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5‧18 푸른 눈의 증인’ 저자 폴 코트라이트 교수 단독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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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바다 광주’ 그 때 그 현장의 절규… 그 참혹한 모습을 일기장에 담아

“미국은 5‧18 재조사하고

잘못된 점 사과해야”

2020년 5월은 ‘5‧18 광주’의 40주년이 되는 달이다. 40년전 당시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26세의 청년, 미평화봉사단원인 폴 코트라이트(Paul Courtright)는 광주 인근 마을 호혜원에서 나환자들을 돕는 ‘푸른 눈의 청년’이었다. 그날 그때 일상처럼 의례적인 나환자들의 건강검진을 돕기위해 광주를 들렀는데 그때가 ‘5‧18’ 이었다. 그는 미국정부로부터 ‘광주에서 떠나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때 그 현장에서 학생 시민들과 함께 ‘피바다 광주’의 소리와 절규… 그 모습을 일기장에 적었다. 나중 외신기자들이 광주에 오자 통역을 해주며, ‘5‧18의 소리’가 전세계에 전해지도록 했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66세의 반백의 공중 보건학 박사로 은퇴한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아직도 그날의 행위에 사과를

▲ 폴 코트라이트 교수가 회고록을 보여주고 있다.

▲ 폴 코트라이트 교수가 회고록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 않고, 또한 그때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자들에게 꼭 이 이야기 를 전하고 싶어 회고록을 펴냈다”고 말했다. 그가 5‧18 민주항쟁 40주년을 앞두고 지난 5월초에 펴낸 ‘5‧18 푸른 눈의 증인’(Witnessing Gwangju, 한림출판사 2020)은 외국인 쓴 최초의 5‧18 광주 민주화 항쟁 증언록이다. 선데이저널 취재기자는 ‘푸른 눈의 증인’의 40년전 그날의 생생한 이야기를 직접 들어 보았다. <성진 취재부 기자>

현재 샌디에고 인근에 거주하고 있는 폴 코트라이트(66) 교수는 40년 동안 고이 간직했던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보여주면서 “이번에 회고록을 처음 펴내게 된 것은 우선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이 1980년 5월 광주 봉기에 대하여 확실하게 알게하기 위해서입니다”면서 “이제는 미국 정부도 대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을 썼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5‧18 광주”는 한국의 역사 뿐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도 중요했으며, 미국 정부가 당시 한국 정책을 두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 미국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의 회고록을 펼치면 이런 글이 나온다. <1980년 5월 중순, 나는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근무한지 2년이 되고 있었다. ‘지금 우리에겐 목소리가 없어. 우리의 목소리가 되어 바깥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주게.’ 할머니는 두려움이 없는 눈으로 나를 뚫어질 듯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나는 여기에 ‘목격하기 위해’ 있었다. 그 할머니가 내게 분명한 임무를 준 것이다.>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원래 평화봉사단원(Peace Corps Volunteer)은 봉사를 펴는 나라에서 정치적 행위에 개입이나 참여를 금지하는 지침이 내려져 있었다.

1979년 4월 한국에 파견된 제45기 미국 평화봉사단 20명 단원들은 광주와 전남 나주, 경기 안양 등 전국 곳곳의 병원과 보건소에서 결핵이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일했다. 그 당시 폴 코트라이트는 전남 나주 호혜원에서 한센 환자를 돌보는 봉사자였다. 그는 팔을 벌리면 방안 양쪽벽에 닫는 좁은 방에서 지내면서도 이를 불평없이, 달걀과 감자로 요리를 하면서 음악을 듣던 평범한 26세 청년이었다. 1980년 5월 어느날, 그는 일상처럼 한센병 환자를 데리고 의례적인 건강검진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광주 5‧18민주항쟁과 마주하게 된다. 이윽고 미국정부는 당시 현지의 평화봉사 단원 20여명에게 미국 시민의 안전을 위해 ‘즉시 광주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폴 코트라이트와 동료 데이빗 돌린저(David Dolinger), 도널드 베이커(Donald Baker), 윌리엄 에이모스(William Amos). 팀 원버그(Tim Warnberg) 등은 미국정부의 명령을 따르지 않기로 했다. “우리 모두는 광주가 우리의 마을이고, 마을 사람들이 우리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라고 말한 폴 코트라이트는 “계엄군의 조치로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된 광주에서 우리라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40년 전을 회고했다. 폴 코트라이트는 당시 광주에 특파된 타임(TIME)지 사진 기자인 로빈 모이어의 통역을 맡아 전남 도청, 전남대병원 임시 영안실 등을 다녔다. 데이빗 돌린저는 AP통신 기자 테리 앤더슨의 입과 귀가됐다. 팀 원버그는 영화 ‘택시 운전사’에서 알려진 독일 제1공영 방송 위르겐 힌츠페터의 통역을 맡았다.

폴 코트라이트는 “통역은 외신 기자와 시민들의 의사소통을 돕는 것이라고 우리 단원들은 생각 했습니다”라고 밝히면서, 당시 5월 24일, 전남도청에 마련된 임시 영안실을 TIME 사진기자와 함께 보았던 당시를 설명했다. 피투성이의 시신들은 대부분 청년들이었다. 로빈 모이어 사진 기자는 폴 코트라이트의 통역을 통해 “이분은 어떻게 사망했나”라고 물었다. 한 의대생은 “군인들이 헬기에서 쏜 총에 맞아 죽었다”

▲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올해 4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 1980년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올해 4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면서 “당신들이 여기를 처음 방문한 외국인 기자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반드시 세계에 알려달라”고 말했다. 폴 코트라이트는 나중 목숨을 걸고 언덕 산을 넘고 넘어 “5월 광주”의 참상을 알리러 서울 미 대사관으로 향했다. 미국 정부의 ‘철수명령’에 불복종 하면서 전두환 군부의 압살정책에 굴하지 않고 광주에 남아 외신기자들에게 광주 학생과 시민들의 입이 되었던 미평화봉사단원들의 죽음을 무릎 쓴 용기로 오늘 날 5‧18 광주의 역사가 재조명되고 있다. 당시 한국의 군부 정권은 이같은 미평화봉사단의 행동을 ‘괘씸죄”로 몰아 1981년 한국에서의 평화봉사단을 철수시키게 된다. 원래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지난 5월 18일 광주에서 개최 예정인 ‘5‧18 민주항쟁 40주년 기념 행사’ 참석차 한국 방문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예기치 않은 코로나 19 사태로 한국 방문을 오는 10월로 연기했다. 본보 기자는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기 전 ‘지난 5월 광주에서 하려던 회고록 출판기념회가 10월로 연기되었으니, 차라리 이번 코로나 19 “봉쇄령”이 해제되면 LA 코리아타운에서 ‘출판 기념회’를 먼저 개최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제안에 “대단히 좋은 제안입니다”라면서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그는 “지난날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LA 코리아타운에서 출판 기념회를 갖게되어 기대가 큽니다”면서 하루 빨리 코로나 19가 사라지기를 바래고 있다. LA 코리아타운에서 미주지역 1차 출판기념회를 마치면 북가주 샌프란시스코와 샌호세 그리고 시애틀과 캐나다 밴쿠버 그리고 동부 뉴욕과 뉴저지 등에서 차례로 출판기념회를 이어가기로 했다. 한편 폴 코트라이트 교수는 자신이 5‧18 광주에서 밤잠을 안자며 빼곡히 써내려려간 40년 전 일기장식의 노트북 사본 등을 포함 5‧18광주에 관련된 자료 일체를 최근 USC한국전통도서관(관장 조이 김)에 기증했다. 다음은 폴 코트라이트 교수와 지난 5월 21일부터 27일까지 이메일로 교신한 인터뷰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1) 우선 ‘5‧18 푸른 눈의 증인’이라는 한국에서 외국인으로서 최초로 광주민주화운동의 증언을 담은 회고록이 출간됨을 축하합니다.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이 책이 교수님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저술하는 동안 행복했던 점이나 고통스러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폴 코트라이트: 저는 미국인들이 1980년 5월 광주 봉기에 대하여 알아야 하며, 이제 미국 정부도 대답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사건은 한국 역사뿐 아니라 미국을 위해서도 중요했으며, 미국 정부가 당

▲  5‧18 당시 독일 기자단에게 통역하는 폴 코트 라이트(오른쪽 두번째)

▲ 5‧18 당시 독일 기자단에게 통역하는 폴 코트 라이트(오른쪽 두번째)

시 한국 정책을 두고 잘못한 일에 대해서 미국인들이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1982년 말에 저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대학원 과정을 시작했고, 사회 활동도 했으며, 결혼과 함께 자녀를 돌봐야 하는 의무 등등으로 글 쓰기에 전념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해외에 나가서 아프리카에서 20여년을 활동 후 2016년에야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습니다.(지난 16년 동안 킬리만자로 지역사회 안과 센터 설립 및 운영 www.kcco.net). 저는 마침내 5‧18 광주에 대한 회고록 글을 쓸 시간을 마련했습니다. 40년 전 광주에서 제가 써내려 갔던 오래된 노트를 다시 꺼내 읽으며 글을 써 나갔습니다. 글을 쓰는 과정은 즐겁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매우 힘들었습니다. 이 책에는 그날의 5월 광주와 그곳에서 생활했던 좋은 추억을 되살리는 이야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기억들이 있습니다. 저의 오래된 노트에 쓰여진 글에서 40년 전 일어났던 그때를 다시금 저의 기억속에서 되살리게 했으며 제 마음속에 40년 동안 깊게 박혀진 장면들을 부활시켜 다시금 써내려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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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기 발포 총탄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반드시 세계에 참상 알려달라’ 절규

2) 5월 광주에서의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폴 코트라이트: 5월 광주에서의 가장 인상에 남는 기억들은 하나 뿐이 아니고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저의 책에서 언급했지만 광주 버스 정류장에서 한 청년이 군인으로부터 구타당하는 모습, 남평 경찰서에서의 무기고 파괴, 서울 미대사관에 진상을 알리려 광주를 빠저 나가려는데 군인과 탱크들에 의해 저지 당하는 순간, 전북 도청 광장에서의 시위 장면, 시체들이 싸여 있는 임시 영안실에서 TIME지 기자에게 통역하던 때, 서울 미대사관에 진상을 알리기 위해 광주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언덕들을 넘어가던 순간 등등이 아마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일 것입니다. 그래서 기억에 남을 만한 순간들이 각각 나름대로의 의미로 남겨졌습니다.
3) 광주 봉기가 시작되면서 미국 정부에서는 평화봉사단원들에게 철수를 명령했는데, 동료 3명과 함께 이를 거부하고 현장에 남았습니다.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폴 코트라이트: 우리가 광주를 떠나라는 미국 대사관의 명령을 거절한데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철수 명령을 거부했던 4명 봉사단원들이 함께 결정한 것입니다. 첫째, 우리가 광주를 떠나면 우리가 봉사했던 마을 사람들에게 잘못된 메시지를 보낼지도 모른다고 느꼈습니다. 광주 시민들이 참상을 알릴 유일한 외부인인 우리가 그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웠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버리고 떠났던 것으로 여길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외신 기자들이 광주에 나타날 때까지, 우리는 광주에서 다른 외국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광주가 우리의 마을이고, 마을 사람들이 우리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그들을 버릴 수 없었습니다. 둘째, 저는 원래 미 대사관으로부터 철수하라는 메시지를 받은 날, 그날 아침 일찍 광주에서 빠져 나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목적은 당시 전두환 군부에 압력을 받은 TV 방송들의 잘못된 상항 보도를 하고 있었기에, 미대사관에 광주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려주기위해 서울로 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군인들과 탱크가 광주에서 나주로 향하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당시 제 경험상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 군사경계선을 넘어가는 것이 광주에 있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광주에 있는 것이 광주를 떠나는 것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4) 광주 5월에서의 기록을 당시 현장에서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어디에서 글을 쓰셨나요?
폴 코트라이트: ‘5‧18’ 동안 저는 학생과 시민들과 함께 현장에서 지내면서 보았던 것 들은 이야기 무엇이든지 노트에 썼습니다.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밤에 잠을 잘 수가 없기 때문에, 당시 그냥 지나치는 일 부터, 큰 일들, 모든 일들을 써내려 갔습니다. 매일 매일, 매순간 일어나는 사건의 이미지들이 머리속에서 뛰쳐 나오는 바람에 잠을 설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미지들을 그려 보면서 글을 노트에 써나갈 수 있었습니다. 저는 1982년 말에 한국을 떠났고 6년 후인 1988년에 결혼을 하고 아내와 함께 아프리카 대륙에서 새로운 일에 몰두해야 했기에 광주에서의 일기장 식의 그 많은 원고는 깊숙히 보관해 두었던 것입니다. 20년동안 지낸 아프리카에서 2017년에 미국으로 오면서 5‧18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오래된 사명감이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는 2019년 5월 광주를 포함해 남평, 호혜원 등을 방문하기 전 이미 많은 분량의 글을 썼습니다. 지난해 광주 등 현장을 다시가 보고는 그때의 모습, 그때 시민들의 소리 그리고 그때의 피비린내 났던 냄새에 대한 기억이 똑똑하게 되살아 나옴을 다시금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5) 광주 5‧18 당시 이후 한국의 군부로부터 어떤 형태로든 압력을 받은적이 있습니까?
폴 코트라이트: 1980년 5‧18부터 1982년 한국을 떠나기전까지 저는 광주에서의 경험이나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밝히게 될 경우 전두환 군부정권에 의해 추방의 조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전두환 군부정권은 1980년 중반에, 사건 당시 광주에 남았던 평화봉사단원 4명을 추방시키려고 했으나, 우리의 평화봉사단 짐 메이어(Jim Mayer)단장이 우리를 보호해 주었기에 봉사 임무를 계속할 수 있었고, 계속 광주나 기타 봉사 지역에서 체류할 수 있었습니다. 5‧18 이후 몇 달 동안 저는 봉사 중에 마을 지도자에게 ‘내가 언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내가 누가 누구를 만났는지,’ 등등을 그때 그때 알려주었는데, 왜냐면 마을 지도자들은 우리들의 동태를 당국에 보고하지 않으면 혼이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당시 저는 제가 속한 주의 연방상원 의원(US Sen. Frank Church and US Sen. Steve Symms)들에게 미국 정부가 “광주 학살” 사건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았다고 건의했는데, 답변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는 제게 맡겨진 봉사 업무에 최선을 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6) 5‧18 당시 서울의 미국대사관에 가서 광주의 진상을 보고하려 했으나, “문전박대”를 당했다는데,
폴 코트라이트: 당시 광주에서 서울에 올라온 저를 평화봉사단 짐 메이어 단장은 저를 데리고 미대사관으로 들어가 대리대사 사무실(Charge d’Affairs office)에다 연락을 했습니다. 그때 저는 광주에서 일어났던 상황에 대하여 제가 보고 느낀 점을 사실대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일단 메이어 단장과 저는 대리대사 사무실 옆에있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는데, 2시간 반 이상을 있었는데 대리대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저의 이야기를 듣기를 원치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 단장과 저는 대사관을 나와 버렸습니다. 한편 메이어 단장은 저의 광주 사항 보고서 내용을 다른 평화봉사 단원들에게 전달하도록 조치했는데, 나중에 그 평화봉사 단원들은 미대사관에서 회합을 갖게 되었지만, 그 당시 저는 대만에 체류 중이었기에 그 대사관 회합에 참석하지 못해 직접적으로 저의 체험을 설명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제가 처음 대사관을 방문할 당시 왜 “문전박대”를 당했는지 정확한 사유는 모르지만, 나중에 알려진 사항에 따르면 당시 대리대사는 우리의 평화봉사단 활동에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우리 평화봉사 단원들이 평화봉사단에서 퇴출이 되어야 하고, 한국에서도 떠나야 한다는 언급을 일찍이 했다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7) 그 당시 미국정부의 한국 정책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폴 코트라이트: 솔직히 5‧18 전까지 저는 한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정책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5‧18로 저의 생각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당시 제가 느낀바로는 미국정부가 주한 미군의 영향을 받아 전두환 군부에게 도전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인권을 존중한다는 당시 지미 카터 행정부가 그같은 결정을 내린 것에 저는 심한 충격과 함께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저는 카터 대통령이 평소 인권을 존중해 왔다는 점을 믿어왔기에, 그가 진정 광주에서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진상을 정확하게 파악했는지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통령의 주위 사람들이 5‧18에 대한 사실 정보를 왜곡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같은 결정은 카터 대통령의 인권 정책보다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시각을 반영했을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결국 저는 (당시 미국정부 정책)에 좌절했으며 분노감이 치밀었습니다.

8) 광주 5‧18 발생 후 40년이 지났습니다. 당신은 미국정부가 5‧18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미국정부에 대하여 건의할 사항이 있습니까?
폴 코트라이트: 저는 현재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5‧18에 대하여 입장을 밝힐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의 미국정부에게 입장을 밝히라고 하지도 않을 생각입니다. 하지만 2021년 1월에 새로운 미국의 행정부가 출범을 하게되면 (저는 오는 11월 대선에서 트럼프 재선이 실패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5‧18에 대한 미국정부의 재평가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5‧18의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한 점을, 미국정부도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 5‧18 당시 서울의 미국 대사관과 워싱턴 DC의 미국무부 간의 외교 비밀 전문들이 비밀해제되어 몇년 전보다 더 많은 문서가 공개되고 있습니다. 저는 내년에 새로 출범할 미국 행정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강력하게 건의하고자 합니다. 5‧18에 대한 당시 미국정부의 대처 기록들을 재조사 검토하여 진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여, 당시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 진정한 사과와 함께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
9) 그동안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5‧18 당시 당신과 동료 평화봉사단들의 노력으로 나중 미국 정부가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점에 대하여,
폴 코트라이트: 저는 5‧18 이후 4-6 주 지나면서 서울의 미국대사관 (미국정부 포함)이 전두환 군부에게 속임수를 당하고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대사관 측의 관점이 변화됐다는 것에 제 자신의 영향이라기보다는 우리 평화봉사단의 5‧18 보고서, 광주의 선교사들의 보고서 그리고 외신들의 보도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당시 미국이 전두환과 그의 정부에 대한 견해가 본질적으로 변화됐다고 볼 수 있을가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당시 한국의 군부는 북한의 위협을 구실로 군부 중심의 틀을 이어 나가려고 했습니다. 아마도 이같은 분위기에 미국 정부도 한국이 그저 조용히 아무런 문제가 없기만 바라고, 경제적으로는 호황을 누리도록 “문제 발생이 없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10) 올해 한국에서 5.18 광주민주화 운동 40주년 행사에 코로나 19 때문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음을 유감으로 여깁니다. 만약 참석했다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읍니까?
폴 코트라이트: 저는 두가지 이유로 한국을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첫째, 5.18 민주화운동 4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광주를 가보고 싶었습니다. 저는 5.18 기념재단으로부터 이미 패널 참석 등으로 초청을 받은바 있습니다. 사실 저의 이야기는 제가 경험했던 훨씬 더 큰 이야기의 한 작은 조각 일 뿐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40년 전 우리의 평화봉사단원들이 그 5‧18의 증인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싶은 기회가 되기를 원해 한국을 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특히 당시 광주의 사람들이 우리 봉사 단원들을 아주 인간적으로 대해 주는 바람에 우리는 더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번째로 이번에 한국어로 출간된 저의 회고록을 위한 출판 기념회 참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에 가는 것을 항상 좋아합니다. 거기에서 옛 친구들을 만나고, 함께 어울려 즐기고,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전라도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40년전에 저의 심장과 영혼을 사로잡았던 그때의 역사가 새로운 활력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11) 광주 5‧18 당시 함께 활동했던 평화봉사단 단원들, 팀 원버그, 데이빗 돌린저, 빌 아모스, 도널드 베이커 등과도 계속 교류를 하고 지내고 있나요?
폴 코트라이트: 불행이도 팀 원버그씨는 1900년대 사망했는데, 그와 마지막으로 교류한 것은 그가 “광주 봉기: 내면상”이란 기사를 쓰기 전 저에게 제 일기장 기록을 참고로 삼겠다고 하여 보내준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데이빗 돌린저, 빌 아모스 도널드 베이커와는 가끔 연락을 한 적이 있습니다. 데이빗 돌린저와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 연락을 주고 받습니다. 빌 아모스와는 18개월 전에 만났는데, 현재 아이다호주 보이스에 거주하고 있는데, 저의 출생지이기에 고행 방문때 만났습니다. 돈 베이커와는 1년전에 캐나다 밴쿠버에서 제가 관련된 비영리단체 이사회 참석차 방문했을 때 만났습니다. 그리고 쥬디 챔벌린과는 만난지가 벌써 20년이 넘습니다. 최근 그녀가 어디 살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했는데 아직 찾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12) 최근 미국무부가 한국정부에 제공한 5‧18 관련 비밀해제 문건을 보셨는지요? 만약 보셨다면 어떤 느낌을 받았습니까?
폴 코트라이트: 당시 미국대사관과 국무부간 전문 관련 문서들을 지난해에 알게 되었고, 저의 최근 회고록에 우리에게 관련된 부분들을 부록에 삽입했습니다. 제가 직접 읽어 본 자료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많은 변화를 보였습니다. 제 말은 5‧18 당시 서울 미대사관에서 국무부로 보낸 처음 전문들은 그 당시 일어난 일에 전두환 군부의 관점이 많이 반영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5‧18이 끝난 후에는 여러모로 변화를 보였습니다. 나중 미대사관은 전두환의 주장이 거짓임을 인식했습니다. 그당시 미국정부나 미대사관이 잘못 대응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미국정부는 전두환 군부에게 더 강력하게 대처하여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했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미국의 현 정부에서는 기대하기 힘들며 새행정부가 들어서면 기대해 보려고 합니다. 이같은 기록들을 보면서 당시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민주화 소리에 공감하고 그 정신을 기리고 존경하는 것을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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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코트라이트 박사 프로필
폴 코트라이트 박사는 미국에서 대학 졸업후 미국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파견되어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전남 나주의 나환자촌 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이후 열대성 질환과 안과 질환을 전공하고 공중보건 분야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20년간 이집트, 에티오피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탄자니아에서 근무했으며, 탄자니아 모시 지역에 아내 수잔 박사와 함께 킬리만자로 안과 센터를 설립해 운영하였다. 그는 250개가 넘는 의학 논문을 게재하였으며 미국안과학회를 비롯해 실명 예방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이룬 사람에게 수여하는 다수의 상을 받았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대학 의대 겸임 교수이자 영국의 실명예방전문 NGO인 사이트 세이버(SightSavers)의 트라코마 예방 사업의 고문을 맡고 있으며 현재는 아내와 함께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살고 있다. 한국과는 1981년부터 깊은 관계를 이어 오고 있으며 여러 한국 연구자들과 공동연구를 진행한 바 있다. 2014년에는 국제보건 및 국제개발협력 전공자들을 대상으로 연세대학교에서 ‘현장 연구와 역학’ 단기 코스를 진행하였고, 그 외에도 수 차례의 특강 등을 통해 한국의 후학 양성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최근 아프리카에서의 트라코마 퇴치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여왕의 초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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