈리스 센터인 ‘오션파크 커뮤니티 센터’ 등 타인종 단체에 후원하고 있다.
고선재단은 매년 불우이웃을 돕는 우수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10여개 안팎의 비영리단체를 선정해 지원해왔다. 특히 저소득층 어린이를 위한 교육과 의료 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비영리 봉사단체를 집중 후원하고 있다.
이는 고이사장은 재단으로 특정 영향력을 발휘하기 보다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한 단체에 지원하고 싶다는 고 이사장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다. 또 일반 봉사단체 보다는 불우이웃을 돕는 단체를 지원 하겠다 는 뜻이다. 선정위원회를 만들기로 한 것은 이같은 뜻을 시스템으로 정착하기 위한 것이다.
고선재단은 우선 국세청에 비영리기관 501(c)로 등록되고 2~3년간의 재무재표를 제출할 수 있으 며 지출 중 관리비용이 적은 곳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 타커뮤니티에 대한 지원도 일부 병행할 생각인데 이는 타커뮤니티에 대한 자선은 장기적으로 한인사회의 덕으로 되돌아 올 것 이라는 고 이사장의 믿음이 반영된 것이다.
기부나 자선활동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500만 달러의 재단을 만드는 것은 고 이사장과 같은 부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세상에는 부자가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있고 보통사람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이 있는데 고 이사장은 부자가 할 수 있는 선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이다.
고선재단을 통해 젊은 시절 꿈꾸던 사회사업의 길을 이제 걸을 수 있게 됐다는 고 이사장은 ‘노블리제 오불리주’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꿈이다.
고선재단의 500만 달러가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우선 객관적인 짐작이 필요할 듯하다. 부자가 내놓는 큰돈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한인커뮤니티와 더불어 성장

2007년 당시 추정된 고 이사장의 1억 5천만 달러의 총 재산중 재단에 출연한 500만 달러를 계산해보면 그의 재산의 3.3%정도이다. 이 3.3%를 다시 보통사람의 재산에 적용해 역산하면  70만~80만 달러짜리 집을 소유한 보통 사람의 재산에 비유하면 약 3만3000 달러에 해당한다.
이처럼 70-80만 달러의 집 한채를 소유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평생동안 내놓는 각종 자선금이나 기부금을 모두 합해서 3만3000달러를 넘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같은 비유로 볼 때 고 이사장이 재단으로 쾌척한 500만 달러는 단순히 부자이기 때문에만은 아닌 또다른 마음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로 볼 수 있다.
고석화 이사장은 윌셔은행과 고선재단이 추구하는 목표는 ‘우리 주위의 커뮤니티와 더불어 함께’라는 불우이웃 돕기 운동이다. 이같은 운동은 한인타운을 행복하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는 신념이다. 그래서 그는 앞으로도 한인타운의 봉사단체는 물론 힘들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힘쓰는 타인종 봉사단체들도 찾아 힘껏 지원하겠다는 것이 생활 목표이기도 하다.
“저의 마지막 명함에는 성공한 사업가나 대형 은행의 이사장이 아닌 불우한 이웃을 돕는 자선 사업가로 이름이 찍히기를 원합니다.”

 ▲ 윌셔뱅크 이사등 고이사장을 포함한 특수관계자의 지분이 10,24%로 804만주이기 때문에 고이사장의 주식은 특수관계자 지분의 70.4%에 달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최대주주인 것이다.

1971년 연세대 졸업 뒤 미국에 유학차 도미한 고석화는 1975년 한국의 철강제품을 미국에 수입해 판매하는 퍼시픽스틸을 설립, 큰돈을 벌기 시작했다. 1986년 윌셔뱅크의 이사가 된 뒤 1993년 윌셔스테이트뱅크의 이사장을 맡았고  2003년 12월 윌셔뱅콥의 이사장이 됐다. 1986년 윌셔뱅크의 최대주주가 됨으로서 사실상 1986년부터 29년째 윌셔뱅크를 이끌고 있는 셈이다. 1981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로 부터 ‘주목받는 아시안 비즈니스맨’ 상을 받았으며 2006년 연방의회로 부터도 상을 받았다, 또 같은 해 연세대로 부터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윌셔은행은 2015년 6월말, 2분기 현재 자산은 45억9천만 달러, 자본금은 5억2천만 달러, 예금은 39억 달러, 대출은 35억5천만 달러, 연간 순익은 3,417만 달러를 기록했다. 또 2분기현재 10만 달러에서 25만 달러의 고액예금은 9억6백여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4억1500여만 달러보다 1.2배나 급증했고 25만 달러이상 예금은 5억6천8백여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 4억4천여만 달러보다 29% 늘어나는 등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월셔뱅크의 주가는 9월 18일 종가기준으로 10.26달러, 전체 시장가치는 8억565만여 달러에 이른다. 고이사장은 바로 이 윌셔뱅크의 대주주로 오늘 현재 565만2407주를 보유하고 있다. 윌셔뱅크 전체주식은 7849만 여주로 고이사장의 지분이 전체의 7.2%에 달한다. 최대주주다. 윌셔뱅크 이사 등 고이사장을 포함한 특수관계자의 지분이 9.86%로 774만주이기 때문에 고이사장의 주식은 특수관계자 지분의 73.01%에 달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최대주주인 것이다.
윌셔뱅크는 기관투자자의 지분이 59%지만, 기관투자자중 최대주주인 Black Rock, Inc. 도 주식수가 6410만 여주, 8.18%이고,  고이사장에 이어 특수관계자 중 2대주주는 도널드 변씨로 81만주, 하기환 전 LA한인회장의 딸 하데이지변호사가 62만8천주로 3대주주, 유재환 행장이 28만8천만 여주로 4대주주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 18일 윌셔뱅크 주식가격은 10.26달러로 고이사장의 주식가치는 5800만 달러에 이른다. 고이사장은 ‘더 고 윌셔트러스트[THE KOH-WILSHIRE TRUST]’명의로 84만5791주, ‘고 자선재단[KOH CHARITABLE FOUNDATION]’명의로 21만7900주, ‘고 윌셔 유한회사[KOH-WILSHIRE LP]’명의로 458만6426주, ‘스티븐고 트러스트’명의로 1145주, ‘고정옥 트러스트’ 명의로 1145주를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다 올해 받은 스톡옵션이 8768주다. 고이사장은 올해 지난 2월 24일 5만8백주로 48만9천여달러, 2월 25일 만2천886주로 12만4천여달러, 2월 26일 13만1314주, 125만4천여달러를 처분했으나 지난달 26일 스톡옵션으로 8768주를 받았다. 이 스톡옵션은 10.3달러에 주식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다. 고이사장의 아들 피터 고[38세]는 2001년부터 윌셔뱅크에서 일하고 있으며 현재 전무를 맡고 있다
고이사장은 현재 LA카운티에만 13채 이상의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고 7개 부동산은 매입했다가 팔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고이사장과 고이사장소유의 법인이 보유한 부동산중 LA카운티 감정가격이 가장 큰 것은 4501 사우스 알라메다스트릿 부동산으로 1055만여달러에 이른다. 또 지난 4월 29일 라디오코리아 사장인 손태수사장과 김영옥변호사 소유의 주택을 매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이사장은 134 프레몬트 플레이스의 이 주택을 376만달러에 매입했다. 이 주택은 대지면적인 만4300스퀘어피트, 건물은 4762스퀘어피트에 이른다. 또 4585 사우스 알라메다스트릿 부동산은 대지면적이 무려 5만4천여스퀘어피트로 감정가격이 160만여달러에 이른다. 이외에도 4535 스타운트애비뉴, 4520 롱비치애비뉴, 4612 롱비치 애비뉴, 4606 롱비치 애비뉴,4602 이스트 롱비치애비뉴, 1721 이스트 47스트릿등의 부동산은 지난 1993년 3월 2일 매입해 22년째 보유하고 있다
또 1461 풋힐 블루버드, 13109 아베니다 산타 테클라, 550 이스트 베이스라인로드, 또 주소가 아직 정해지지 않고 부동산지번만 확정된  부동산등도 소유하고 있다. 고이사장은 지난 2005년 9월 14일1250만달러에 사들인 퍼시픽 팰리세이즈소재16670 VIA LA COSTA 주택을 2012년 4월 매물로 내놓았다. 이 주택은 만775스퀘오피트규모의 6베드룸. 8베스룸규모의 저택이다. 이 주택은 2012년 12월 20일 9백40만달러에 팔렸다. 이 주택인근인 16704 VIA LA COSTA 부동산은 2001년 8월 3일 사들였다가 2004년 4월 28일 270만달러에 매도했다. 또16646 CALLE BRITTANY 부동산도 2004년 4월 23일 150만달러에 매입했다가 2006년 4월 24일 매도했으며 16597 CALLE VICTORIA 부동산도 2005년 4월 25일 475만달러에 매입했다가 2006년 1월 3일 매도했다
1 CENTURY DR #21C 부동산은 2012년 4월 20일 320만달러에 사들였다 지난 6월 12일 439만5천달러에 팔았다. 3460 W 8TH ST 부동산도 2003년 1월 30일 470만달러에 매도했고 13546 LA JOLLA CIR #8B 부동산은 2003년 4월 29일 22만7천달러에 매입했다가 2013년 10월 1일 29만5천달러에 팔았다.

은행 경영에만 몰두하던 고 이사장은 LA 인근 리버사이드에 있는 오크쿼리골프장을 인수해 운영하고 있다. 골프다이제스트가 ‘골프의 요세미티’라고 극찬했던 이 골프장은 지난 2013년 2월 미국 골프코스 소유주 협회(NGCOA)가 선정한 ‘2013 최고의 골프장’의 영예를 안았다. 미국에는 2만여 개의 골프장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 이사장은 지난 2004년 초 샌디에이고 북쪽에 있는 캐슬 크리크 컨트리 클럽(Castle Creek CC)을 650만 달러에 샀다. 이곳은 일본인들이 경영했던 곳이다. 그는 리버사이드에 있는 오크쿼리 골프 클럽(Oak Quarry Golf Club)도 1,250만 달러에 매입했다. 오크쿼리는 팜 스프링스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을 뿐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대리석과 석회암 돌산에 자리 잡고 있다. 오크쿼리 골프장은 원래 1,600만 달러에 건설됐다. 고 이사장의 매입은 아주 좋은 거래였다.
고 이사장이 소유하고 있는 오크쿼리는 최근 미 골프코스 소유주협회 (NGCOA)가 선정한   ‘2013년 내셔널 골프코스상’을 받았다. 미 전역의 골프장 소유주와 관리자들로 구성된 NGCOA는 ▲코스 퀄리티 ▲코스 관리 및 능력 ▲지역 커뮤니티에 대한 기여도 ▲주요 경기 유치능력 등을 고려해 매년 미국 내 최고의 코스를 선정하고 있는데 올해 오크쿼리가 이 상을 수상하게 된 것이다.
오크쿼리는 레드스톤 골프클럽, 샌드크릭 스테이션, 트럼프 내셔널 골프클럽 등과 함께 후보에 올라 이들을 제치고 상을 거머쥐었다.
미국 내 골프장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순위 정보인 ‘Top 100 코스’순위에 따르면, 이미 2008년에 고 이사장의 오크쿼리 골프장은 26위를 차지한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2003년에서도 이 골프장은 ‘반드시 가봐야 할 골프장 Top 10’에 오른바 있으며, 미 서부 해안에 자리 잡은 ‘골프장 Top18’에도 여러 번 선정됐다. 또한 파3홀인 14번 코스는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여러 매체를 통해 인정받고 있다.
오크쿼리 골프장은 과거 골조 채취를 하던 채석장 위에 건설 됐으며, 각 코스는 과거 채석장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호수와 절벽 등이 골프장의 그린과 자연스럽게 조화되어 독특한 멋이 느껴지는 곳이다.
스릴만점의 18홀 챔피언십 코스로 미서부 지역 3000여개 골프장 중 ‘베스트 18 골프코스’로 선정되었다.
후루파 마운틴과 함께 어우러진 웅장한 자연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샷을 날릴 수 있다. 원래 석회암, 대리석을 비롯해 88개의 다양한 광물을 오랫동안 채취하고 공급했던 채석장답게 각 홀은 채석되는 광물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전반적으로 페어웨이는 골프장 이름처럼 오크 트리(참나무)와 쿼리(채석장)로 둘러싸여 있으며 캐년을 끼고 있어 코스 전체에 웅장한 기운이 가득하다. 페어웨이는 좁은 편이고 래터럴 워터해저드 및 나무, 벙커, 도그렉이 많아 블라인드 샷을 치기 쉽다. 경사진 그린은 빠른 편이다.
2000년 오픈한 오크쿼리는 당시 캘리포니아 주에서 최고 레이팅 코스였다. PGA 골퍼 출신의 길 모건 박사와 슈미트 컬리가 디자인한 오크쿼리는 18홀의 퍼블릭 코스로 전체 면적 400에이커, 골프코스는 200에이커에 총 거리는 7002야드다.
채석장 자리에 만들어줘 병풍처럼 홀마다 돌산을 끼고 있어 경관이 수려한 오크쿼리의 시그니쳐 홀은 14홀이다. 파 3인 이 홀은 산 위에서 밑으로 내려 티샷을 날리는 코스는 티박스에서 보이는 그린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특히 그린 옆에 호수는 골프들에게 도전정신을 심어준다.
오크쿼리는 잔디 드라이빙 레인지와 퍼팅그린, 치핑 및 벙커 연습장을 비롯해 7200스퀘어피트 규모의 클럽하우스는 결혼 등 각종 연회장소로도 인기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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