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리 종합세트 ‘박지원’ 미리보는 국정원장 후보자 지상 청문회

이 뉴스를 공유하기

돈, 여자, 가족, 병역, 학력, 재산증식 등 ‘어느 하나 멀쩡한 게 없다’

이런 자가 대한민국
정보기관의 수장이라니…

박지원문재인 대통령이 박지원 전 의원을 국가정보원의 수장으로 지명했다. 아직까지 국회 정보위원회 구성이 안 되면서 청문회 일정이 잡히지 않았지만, 조만간 청문회가 열릴 것으로 예상된다. 박 후보자는 다선 의원 출신에 최근 들어 각종 정치 관련 라디오, TV 정치토크쇼, 신문 인터뷰 등을 가리지 않고 출연하면서 대중적인 호감도가 높아진 건 사실이지만, 사실 박 후보자만큼 인생 자체가 의혹으로 점철된 사람은 많지 않다. 미국 뉴욕으로 이민, 가발회사를 하다가 198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미국 망명 중에 눈에 띄어 본국 정치권으로 진출한 박 후보자는 김대중 정권 시절 비서실장과 문화관광부 장관으로 실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후 대북송금 사건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 사면복권 후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국회로 복귀한 그는 마치 구속 전의 삶 전체에 대해 사면이라도 받은 양 기세 등등 살고 있지만, 그가 한 나라의 정보기관 수장이 되었다는 것은 과연 그가 그럴 자격이 있는 인물인지를 톡톡하게 검증받아야 한다. 특히 그는 김대중 정권 실세로 각종 무기 사업에 관여해 이득을 취했다는 의혹부터, 그가 권력을 등에 업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여성편력을 취해왔다는 의혹까지 온갖 의혹에 연루된 인물이다. 과거에야 묻고 넘어간 일들이지만 요즘 같은 시대에 관련 의혹들이 불거져 나오면 당장 정계를 은퇴해야 하는 것들이다. 특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자살 이유가 미투 관련 건이었다는 점에서 박지원 후보자는 과연 이런 문제에 있어 떳떳한 것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봐야 한다. 그럼에도 그런 그가 국정원의 수장이 된다면 이는 곧 대한민국호의 민낯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온갖 추문과 비리의혹으로 휩싸인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의 인생을 미리보는 청문회 형식으로 다뤄봤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전라남도 진도 출신인 박 위원장은 70년대 초 뉴욕으로 건너와 브로드웨이 인근에서 가발장사를 하며 돈을 모았다. 돈이 생기면 동시에 권력욕도 생기기 마련. 그는 뉴욕한인회장, 뉴욕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맡으며 힘을 키웠다. 군사정권 시절 전두환 전 대통령이 미국에 방문하자 그는 환영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권력에 민감했고 동생인 전경환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그가 뉴욕을 방문하거나 박이 한국을 방문할 적마다 자주 만났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사정권 인사들과 가까웠던 그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민주당 김경재 전 의원의 역할이 컸다.

필라델피아에서 반정부 성향의 독립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던 김 전 의원이 뉴욕으로 활동범위를 넓히면서 박지원과 알게 됐다. 1983년 김 전 대통령이 워싱턴으로 망명을 오게 되면서 김 전 의원이 박 위원장을 김 전 대통령에게 소개로 만난 두 사람은 당시 금전적 후원자가 부족했던 김대중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지원하면서 관계를 유지해 승승장구하면서 정치9단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로 급성장했지만 두 사람을 소개시켜준 김경재 전 의원(박근혜 정부시절 자유총연맹회장)과는 지금 견원지간이나 다름없는 원수와 같은 관계가 됐다.

이후 꾸준히 김 전 대통령을 측근에서 도우다가 87년엔 급기야 미국생활을 접고 DJ 대선캠프에 합류하면서 국내 정치무대에 뛰어들었다. 92년 전국구 의원으로 본격적인 정치를 시작하게 된 그는 97년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권력을 손에 쥐게 됐다. 그는 문화관광부 장관과 비서실장을 지내며 ‘소통령’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국민의 정부 실세로 통했다.

1. 최정민과의 동거설과 청부살인 의혹

박지원 국정원장 후보자와 영화배우 최정민 씨와의 염문설은 이곳 미주한인사회에서 오래 지낸 사람들은 대부분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최정민 씨는 지난 70년대 안방극장 TV와 영화 스크린에서 인기절정을 누리던 스타였다. 지금 6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사극의 여왕으로 까지 불리던 여배우였다. 최 씨는 지난 1971년 당시 19살의 나이로 TBC TV 8기생으로 합격 브라운관에 얼굴을 선보였다. 그녀는 데뷔 한 후 얼마 되지 않아 TV 연속극 사상 최대의 시청률을 올린 인기 드라마 ‘아씨’에서 기생 홍도역을 맡아 남성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그녀의 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 오르고 있었다. 30여 편의 드라마에서 주연을 한 그녀는 영화배우로 전환 ‘사랑의 학교’ ‘마부’등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으며 73년 영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은 한국 영화사상 최대 히트 작품을 만들어 냈다.

50여 편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한 그녀는 76년 ‘이 밤이여 영원히’로 아시아 영화제에서 주연 여우상을 받을 정도로 튼튼한 인기 있는 여배우였다. 그런 그녀가 재벌 2세와 결혼했으나 7개월 만에 파경 후 1977년경 어느 날 갑자기 TV와 스크린에서 소리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당시에는 “미국 교포에게 시집을 갔다”는 설, 초년생 가수와 스캔들 때문에 미국으로 건너갔다는 소문도 돌았다.

▲ 박지원, 최정민 두 사람의 관계는 최정민 씨가 1996년 박 후보자가 경기도 부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언론에 뿌린 진정서에 잘 담겨 있다.

▲ 박지원, 최정민 두 사람의 관계는 최정민 씨가 1996년 박 후보자가 경기도 부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언론에 뿌린 진정서에 잘 담겨 있다.

그녀의 지인들에 의하면 “인기 있을 때 은퇴해야 한다”는 주변 어른들의 충고에 따라 라스베가스에서 꽃집을 경영하는 이모 초청으로 미국 여행길에 올랐다고 한다. 최씨의 어머니 증언에 의하면 어머니가 서울에서 꽃꽂이 작가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최정민은 어릴 때부터 꽃을 좋아하고 꽃집 경영을 바랐다고 한다. 그래서 라스베가스 이모 꽃가게에서 머물며 기술을 익힌 후 뉴욕으로 옮겼다고 한다. 이때 박지원을 만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박지원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가발 장사를 하고 있었으며 돈을 잘 번 젊은 사업가로 한인회 회장으로 활동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최정민 씨가 1996년 박 후보자가 경기도 부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때 언론에 뿌린 진정서에 잘 담겨 있다.

“단지 평범한 여자가 되지 못하고 세상에 제 이름이 알려질까 두려워서 이글을 진작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과거에 유명 연예인 이였습니다. 제가 미국에 1977년 이민을 가서 그곳에서 N.Y. 한인회 회장이였던 박지원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분과 동거를 하면서 저희는 양가 가족들의 후원 받으면서 지낼수 있을 정도로 그분은 저를 사랑했습니다. 한데 몇 년이 흐른 후 그의 가정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고 부인의 정체가 드러나면서 저는 헤어질 것을 결심한 후 다른 사람과 선을 보도록 권유를 받고 선을 봤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지원씨는 사람을 시켜 청부 살인을 하려고 계획하고 어느 날 9시경 내가 경영하는 스타꽃집에 괴한 최모씨가 들어왔습니다. 살인 청부업자인 최모씨는 가게 문을 걸게 만든 후 총을 들이 대며 죽인다고 말하고 지하실로 끌고 내려가서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고 했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차라리 나를 먼저 죽이고 딸을 데려 가라”고 최씨에게 애원하며 호소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러니까 엄마의 호소에 최씨는 우리 모녀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고 엄마의 모습에 감동되어 저의 목숨을 구해 주었습니다. 그 후 그 청부업자는 또 다시 박지원부인으로부터 2천달러의 돈을 받고 부탁을 받고 저를 또 다시 처치해야 되는 처지가 되어 저의 가게로 왔으나 그때도 제 약한 처지를 잘 알고 동정을 하게 되어서 오히려 우리 모녀를 보호 하는 입장으로 바뀌었지만 저는 늘 불안 속에서 공포에 질려서 박지원씨의 노예 마냥 끌려가며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85년 말 한국에서 영화 출연교섭이 와서 저는 그와 헤어질 수 있는 기회라고 한국에 나와 삼촌 집에 거처하고 그 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박지원은 자신이 꿈꾸던 정치의 길이 보이자 나를 과감히 버리고 그 길을 택하려고 저가 급히 하던 모든 작품을 중단시키고 미국으로 들어가서 뉴욕서 멀리 떨어진 서부 쪽으로 이사를 보냈습니다. 저를 설득해서 아무런 위자료 없이 헤어지지 않은 것처럼 위장해 저를 동부 쪽에서 서부로 쫓아냈습니다. 못난 저는 매일 매일 찾아 줄 것을 기다리며 차 사고를 내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그를 기다렸지만 매정하게 버림을 받고 저는 세월이 흘러 88년경에 N.Y.에 다시 가서 카페를 경영했는데 그가 다시 찾아왔습니다.

(중략)
최정민과 관련한 이야기는 이것이 끝이 아니다. 이후 최 씨가 한국으로 돌아오자 박 후보자가 다시 그를 회유한다고 찾아가 오히려 몹쓸 짓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뒤에 흘러 나왔다. 이런 내용이 담긴 진정서가 당시 본지를 비롯한 여러 언론에 실리면서 큰 화제를 모았으나, 본국 정가에서는 이를 정적에 의한 루머라는 식으로 치부해버리고 사건은 그렇게 흐지부지 마무리됐다. 하지만 LA와 뉴욕 한인사회 인사들은 이것이 단순히 루머로 치부해버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최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미투와 관련된 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지금의 시대에서 이런 일이 불거진다면 박 후보자는 당장 정계를 떠나 수사를 받아야 처지가 될 수 있다. 그런 그가 오히려 국정원장에 임명된다는 것은 수많은 ‘미투’ 피해자들을 정부가 국민을 우롱하는 짓이나 다름없다.

2. 불투명한 재산 증식과 검은 돈 이야기들

김대중 전 대통령 비자금 의혹이 여전히 가시지 않은 가운데 박지원 후보자 역시 그와 관련한 검은 돈 얘기가 여전히 유령처럼 떠돌고 있다. 특히 그가 김대중 정부 실세로 지내면서 엮인 여러 무기중개상 및 사업가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받았다는 의혹은 제법 설득력이 있다.

김대중 정부 시절 급성장한 대표적 사업체가 바로 D일렉컴 L모회장이다. 박지원과 L 회장은 뉴욕 시절부터 알고 지낸 30년 지기로 이 회장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의 실세들 잘 알고 지내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박지원의 후광을 업고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카멜레온’ 같은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동아일렉콤은 김대중 정권 시절 공기업이었던 KT 사업을 독점하다시피 하며 급성장했다. 그는 97년부터 2000년도까지 L 회장은 한국 통신학회 부회장직을 역임했었고 2001년도에는 906억 1300만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염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바탕에는 당시 KT라는 공기업 전체를 움직일 수 있었던 박지원 위원장이 뒤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두 사람과의 친분을 알고 있는 주변인들은 이 회장을 박지원의 재산 관리인으로 여기기도 했다.

실제로 이 회장이 LA 최고급 지역인 베버리힐 인근의 인근 벨 에어(Bel Air) 지역에 20년전 1,000만 달러에 달하는 대저택을 신축, 자금 출처여부를 놓고 의혹이 일고 일었던 바 있다. 당시 타운에서는 이 회장이 과거서부터 그 근방에 거주하고 있었던 저택을 이미 소유하고 있었던 터라 ‘굳이 새로운 저택을 마련할 이유가 없었다’라는 시각에서 신축 저택이 박지원 위원장의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L 회장은 최근까지도 박 후보자의 고액후원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국회의원 박지원 고액후원자 명단’(2008∼2020년)에 따르면 박 후보자는 11차례에 걸쳐 후원금 5500만 원을 L 동아일렉콤 회장에게서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박 후보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대북송금 사건에도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다. 노무현 정부 초반 대북송금 특검에서 무기중개상 김영완 씨가 세탁했던 150억원의 출처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으나 박 후보자가 횡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당시 수사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당시 김 씨가 해외로 도피하는 바람에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전직 국정원 직원 김기삼 씨 역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 후보자에 대해 “박지원 씨는 뭐 개인적으로는 관심도 없고 이해관계도 없지만, 김대중 씨의 최측근으로서 대북송금 등 수많은 부정의혹에 개입했다고 본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런 그가 다른 기관도 아니고 국가정보원장에 임명된다는 것은 과거 그의 수많은 불법행위에 대해 면죄부는 주는 것을 물론이고, 국정원에 있는 수많은 자신과 관련한 정보들을 아무런 제약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좌익 가족사에 유포 방치하는 까닭은?

박지원 후보자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후계자로 급부상하자 그를 둘러싼 가족사 문제는 지금까지 인터넷등에 그대로 유포되고 있다. 그 내용이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박지원 후보자는 이 문제에 대해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을 하지 않고 있어 의혹을 가중시키고 있다.

인터넷 상에 실려 있는 박 후보자의 가족사 내용을 이렇다.
“박지원 의원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 그리고 고모.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해방 서울 소공동 근태빌딩에는 일제 때 돈을 인쇄하던 정판사란인쇄소가 있었다. 왜놈 기술자 “쫑”으로 있던 박지원 조부 박낙종은 해방이 되자 왜놈 사장이 버리고 간 인쇄소 정판사를 꿰차고 사장이 된다. 그는 공산당 열성신도였다. 해방 두 달 뒤, 10월 15일, 정판사 사무실에는 공산당 제정부장 이관술, 박락종 사장이 위조지폐 인쇄를 모의, 박헌영과 김상룡에게 보고했다. 박헌영은 무릎을 쳤다. “그래, 돈만 찍어 낼 수 있다면 이 나라를 먹는 건 식은 죽 먹기다.”

10월 22일, 이들은 네 차례에 걸쳐 1,500만원을 찍어 냈다. 모두 1억원을 찍어낼 심산 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꼬리가 잡혔다. 작업에 동참했던 빨이 지폐 인쇄판을 팔려다 서울 중부경찰서 형사대가 이재원 등 7명을 체포한다. 보고를 받은 박헌영은 잔대가리를 굴렸다.

5월 17일, 구속된 정판사 직원 14명은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공산당은 성명을 발표한다. 경찰들이 증거를 찾기 위해 골몰하고 있는 중 이었다. 잡혀있는 김낙기 부인이 면회를 할 때 부인은 남편에게 담배를 건네는 것이 발각됐고, 담배 속에는 “김동무, 사흘만 버티면 30만원을 지불 하겠소” 라는 쪽지가 발견되면서 수사반은 확신을 갖게 된다.

같은 시간, 서울 장안빌딩 공산당 아지트에서는 김상룡이 박헌영에게 “김낙기 처가 사식을 넣을 때 지령을 전달했습니다. 이제 경찰 놈들이 억지를 쓴다고 선전만 쎄게 하면…” 박헌영은 가슴을 쓸어 내렸다. 경찰계장이 집적 용의자들을 조사하고 있었다. 드디어 용의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1,500만원을 찍어 해방일보 사장과 공산당 재무부장이 전부 가져 같습니다.”

그들의 자백에 의하여 5월 7일 가담자 16명 중 간부 3명을 제외한 14명을 체포된다.
30여 회의 공판에서 공산당은 사건을 담당한 판사, 검사를 협박하고 공판정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10여 명의 좌익 변호사들 재판 기피로 폐정까지 연출된다.

1946년 5월 14일, 수도 청장 장택상은 기자 회견을 갖고 “이번 위조지폐 사건은 공산당이 한국 경제를 교란시키고 조직 확대를 위해 벌인 천인 공로할 사건입니다.” 장택상의 기자회견은 석간신문에 대서 특필됐고 국민들은 경악 했다. 신문을 읽은 국민들은 한마디씩 했다: “민족, 진보, 수구, 껄텅 거리던 OOO 들이 드디어 일을 저지르는구먼, 속 빨간 놈들…”
박헌영은 혜화동 아지트에서 석간신문을 모조리 읽었다. 그 옆의 김 삼룡과 이주희도 침통한 얼굴로 장택상을 가만 두지 않겠다고 투덜거린다. “투쟁, 투쟁 하시요 전국에 투쟁 지령을 내리시오” 박헌영이 눈에 불을 켜며 고함을 쳤다. 전국 주요 도시에 벽보가 붙기 시작 한다.

[인민이여 위폐사건은 날조다, 장택상을 타도하자!] 부천 변두리 북덕방 늙은 푼수머슴 허돌이는 “맞아 장택상이 꾸민 일이이야!” 맞장구를 쳤다. 20여개 신문들은 증거가 없는 위폐사건을 장택상이 공산당을 잡기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쓰기 시작 했다.
(중략)

이른바 정판사 사건은 1945년 10월 20일부터 6회에 걸쳐 사장 박낙종 등 조선 공산당 7명이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하여 당의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경제를 교란시킬 목적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한 사건이다.
11월 28일, 선고공판에서 박지원의 조부 박낙종과 이관술, 송언필, 김창선 등 주범에게는 무기징역, 나머지는 10-15년 형이 선고된다. 6.25가 터지고 이들은 일제히 사형에 처해진다. 박지원 조부 박낙종은 목포 교도소에서 사형으로 처형되었다.

박지원 아버지와 큰 아버지도 경찰에 사살 당했다. 박지원 부친 박종식(1910년생)은 1940년 부터 해방 될 때 까지 45년 까지 고향 진도에서 일본인 하수인으로 목화 수매 책임자로 일했다. 박지원 아버지 박종식은 재갈 윤 김대중 전 대통령과 목포상고 동문이다. 해방 후 박종식 박지원 아버지는 남로당 진도 책임자가 되고 삼촌 박종국은 고군면 인민위원회 부 위원장이 된다. 박종식, 박종국은 1948년 10월 23일 경찰에 수배되고, 그들은 지방 유격대장으로 한국 경찰을 무수히 죽인다.

그들의 은신처 지리산 피아골이 국군에 함락 당하자 신안으로 피신하다 진도 경찰서 김기일, 곽순배 형사와 총격전 끝에 마지막까지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다 사살 된다. (1976년 2월 25일 진도군이 발행한 군지(郡誌)에 기록과 곽순배 형사의 친척 곽우불 진도 번영회 회장 증언)

그런데도 박종식은 김대중 (대통령) 에게 건국포장을 받는다 (포상증 제1552호). 박지원 삼촌, 고모는 괴뢰군 앞잡이로 면민을 북괴군에 징용 시키다 9.28 수복 후 주민들에게 붙잡혀 돌과 미제 도끼자루로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는다. (진도군 무공 수훈자 회장 최기남씨 증언)

그러나 극우 보수 수장으로 잘 알려진 지만원씨는 이런 주장에 대해 사실이 아니라고 반박해 세인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지만원씨는 2012년 ‘박지원의 가족사에 대한 오해를 풀자. 박낙종은 박지원의 조부가 아니다’라며 박지원이 할 말을 대신하는 글을 올려 박지원의 좌익 가족사 논란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계속해서 지만원씨는 박지원은 억울한 오해를 받고 있으며 인터넷상에 나돌고 있는 기록들도 게시물들과 전혀 다르다라며 박낙종은 박지원의 조부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면서도 8년 동안 아무런 해명도 없이 ‘무언의 수긍’을 하고 있는 박지원에도 책임의 일부가 있다는 주장도 했다. 이런 가족사를 둘러싼 의혹들이 이번 청문회에 철저하게 가려질지 의문이다.

4. 이외의 병역 학력 의혹들

앞의 의혹들에 비하면 현재 야당이 벼르고 있는 의혹은 그야말로 조족지혈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현재 야당은 박 후보자의 군복무 의혹을 가장 큰 쟁점으로 삼고 있다. 박 후보자는 지난 1965년 4월15일 입대해 1967년 9월23일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전역했고 군복무 기간 중인 1965년 9월1일부터 1967년 2월28일까지 단국대에 편입해 졸업했다. 국회 정보위 소속 하태경 의원은 최근 당 국정원장 후보 청문자문단 회의에서 “당시 광주-김포 비행 편은 일주일에 2편이었고, 기차로는 10시간이 걸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당시 교통편으로는 광주와 서울을 왕래하며 통학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설명이다.

하 의원은 또 “대학이 허위 경력일 가능성이 큰데, 이 경우 선거법 위반이다. 조금 더 면밀히 팔 것”이라며 “과거에 잘못이 있을 수 있지만 뉘우치고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짓을 끼고 인생을 허위 경력으로 만든 것으로 확인이 된다면 국정원장을 맡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의혹에 박 후보자는 “광주교육대를 졸업한 후 군 복무 중에 부대장이 ‘공부하라’고 배려해줘 단국대 3학년에 편입해 야간에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며 “3학기 만에 학점을 모두 채워 졸업했다”고 해명했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