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2016년 청와대와 1974년 백악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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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청와대와 1974년 백악관’청와대-백악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사실이 아닌 것 같은 것을 말했을 뿐입니다”
이 말은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하면서 국민에게 한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4일 국정연설에서 ‘개헌제안’이라는 깜짝쇼를 벌였으나 하루가 지나면서 ‘최순실 씨 관련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자 국민에게 직접 사과했다.

그러나 불과 1분 40초 동안 500자도 안 되는 사과 성명으로 끝냈다. 성명 발표를 1시간 40분 동안 표명했더라도 부족한 판인데 말이다. 그 다음날 더군다나 아버지의 추모일인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도 불참했을 정도로 참담했다고 한다.

이번 박 대통령의 입장 발표와 사과만으로 의혹 사건을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 이유는 국민에게 한 사과 성명에도 사실이 아닌 것을 말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박 대통령은 다만 최씨에게 연설문 표현 등의 도움을 받은 것은 “좀 더 꼼꼼하게 챙겨 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고 했다. 또 대선 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아시다시피 선거 때는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듣는다”고도했다. 박 대통령은 또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최씨 도움받기를) 그만뒀다”라고 했다.

그러나 밝혀진 정황들에서 최씨는 박 대통령 취임 2년 차 하반기인 2014년 11월까지 대통령의 국제행사 의전은 물론 인사 정책에까지 개입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청와대 보좌 체제가 갖춰지지 않을 때 까지였다” 는 박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편 이런 사과 성명을 들었을 때, 박 대통령은 선거에서 당선되고 공식 취임을 하고도 한참 동안 청와대 보좌 체계는 제대로 가동을 하지 못한 것으로 스스로 밝힌 것이 된다. 이것이 과연 대한민국의 청와대인가!

박 대통령이 입만 열면 “선진국으로 가는 대한민국….”이라고 열심히 강조하는데, 어쩌다 봉건시대 나 있을 법한 ‘수렴청정’같은 ‘최순실 사건’이 버젓이 2016년 청와대에서 일어났는지, 도무지 이해 가 되지 않는다.

미국의 ‘워터 게이트 사건’에서 당시 닉슨 대통령은 처음에는 직접이나 간접적으로도 관련이 없었다. 자신이 시킨 일도 아니었다. 원래부터 모르고 있었던 사건이었다. 하부 공화당 재선위원회 모사꾼들이 지역 민주당 당사에 들어가 도청 장치를 설치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 사건으로 경찰이 범인 몇 명을 잡았으나 단순 절도 사건으로 끝날 문제였다. 문제는 ‘그런 사건을 알고 있었는가’에 대하여 닉슨이 ‘알고 있었다’, ‘철저히 수사하라’고 말했으면 그것으로 끝났을 사건이었다.
이처럼 사건은 아주 사소한데서 시작되었다.

1972년 6월 17일 밤늦은 시각 민주당전국위원회가 입주해 있던 워싱턴 DC 워터게이트 호텔의 경비원은 괴한이 침입한 흔적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호텔에 출동한 경찰은 민주당 사무실에 도청 장치를 설치하려던 괴한 5명을 현행범으로 체포하였다. 체포된 범인들은 끝까지 단순 절도임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어디선가 단순 절도범에 어울리지 않는 거물급 변호사가 나타나서 이들을 변호하고 결정 적으로 일당 중 1명이 가지고 있던 수첩에서 백악관 보좌관인 하워드 헌터의 전화번호가 발견되면서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게 단순 절도 사건이 아니라는 의혹이 커지자, FBI가 직접 수사에 착수했다. FBI가 개입할 정도로 일이 커지자 닉슨과 주변 측근 인사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건을 축소, 은폐하기 시작했다. 닉슨은 우선 CIA에 FBI의 사건 수사를 방해하고 최대한 은폐하라고 지시했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던 일이, 닉슨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면서 점점 커지게 된 것이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은폐 공작까지 지시했다는 사실이 특별검사 수사로 알려지면서 국민들 의 분노를 사게 됐다.

이 사건 폭로에는 특히 워싱턴 포스트지의 신참 내기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 이외에도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벤자민 브래들리와 사주 겸 발행인이었던 캐서린 그레이엄도 큰 역할을 했다. 브래들리 국장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사건 기사를 냉철하게 편집해 실어 사건의 전개 과정을 조율해냈으며 사주 그레이엄은 워싱턴 포스트의 붕괴를 각오하고 두 기자를 보호하며 외풍에 맞섰다.

실제로 당시 닉슨 행정부에서는 워싱턴 포스트에 대해 강도 높은 세무 조사는 물론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해왔던 걸로 알려져 있다.

닉슨은 ‘법과 질서’를 내걸고 국내 치안 회복, 중국과의 국교회복, 베트남 전쟁 종결 등 외교면에서 성과를 올렸으나, 워터게이트 민주당 회의실 도청사건으로 여론과 의회의 탄핵 압력을 받았다. 당시 미국 하원은 탄핵을 결의했고 상원도 탄핵을 승인하려 하자 자진 사임을 선택하였 던 것이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I’m not a crook)”라며 끝까지 결백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닉슨은 탄핵 직전에 사퇴를 결심했다. 결국 1974년 8월 8일 TV로 생중계된 연설을 통해 워터게이트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 사임하는 미국 역사상 최초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닉슨은 이튿날인 1974년 8월 9일 국무장관 키신저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부통령 포드가 제3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 사건으로 ‘문(門)’이라는 뜻의 ‘게이트(gate)’는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권력형 비리 의혹, 부패 스캔들 등의 의미로 널리 사용하게 됐다.

만약 닉슨 후임자인 포드 대통령의 사면 결정이 아니었다면 닉슨은 교도소 행이 기다렸을 것이다.
이 사건은 민주 국가의 정치인이 갈 길이란 오로지 국민을 귀히 여기고 그들의 뜻을 받아 철저히 수행하는 것일 뿐이라는 원칙을 다시 보여주는 것이었다.
(성 진 취재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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