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선생 순국추모행사가 변질된 까닭은?

흥사단LA지부- 국민회기념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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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 순국추모행사 내팽개치고
애국지사 후손 초청 강연회‘웬말?’

도산안창호한국인들은 국내외를 통털어 ‘당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라는 물음에 ‘도산 안창호’를 떠 올린다. 지난 3월10일은 도산 안창호(1878∼1938년) 선생의 순국 78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한국에서는 이날 국가보훈처  주최로 거족적으로 도산 순국 78주년 추모행사를 개최했다. 그런데 이날 도산의 업적을 기리고 보전한다는 흥사단 LA지부(회장 최장호)와 대한인 국민회기념재단 (이사장 권영신)은 도산 순국일 추모를 망각했다. 애초 이날 ‘도산순국 78주년 행사를 가든 스위트 호텔에서 개최 하려던 흥사단 LA 지부는 돌연 행사를 연기했다. 그리고 국민회기념재단 측은 이날 순국일 기념행사를 망각하고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애국지사 후손 초청 강연회’와 ‘출판 기념회’ 행사를 해버렸다. 입으로는 도산을 기념한다는 단체 관계자들이 실상은 도산의 이름을 팔아 자신들의 명예를 세운 것이다. 올해 도산 순국일을 두고 양 단체가 벌인 해괴망칙한 일련의 불미스런 일들을 짚어 보았다.   <성진 취재부 기자>

흥사단은 도산이 1913년 5월 13일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창단한 애국수양 단체이다. 대한인국민회는 도산이 1905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설립한 공립협회의 후신이고, 1912년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가 조직됐을 때 도산이 초대 총회장이었다. 이런 역사라면 오늘의 흥사단과 대한 인 국민회기념재단은 3월10일 도산 순국일에 무슨 행사를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산 순국일을 망각했다.
흥사단 LA지부는 원래 3월10일 도산 순국일 추모 행사를 기획하고 가든 스위트 호텔에서 행사를 하기로 정했다. 그런데 뒤늦게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은 광복회미서남부지회(회장 배국희), 한인 역사박물관(관장 민병용)과 공동으로 <3.1만세 제 97주년 기념>이란 타이틀로 ‘애국지사 후손 초청 강연회’와 ‘미주독립운동유공자 전집’ 출판기념회를 10일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개최키로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독립운동 유관단체이면서 도산이 이끌었던 단체들이 기획한 행사 날짜가 3월10일 같은 날이었다. 양 단체들은 독립운동 유관 단체가 같은 날 행사를 하게 되면 참석자들도 어느 쪽에 가야하는지 고민이 많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애국 지사 추손 초청 강연회

▲ 도산 순국일에 「애국 지사 추손 초청 강연회」

흥사단과 기념재단

국민회기념재단 측이 흥사단 측에 대하여 10일 행사를 함께 한자리에 하자고 제의하였으며, 여기에 기념재단의 임원으로 있는 흥사단 소속 관계자들도 가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기념재단측은 흥사단 미주위원회 위원장을 자신들의 10일 애국지사후손 초청강연회에서 인사 순서를 배정해  도산 순국일을 언급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과로 흥사단 측은 애초 10일에 개최하려던 도산 순국일 행사를 전격 1주일간 연기시키는 해괴한 조치를 해버렸다. 이에 대해 흥사단 일각에서는 “무언가 가치관이 망각된 처사이다”면서 “순국일 기념일을 이처럼 무시해서 될 일인가”라며 분개하고 있다.
이 같은 해괴한 일이 발생하기 전 흥사단 미주위원회 윤병욱 전 위원장이 최근 한국에서 개최된 ‘제7회 대한민국 법률대상’에서 해외동포부문 수상을 하는 영예를 받았다.
윤 전 위원장은 미주한인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LA) 공동회장도 맡았고, 매년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 기념일로 제정하는 법안을 미연방 상하원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시키는 데도 공헌했다. 그가 지은 책으로는 미주독립운동에 관한 <나라 밖에서 나라 찾았네> 등이 있다.
그런데 윤 전 위원장은 국민회 기념재단이 지난달 27일 주최한 ‘한시대의 독립운동 세미나’에 초청 연사로 되어 있었는데 당일 행사에 불참했다. 이 일로 국민회기념재단 측과 흥사단 측이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렸다.
또 하나 문제점은 현재 흥사단 출신으로 국민회기념재단에 임원으로 활동하는 일부 단우가 흥사단 보다는 기념재단에 치우치는 경향으로 흥산단 일각에서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다.
도산 순국일에 대해 한국에서는 정부 보훈처가 ‘도산 순국 추모행사’를 거국적으로 개최한데 비하면, 미국에 있는 관련 단체인 흥사단과 국민회기념재단은 역사적 추모기념일을 망각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애초 10일 순국일 행사를 기획한 흥사단은 분명한 사유 없이 행사를 연기하는 추태를 연출했으며, 두 단체의 행사를 함께 하자던 국민회기념재단 측은 도산 순국일 추모행사보다는 애국지사 후손 초청 행사를 더 중요시했다는 역사의식의 실종을 보여 주었다. 여기에는 보훈처의 행사 지원금이 작용했기 때문도 있다.
한편 이같은 도산 순국일 망각에 대해 도산 유족 측은 10일 “도산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관계자들의 역사의식이 문제다”면서 “이들 중에는 미주 독립운동사의 진면목도 모르는 사람들이 단체를 이끌어 가는 것도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은 광복회 미 서남부 지회, 한인 역사박물관과 함께 지난10일 한인 타운 내에 있는 옥스퍼드 팔레스 호텔에서 도산 순국 78주기와 애국지사 후손 초청강연 및 출판기념회를 가졌다. 이날 약 50명이 참석한 독립운동 강연회에서 4명의 독립유공자 자손들은 집안의 독립 운동 이야기를 진솔하게 소개했다. 이날 도산 순국 추모행사는 정영조 흥사단미주위원장의 인사로 끝나버린 뒷전이었다.

 ‘무엇이 진정 애국인가’

도산의 막내아들인 랄프 안 옹은 유복자로 태어났다며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 미국 한인 동포들이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면서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 지원의 미주 본산인 로스앤젤레스에서 혼신을 바친 부친과 여러 애국지사를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아버지 도산의 일대기가 비교적 잘 알려진 덕분인지 애국지사 후손의 맏형답게 앞으로 자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연설의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경제적 자립을 강조해 미주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로 통하는 김호(1884∼1968년) 선생의 외손자인 안성주(미국 이름 스튜어트 안)씨는 “외할아버지의 본명은 김정진 이었으며 중국에서 김호로 개명한 뒤 미국에 건너와선 찰스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소개했다.
김호 선생은 1920년 캘리포니아 중가주 리들리에 과일 생산ㆍ판매 업체인 ‘김브라더스’를 설립해 100만장자 기업으로 성장하면서 수익금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낸 공로로 1997년 독립장을 수여 받았다. 또한 그는 한인 커뮤니티 봉사단체 설립의 선구자였다. LA한인회 의 전신인 커뮤니티 센터도 설립했다. 한인타운에는 김호 선생의 유지를 기념하여 세워진 ‘찰스 H 초등학교’가 있다.
1907년 고종이 네덜란드 헤이그에 보낸 특사단의 통역으로 활동한 송헌주(1880∼1965년) 선생의 외증손자인 마크 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고등법원 판사는 “외증조부를 필두로 많은 애국지사가 조국 해방을 위해 열성적으로 나설 수 있던 데엔 가족의 희생이 있었다”면서 “그들에게서 조국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을 찾아볼 수 있다”고 했다.
장인환 의사와 함께 1908년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이면서도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미국인 D.W 스티븐스 암살에 나선 전명운 의사(1884∼1947년)의 사위 표한규 씨는 “장인의 저격 의거는 이후 의열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애국가 작사 60년 미스터리…안창호 VS 윤치호 ‘끝장 토론’

▲ 안창호 ▲ 윤지호

▲ 안창호 ▲ 윤지호

국내에서는 60년째 ‘미상’으로 남은 애국가 작사자의 정체에 대해 애국가 작사자를 규명하기 위한 끝장 토론이 지난달 1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려 국내외로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날 끝장토론에서도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이날 안창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안용환 교수는 현재 서울신학대학교 한국사 초빙 교수로 재직 중이고, 윤치호 작사설을 지지하는 김연갑 선생은 국가상징연구회에서 애국가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이들은 애국가 작사를 두고 양분된 가설을 역사적 관점에서 연구해왔다.
안용환 교수는 안창호의 친필 ‘무궁화가 2’를 결정적 근거로 제시했다. 안 교수는 “이 발견으로 자연스럽게 앞의 ‘무궁화가’는 ‘무궁화가 1’로 간주된다. 따라서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라는 사실이 밝혀진 셈”이라며 “애국창가집 제12편의 안도산 작 ‘권학가’ 제목 밑에 ‘무궁화가와 한곡조’라고 명기돼 있어 안창호 작사임을 확실히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안창호 주변 인물 그리고 애국가 작곡가인 안익태의 증언이 안창호 작사설을 더욱 확실하게 해준다는 것이 안 교수의 설명이다.
안창호, 이광수, 이정화 등의 자녀는 각기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라는 얘기를 들었고 안창호의 딸인 안수산 커디는 사망하기 5일 전인 지난해 6월 19일 안 교수에게 이 같은 칼럼을 보내왔다.
안익태의 증언에 대해서는 “누구의 씨인지 가장 확실히 아는 사람은 산모인 아내이다. 안익태는 자기의 남편(작사자)이 안창호라는 사실을 수차례에 걸쳐 자백했다”고 밝혔다.
안 교수는 애국가 가사가 안창호로부터 황사선 목사를 거쳐 안익태에게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전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안익태는 샌프란시스코 한인 교회의 황 목사를 만나 안창호가 지었다는 애국가 가사를 접했다. 황 목사는 이를 ‘안창호가 지은 시’라고 했고, 안익태는 가사를 정확히 베꼈다.
그런가하면, 이광수 부인인 허영숙은 안창호가 “애국가는 내가 지었다”고 하는 말을 직접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윤치호의 아들 윤영선이 ‘애국가 가사를 안창호가 지었다’는 내용이 담긴 이광수의 ‘안도산 전기’를 읽고 찾아와 항의했지만 설득당해 돌아가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1명이었던 이명룡은 1955년 문교부에 출두해 “애국가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연갑 선생은 과거 이미 한 차례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국가기관이 인정한 사례가 있다고 주장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13인의 위원으로 구성한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가 3차에 걸친 조사 끝에 ‘윤치호로 결론, 문교부에 보고하리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문교부는 확정을 미뤘다.
김 선생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윤치호를 작사자로 결론 내렸지만 문교부가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확정을 하지 않았다”면서 “그 상태로 지금까지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으로 온 것이다. 문교부는 윤치호에 얽힌 친일 문제 때문에 ‘개작’하자는 여론이 생겨 국론이 분열된 것으로 봤다”고 설명했다.
윤치호가 애국가의 작사자라는 역사적 증거는 산재해 있다는 것이 김 선생의 주장이다.
함께 작사자로 거론되는 안창호가 대성학교 시절 수학교사인 채필근에게 “애국가는 교장인 윤치호가 지었다”고 증언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실제 당시 발간됐던 신문들에 소개된 윤치호 작사 노래는 애국가의 현재 가사와 일부 똑같다.
독립신문은 1897년 현 애국가와 후렴이 같은 ‘무궁화가’를 윤치호가 작사했다고 보도했고, 1910년 미주 신한민보에서는 애국가 4절을 윤치호가 작사한 ‘국민가’로 소개했다. 그런가하면 조선총독부는 1910년 일본 유학생들을 감찰하면서 유학생들이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부르기로 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윤치호 본인이 남긴 기록들 역시 존재한다. 김 선생은 “4절 애국가가 방서된 자필 ‘가사지’는 지난 1955년 조사 당시 윤치호 친필 여부에 대한 수사를 마쳤다”며 “그가 1908년 발행한 ‘찬미가’는 찾지 못해 자료로 채택되지 못했지만 무궁화가와 애국가가 수록되어 있었다. 이 두 자료에는 ‘하나님’이라는 용어 등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한편 지난 2012년 흥사단(당시 이사장 반재철)은 지난 2년간 추진해온 애국가작사자규명사업에 따라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07년 3월 선천예배당에서 애국가를 작사하고 후일 현 최고령 애국지사 구익균옹 에게도 이를 직접 증언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흥사단은 지난 2011년 3월 독립지사 윤형갑 선생(1904-1961)의 증언을 종손 윤정경씨(76)가 채록한 CD자료를 입수했다. 증언 자료에 따르면 도산 안창호 선생은 1907년 3월7일 평안남도 선천예배당에서 ‘백두산과 두만강물이’ 찬미가를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 곡에 맞춰 부르는 것을 듣고 사상을 얻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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