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1970-80년대 아시아인의 최대 인권운동으로 불리는‘이철수 사건’을 언론인 출신 재미 한인 감독 줄리 하(Julie Ha)씨와 유진 이(Eugene Yi )씨가 6년 동안 제작한 다큐멘터리‘이철수씨 에게 자유 를’(Free Chol Soo Lee) 다큐 영화가 2022년 선댄스 영화제 다큐멘터리 경쟁부문에 초청되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성진 취재부 기자>
광범위한 자료 바탕으로 제작
코리앰 저널(KoreAm)의 편집장 출신의 줄리 하씨는 ‘이철수 사건’을 처음 탐사보도로 ‘새크라멘토 유니언’지에 보도한 이경원 대기자와 만나면서 이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평가를 위해 다큐로 제작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녀는 이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이경원 대기자를 포함해 ‘이철수 구명 위원회’ 관계자등을 포함해 관련자들과 사건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았다.
‘이철수 사건’은 1989년 미국에서 <True Believer>라는 타이틀로 영화화도 되었으나,실제 사건 조명 에는 미흡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번에 줄리 하(Julie Ha)씨와 유진 이(Eugene Yi )씨가 제작한 다큐멘터리는 이철수 구명운동을 벌인 이철수 구명위원회 관계자들을 포함해,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과 광범위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제작해 ‘이철수 사건’의 진상과 역사적 진실을 조명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독립영화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선댄스 영화제는 내년 1월10~30일 대면과 온라인 방식을 결합한 하이브리드 영화제로 개최된다. ‘이철수(Chol Soo Lee,1952~2014) 사건’은 1973년 6월 3일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시 차이나 타운에서 중국 갱단 간부 입이탁(Yip Yee Tak)을 이철수가 살해한 것으로 누명을 쓰고 무기 징역을 받은 데에서 비롯되었다. 교도소 복역 중 이철수는 백인 우월주의자인 미국인 모리슨 니덤 (Morrison Needham)의 공격에 정당방위로 대응하다 니덤을 살인하여 추가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철수의 구명 운동을 위해서 일본계 변호사인 랑코 야마다(Ranko Yamada)와 사건을 처음 보도한 『새크라멘토 유니언』의 이경원 원로 기자를 중심으로 이철수 구명위원회[Chol Soo Lee Defense Committee]가 조직되었다. 이철수는 재심을 청구한 끝에 무죄를 받아 냈고, 10년간의 복역 끝에 1983년 3월 28일 석방되었다. 이철수 사건은 당시 미국 백인 사회의 편견과 차별 속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이철수는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19세의 이민 청소년이었다. 범행에 사용된 총기가 이철수가 소지했던 것과 불일 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세 명의 증언에만 의지하여 경찰이 이철수를 살인죄로 기소하였다. 이철수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어머니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와서 학교를 다녔으나, 영어도 서투 르고 낯선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학생을 때리다가 교사에게 발각되어 퇴학 처분을 당하였다.
10년 복역 끝에 무죄 받아내기까지
이후 이철수는 학교를 간다고 말하고 집을 나와서는 자전거를 훔쳐 타고 달리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게 붙잡혀 절도죄로 수감되었다. 1973년 6월 3일 차이나타운 근방에서 여자 친구와 식사를 하던 이철수가 입이탁의 살해 용의자로 억울하게 체포되고 물증도 없는 재판에서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 당시 유재건 변호사와 일본계 랑코 야마다 변호사가 이철수의 무죄를 주장하였고, 랑코 야마다의 6개월간의 끈질긴 간청에 의해서 『새크라멘토 유니언』의 이경원 원로 기자가 1977년 6월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복역 중이던 이철수는 1977년 10월 8일 백인 우월주의자인 모리슨 니덤의 공격에 정당 방위로 대응하다 니덤을 살해하게 되었고, 이로써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편 수개월간 이철수를 취재한 끝에 이경원 대기자는 1978년 1월 29일 『새크라멘토 유니언』에 이철수의 무죄에 대한 특집 기사를 보도하였다. 보도 기사를 접하고 재미 한인 사회는 충격에 빠졌고, 곧 이철수 구명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이철수 구명위원회(Free Chol Soo Lee)가 조직되어 재심을 청구하였다. 위원회는 후원금 모집에서 가두시위, 구명 편지 등을 통해서 구명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아울러 이철수 구명위원회는 후원받은 모금을 통해서 사설탐정을 고용하여 목격자를 찾는 데에도 최선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이철수 구명위원회는 사건 당시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상황을 목격한 스티브 모리스를 결정적인 증인으로 내세워 1982년 8월 11일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검찰은 1983년 1월 14일 모리슨 니덤에 대한 상고심에서도 재판 무효의 판결이 나자 항소 하였다. 그러자 이철수 구명위원회는 검찰 측과 사전형량조정제도[plea bargain]를 통해서 지난 10년간의 복역을 살인죄에 대한 기간으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얻어 냈고, 마침내 이철수는 1983년 3월 28일에 석방될 수 있었다.
이경원 대기자의 끈질긴 탐사보도
이철수 사건은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사건을 처음 보도한 이경원 대기자는 원래 탐사 보도 기자였으나, 이후 젊은 세대들에게 인권과 정의에 대해서 강연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는 전도사가 되었다. 또한 이철수 구명위원회에서 활동한 한인 청년 들 중에 인권과 정의 운동에 앞장서는 변호사와 정치가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던컨 이 변호사, 데니스 김, 케네스 이, 추숙남, 심영식은 변호사가 되었고, 일본계 월렌 후루타니는 정치인으로 성장해 캘리포니아주 하원 의원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이철수 사건 이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민자 학생들이 100명이 넘는 공립 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이중 언어 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조례가 재정되었다. 캘리포니아주 법원에서도 형사 사건에서 이민자들의 재판에는 이민자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관례가 생겨났다. 한편, 사건의 당사자인 이철수는 위장병으로 2014년 11월 1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망하였다.
이철수 사건은 당시 미국 백인 사회의 편견과 차별 속에서 발생한 비극이자 억울한 누명을 쓰고 형벌을 선고받은 개인에 대해서 재미 한인 사회를 중심으로 시민 사회가 각고의 노력 끝에 무죄를 받아 낸 사건이었다. 아울러 이철수 사건을 계기로 전 재미 한인들이 하나로 단결해 구명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재미 한인 사회가 단결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