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코리아 창사 30주년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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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의 집념과 故 손태수의 도전의 결과물

라디오코리아(RadioKorea, AM 1540, KMPC, 총괄사장 김영준)는 지난 2월 1일로 창사 30주년을 맞았다. 이제는 명실공히 미주 최대 한인 라디오방송 매체이다. 지난달 31일 30주년 축하 파티에 한인사회 각계 각층에서 350여명의 축하객이 운집해 화려한 미디어 잔치를 벌였다. 라디오코리아의 30주년 영광은 무엇보다 임직원들의 애사심, 청취자들의 격려가 원동력이다. 오늘의 라디오코리아의 탄생은 7080가수 이장희씨가 비즈니스맨으로도 성공해 미국에 와서 한국어 라디오 방송을 꿈꾸어 1989년 1월에 LA인근 패사디나 산 속 방송 송출탑 아래 한쪽 공간 구석에서 시험 방송 마이크를 잡은 것이 시작이었다. 무엇보다 라디오코리아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된 것은 바로 미주한인 이민사상 최대수난을 당한 ‘4·29 LA폭동’(1992) 때문이었다.

4·29폭동의 생생한 취재와 구조활동

당시 개국한지 불과 3년밖에 안된 라디오코리아는 정규방송을 중단하고 오로지 폭동 실황 소식과 구조활동을 돕는 세계 방송사상 유례없는 비상체제 방송으로 24시간을 운영했다. 그때 라디오코리아 방송에서는 “우리가 지금 폭도들 때문에 업소 밖을 나갈 수가 없어요. 누가 와서 구해주세요”라는 울부짖는 목소리가 그대로 전파를 타고 울렸다. 그같은 방송을 듣고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어두운 밤길로 동포들을 구하려고 나가다가 목숨을 잃은 이재성군(당시 19세)은 지금 헐리웃 포레스트 모역에 잠들고 있다. 이군은 4·29 폭동 당시 유일하게 목숨을 잃은 한인이다. 미국의 대통령은 언론사를 방문한 적이 없다. 방문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지 부시 대통령(아버지 부시)이 처음으로 언론사인 한인이 만라디오코리아든 LA의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했다. 4·29폭동 당시 최대 피해자가 된 코리안 커뮤니티를 위로하러 조지 부시대통령이 비상폭동대책 상항실이 있는 라디오코리아를 방문해 보도국 마이크를 통해 한인사회에 위로 성명도 방송했다. 이같은 라디오코리아의 활동으로 폭동 당시 국내에서 특파된 취재진들이 대부분 라디오코리아에 와서 폭동 사태를 취재하면서 국내에 라디오코리아 방송의 활약상이 크게 알려졌다. 당시 부시 대통령도 라디오코리아에 오면서 덩달아 미국의 언론들도 라디오코리아를 취재하면서 미주류 언론에 “한인사회의 CNN방송”이란 별명도 얻었다. 이처럼 폭동 당시 모든 정규방송을 중지하고 비상 방송체제로 잠시 전환하여 동포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특히 광고방송도 10일 동안 전면 중단하고 신속한 상황 방송으로 동포들의 피해를 줄였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LA 시의회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라디오코리아가 국내외로 더 알려지게 된 것은 다저스 야구를 처음으로 중계했기 때문이다. 박찬호가 LA 다저스에서 활동했을 적에는 2001년까지 KBS 제2라디오와 공동으로 라디오 중계 방송을 제작하였으며, 현재도 LA 다저스의 공식 한국어 중계방송을 하고 있으며 여기에 월드컵 중계방송까지 하여 스포츠 팬들에게는 떼놀 수 없는 방송이다. 라디오코리아가 한인들에게 더 가까히 가게된 것은 큰 사건이 발생하면 가급적 현장 실황방송을 고집한 이장희 사장의 지침(?)으로 청취자들의 관심을 모으게 됐다. 4·29폭동후 2년만에 발생한 1994년의 ‘노스릿지 지지’때도 라디오코리아는 재난구호방송의 역할을 하였다.

라디도코리아는 흡사 한인사회 CNN방송

초대사장 이장희와 함께 라디오코리아를 키워온 최영호 앵커는 라디오 코리아의 산역사이기도 하다. 이장희 전사장과는 서울고 동기로 방송에서 호흡을 맞춘 최영호 앵커는 방송전문교육도 받지 않은 그야말로 마이크 앞에서 아마추어로 경륜을 쌓아 이제는 전문 방송인을 가르칠 정도다. 이같은 라디오코리아는 1997년에는 기존 언론사들이 제작한 한인업소록과는 달리 당시 한인들에게 생활화 된 골프 스포츠 등을 수록하는등 생활정보를 대폭 도입한 업소록을 발간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중국계 주파수 운영권자로부터 주파수를 임대하여 방송을 진행해 왔는데, 2003년에 전파 사용료에 이견을 보여 재계약하지 못하고 그해 12월 31일을 끝으로 방송이 일시 중단되었다. 방송이 중단되면서 설립자 이장희 사장이 물러났고, 포항 MBC의 프로듀서로 있다가 미국으로 이민한 손태수 회장이 해당 운영권자와 새로 계약을 맺으면서 2004년 1월 9일에 시험방송을 한 후 1월 22일에 방송을 재개하였다. 손태수 회장이 라디오코리아를 인수하면서 디지털 시대를 이끌어가는 미디어 매체로 새롭게 발돋음하게 된다. 무엇보다 2007년 5월 1일부터는 기존 1230kHz에서 현재의 1540kHz로 주파 수를 대폭 확장하여 남가주 전역을 커버하게 된다. 2005년에는 DirecTV 코리안 패키지를 런칭하고 디지탈 위성방송도 설립하면서 RK Media Group을 설립하였다. 2009년에는 라디오코리아와 함께 내서널 지오그래픽 채널을 DirecTV에 런칭하고 아리랑TV를 LA등 미주에 무료 송출을 시작했다.

라디오코리아는 LA 광역권 기준으로 가장 매매장터와 부동산 임대, 구직등이 활성화 되어있는 인터넷 사이트이기도 하다. 구직이나 아파트나 룸메이트를 구하거나, 이것저것 중고물품을 구할때 유용하게 국내외 동포들이 많이 찾는 사이트가 되고 있다. 2017년 4월 1일부터는 TV조선과 제휴하여 “TV조선 USA”를 LA지역에서 지상파 디지털채널 44-2번으로 방송했으나, 여러가지 여건으로 2018년 3월 31일을 끝으로 “TV조선 USA”방송이 종료 되었다. 최근에는 MBN의 뉴스 프로그램도 녹음해서 방송하는데 모든 시보 광고는 애초 대한항공의 광고로만 되어 있었으나 2015년부터 LG전자가 광고를 내고 있었다가 2018년 3월부터는 한인 은행중 한 곳인 퍼시픽시티뱅크가 시보광고를 하는 중이다. 원래 “라디오코리아”는 1965년 7월12일 오전 7시부터 7시 30분까지 미주 최초의 한국어 라디오 방송때 사용한 명칭이다. 당시 라디오코리아 방송은 MBC문화방송 1기 아나운서인 김영우(작고)씨가, KBS 아나운서 출신 서정자씨, 전미8군 AFKN-TV 엔지니어와 협력해 당시 남가주한인회 이사인 소니아 석 여사의 재정적 도움으로 1965년 7월 12일 잉글우드 소재 KTYM FM 103.9 MC에서 “라디오코리아”라는 이름으로 30분간 방송한 것이 미주에서 최초로 한국말 라디오방송이었다. 이 방송은 그후 1년 후 중단됐다. 그후 김영우 아나운서가 1974년 미주한국일보의 계열사 방송에 들어가 매주 토요일에 라디오코리아 명칭으로 방송하다가 1981년 문을 닫았다. <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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