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과 시를 읽으면서
내 인생의 풍요함을 얻었다”
“위안부 망언” 논문을 발표해 전세계적으로 파장을 불러온 하버드법대 램지어 교수의 논문의 허구성을 낱낱이 지적해 끝내 사과를 받아낸 한국인 석지영 박사(47, Jeannie Suk Gersen)는 불혹의 나이도 되기 전에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최초로 하버드 법대 종신교수로 임명 된 인물이다. 그녀에게 사람들은 ‘천재’ 혹은 ‘지성의 전당의 신델레라”라는 호칭을 부르기를 좋아한다. 그녀는 2013 년에 자전적 에세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를 출간했는데 그 안에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솔직 하게 털어 놓았다. 당시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도 그녀의 인품이 고스란히 나타났는데 특히 미주에 살고 1.5세나 학부모들이 경청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룩한 코리안 아메리칸 2세의 경우가 그렇지만, 석 교수의 삶은 유난히 남다른 과정을 거쳐 왔다. 한 때는 발레리나를 꿈꾸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부모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해 후회하고 있다며 젊은이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가야 한다고 조언한다. 흔히 석 교수에 대하여 ‘세기의 수재’ ‘엄친딸 종결자’ ‘최고의 여성법학자’…. 또 아메리칸 발레학교, 줄리아드 예비학교, 예일대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고, 영국 옥스퍼드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후 법학까지 전공하고 하버드 법대 교수, 다시 종신 교수로 임명 된 것. 이 모두가 나이 마흔도 되기 이전에 이룩한 것 들이다. 한 사람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화려한 이력이다. 이 모든 수식어가 석지영 교수 한 사람을 가리킨다. 2013년 북하우스에서 펴낸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는 석지영 교수의 삶의 과정과 생각, 열정을 담고 있는 첫 에세이다. 석지영 교수가 한국 독자 들을 위해 처음으로 쓴 에세이집인 이 책에는, 인문학, 예술, 법 등 석지영을 만든 지식과 교양의 커리큘럼이 가득 담겨있다.
그녀가 세계적 명문인 하버드법대 종신교수가 되었을 때 당연히 한국인들의 선망을 한 몸에 받았 다. 한국을 수차례 방문하면서 받은 질문들 대부분이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요인>과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는가> 였다면서 그를 통해 한국인과 한국 사회, 그들의 가정에서 가지고 있는 가치관 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성공에 대한 비결이나 비법 은 없다는게 솔직한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지난 2013년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출판 기자회견장에서 어떤 기자가 석 교수에게 ‘당신의 풍요 로운 성장 배경에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했다. 석 교수는 그 질문에 “내 이야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의 이야기”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통적으로 남성과 백인 위주의 하버드대에서 아시아계 여성 최초이자 한인 최초로 종신 교수가 탄생했다는 것은 한국인에게 남다른 의미다. 한국인에게 하버드대가 갖는 위상을 감안 해보면 더욱 그렇다.
하버드 종신 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단순한 성공 지향이 아닌 학문과 인간의 삶에 대한 끊임 없는 애정과 관심 덕분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부모 따라 이민와 전혀 다른 세상과 직면했던 두려움, 부모의 선택에 의해 발레리나의 꿈을 접어야 했던 시련을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자서전을 펴면서 “자서전을 쓰기에는 이른 나이라고 생각했다”는 그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전 적 에세이를 발표 한 것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은 동기 때문이다. 성공의 진정한 목적을 알리고 사람 들이 가지고 있는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고 싶었다는 그녀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에세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는 그녀가 자신의 삶과 철학을 가감 없이 담은 설명서라고 할 수 있다.
“내 이야기는 한국이 아닌 미국의 삶 이야기”
그녀의 가족이 미국으로 이민한 것은 한국이 민주화가 되기 이전이었다. 서울대 의대 출신 아버지 와 이화여대 약대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6세 때 미국으로 이민 온 석 교수의 이야기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지만 엄혹했던 시대에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민 초기, 어린 그녀가 직면한 미국사회는 엄청난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부모가 적응한 방식과 그녀가 적응한 방식은 굉장히 달랐다. 이민생활에서 직면한 상황 자체가 달랐다. 언어장애와 문화적 충격은 다르지 않은 경험이지만, 같은 시기에 부모의 동료나 친구들이 많이 이민와 한인사회를 형성했기 때문에 한인들 간의 유대가 남달랐다. 그래서 부모 세대는 한인 친구, 지인들과 함께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한 요소로 작용했지만, 그녀의 경우는 모국 에서 오래 살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경험이나 추억이 없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민했기에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나는 누구인지, 뭘 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환경의 변화를 겪게 되는 경험은 그야말로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미국의 학교 시스템에 편입한다는 것 역시 힘겨운 경험이었고 익숙한 문화에 편안 함도 얻지 못했고, 어린 시절에 엄청난 변화를 감당해야 했다는 점이 부모 세대와 큰 차이점이었다. 그녀 자신은 인종차별이라기보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면서 소수 인종이 경험할 수 있었던 감정 적인 어려움은 다 겪었지만 심한 차별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그녀의 부모는 깨어있는 지식인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적인 관습에서 자유롭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아이가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고 의견을 피력하는 것’을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으로 간주하는 부모의 교육방식에 적잖은 저항감을 느꼈다.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 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 시절, 탈출구가 됐던 것은 다름 아닌 발레리나의 꿈이였다. 그러나 조심스레 키워온 첫 번째 꿈은 다시금 부모와의 의견차로 인해 좌절되고 만다. 지금도 그녀 생각은 부모가 자녀의 꿈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 세대와 그녀 세대가 생각하는 성공은 달랐다. 그녀가 생각하는 성공은 부모의 말을 따르자면 불가능한 것이었다. 보통 자녀들은 ‘부모가 모든 것을 안다. 부모가 옳다’고 믿어야 하는데, 이민자 가정의 상황은 좀 다르기도 했다. 자녀가 부모 보다 영어도 빨리 익히고 상황을 빨리 파악하기 때문 에 가끔은 그녀가 부모보다 더 많이 안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런 것이 어린 나이 에는 문화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부모세대와 자녀세대가 생각하는 성공은 다르다’
하버드대학 종신교수가 된 뒤 한국을 방문한 그녀에게 가장 익숙지 않은 지칭은 ‘엄친딸’이었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고 출중한 엄마 친구의 딸’이라는 의미다. 낯선 단어에 어리둥절했지만 그 의미를 알게 된 후 전혀 기쁘지 않았다는 그녀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모든 면’에서 출중한 것도 아닐 뿐 더러 누군가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비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그리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엄친딸’이란 지칭에 대해 난색을 표한 이유에 대해서 그녀는 “‘엄친딸’이라는 말이 사실 부모가 자녀를 비교를 하는데서 나온 말이라서 내 아이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강한 거부감을 느꼈다”면서 “제가 ‘엄친딸’이라고 불리는 것은 다른 분들의 딸들이 저와 비교되면 서 부모에 의해 저보다 못한 존재로 취급되는 건데 왜 부모가 자녀에게 그렇게 대하는 거죠? 사실 저 자신도 어머니에게 다른 친구 분의 딸과 비교를 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웃음) 그런 것이 상처 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더욱 좋아하지 않죠.”라고 채널예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석 교수는 두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로서 자녀 양육방식은 한순간에 결정하기보다는 발견의 과정을 거쳐 자리를 잡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녀의 경우 아이들을 키우기 전에는 그녀 어머니처럼 개입을 많이 하고 엄격하게 훈육을 하는 부모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막상 자녀를 키우다 보니 그녀가 그런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그런 차이는 한국과 미국의 양육방식 차이라기보다는 세대차인 것 같다는 것이다.
그녀 생각에 지금 현재 한국의 부모들 역시 그녀가 적용하고 있는 양육방식과 비슷한 선택을 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양육을 하는데 집중하는 것은 자녀와 보다 밀접하게 관계를 가지며 생각과 감정 을 교류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녀가 자랄 때 부모와 그는 상대적으로 그런 경험이 적었기 때문이다. 석 교수가 부모들에게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은, 부모들이 정말 생각해야 하는 건 ‘자녀 성공을 위한 최종 목표가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그녀가 성공을 통해 성취하고 싶은 것은 좀 더 자유로 워지는 것이었다. 일종의 자유의 확대를 통해 주변 사람에게 좀 더 베풀고,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 목표에 부모들이 동의한다면, 어떻게 해야 자녀들이 좀 더 폭넓은 자유를 누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그에 맞춰 자녀를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가 성인이 됐을 때 끝나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자녀들은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다. 부모의 방식은 과거의 방식이고 앞으로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젊은 세대라는 인식이 중요하다고 했다. 부모의 방식에 대해 답답해하고 고민하지 않기를 권고했다.
자녀들은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한다
그녀가 쓴 자서전적 에세이 ‘내가 보고 싶었던 세계’ 에는 이런 고백이 나온다. “삼십대가 될 때까지 나는 링컨센터의 공연을 눈물 없이 볼 수 있었던 적이 없었다. 무대 위의 몸짓 들이 내 안에서 순간 살아났지만, 영혼의 환상통에 불과한 운명을 깨닫고 이내 사그라졌다. 계속 있다가는 그 자리에서 무너질 것만 같아 나는 인터미션 때 극장을 떠나야 했다.” 그녀는 유년기 시절 가장 큰 상처로 남은 것은 발레리나의 꿈을 접은 것을 꼽았다. 그래서 그녀는 “만약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무용을 선택할 것”이라며 “도중에 막히는 것은 절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라고 단정했다. 적어도 스스로 ‘충분히 경험했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 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 지속했을 거라는 것이다. 지금도 부모가 자녀의 꿈을 막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다.
불과 6세 소녀로 미국땅에 온 그녀에게 처음에는 자신감도 확신도 없던 그에게 있었던 한 가지 큰 변화를 가져다준 것은 소설과 시였다고 여성동아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책읽기는 포근한 피난처가 돼주었어요. 책을 읽고 있으면 혼자가 아니라고 느껴졌죠. 그 마음을 눈치챈 어머니가 매일 방과 후 공공도서관에 데려가 저녁 식사 전까지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했죠. 이를 닦을 때도, 옷을 입을 때도, 저녁을 먹으면서도 마지못해 덮었던 소설책을 다시 펼치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정도였죠.” 그런데 그녀의 관심은 책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피아노 하나를 배워도 ‘대단한 연주 기술로 좌중을 압도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는 꼬마 숙녀를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꼬마 숙녀의 열망을 채워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났다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지만 ‘양손이 생명을 얻어 스스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을 만큼 엄청난 연습을 거듭한 것은 석 교수 자신이었다.
“저는 관심을 끄는 것이 있으면 완전히 빠져드는 성격이에요. 그 한 가지에 매료돼 그것만 생각 하고 자세히 알기 위해 점점 빠져드는 거죠.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몰두해요. 그것은 지금까지 제가 무엇인가를 해나갈 때마다 일정 부분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이죠.” 소설과 시, 그리고 음악으로 대변되는 책과 피아노는 석 교수에게는 삶의 저변에 깔린 기반 같은 거였다. 추구하고자 했던 취향이고 즐거움이었다. 석 교수는 코로나가 한창인 지난해 5월 “죽음이 우리를 갈라 놓을 때까지”(Till death do us part)라는 제목으로 TED에서 강연을 해 인기를 모았다. 결혼생활을 잘 영위하고 보람있게 보내기 위한 교양 강연이었다. 10분이라는 짦은 시간에 어떻게 이혼을 이해하는 것이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가라고 지혜를 가르처 주었다. 가족법을 가르치는 석 교수는 성공적인 결혼생활의 원리를 이해하려면, 이혼의 원인을 이야기 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렌즈를 통해 결혼생활을 결정짓는 것들을 고려함으로써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방법(희생, 육아, 자신)을 제시하고 있다. 강의가 끝나자 참석자 전원이 기립 박수로 답례했다. 자랑스런 한국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