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이 지난 2003년 8월 4일 투신은 자살이 아니라는 의혹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월간조선은 지난 18일 발매된 2월호에서 정 전 회장의 사망 전날 그를 만났다는 검찰 관계자의 증언을 인용, “정 전 회장이 투신자살한 게 아니라 타살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도했다. 본보는 지난 2003년 8월 당시 정 회장의 투신자살 미스터리를 두차례에 걸처 보도한바 있다. 당시 정 회장과 마지막 술자리를 같이한 고교동창 친구인 박기수(54)씨가 LA로 다시 돌아왔지만 그의 행방이 묘연해 각가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
월간조선에 따르면 정 전 회장 사망 전날인 2003년 8월3일 오후 2시쯤 하얏트 호텔 커피숍에서 그를 만난 검찰 관계자는 “정 전 회장의 사망 직후 공개된 유서는 4장이지만 그날 내가 본 유서는 확실히 5장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정 회장이 유서를 보여줘 직접 읽어봤다”면서 “언론에 공개되지 않은 나머지 한 장에는 김대중 정부 시절 핵심 실세를 원망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말했다. 또 경찰 조사에선 8월 3일 밤중에 정 전 회장이 현대 건물로 들어와 유서를 작성한 뒤 투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유서를 미리 써 갖고 다녔다는 점도 타살 근거로 제시된다. 이 검찰 관계자는 “정 전 회장의 필체는 맞지만 유서엔 날짜가 적혀있지 않았는데, 이미 오래전부터 유서를 써 갖고 다녔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 전 회장과의 관계에 대해 “가끔 만나는 사이였고, 일을 의논해 온 적도 있다”고 했다. “정 전 회장의 당시 심리상태와 대화 내용, 그리고 아무 거리낌없이 유서를 내놓은 행동 등을 보면 실제로 자살할 사람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그는 또 “정 전 회장이 죽기 전날 밤 고교 동창 박모씨와의 저녁 술자리에도 오지 않겠느냐는 초대를 했었다”며 “죽을 작정을 한 사람이 술자리에 부르진 않았을 것”이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는 “분명한 점은 정 전 회장이 측근들과 자살 소동을 준비했다는 것이고, 정 전 회장은 죽을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몽헌 전 현대 회장이 사망하기 나흘 전인 2003년 7월 31일 미국으로 출국한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은 의문을 풀어줄 결정적 인물로 꼽히지만 행방이 묘연하다. 김씨는 2003년 7월, 정 전 회장의 지시로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미주 현대상선이 지난 2000년에 3000만달러를 스위스연방은행 모 계좌로 송금했다는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의 진술과 관련해 집중 조사를 받았다. 김씨는 이 돈이 ‘대북 통신사업 취득용’이라고 진술했지만, 정 회장은 ‘민주당 총선자금용’이라고 진술했다. 당연히 ‘진짜 수취인’이 북한이냐 정권 최고위층이냐는 의문이 생겼다. 김씨는 이 의문을 풀어줄 ‘송금영수증’을 찾아오겠다며 그해 7월 31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미국 도착 직후 검찰에 송금일시(2000년 2월 26일)와 액수(3000만달러가 아닌 2500만달러)만 밝힌 채 정작 중요한 송·수신인은 ‘한국 시각으로 8월 4일 아침 9시10분에 팩스로 영수증을 보내겠다’고 한 이후에는 깜깜 무소식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2004년 11월 비밀리에 입국해 검찰에서 조사를 받고 그해 12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러나 이후 김씨의 행적은 아직 노출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정몽헌전 현대 회장이 타살됐다는 의혹에 대해 본지가 당시 정 전 회장의 부검 및 수사를 담당했던 당사자들을 취재한 결과, 이들은 대부분 “자살이 확실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부검을 맡았던 이원태(·당시 법의학부장)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소장은 “추락사에서 보여지는 전형적인 다발성손상에 의한 사망”이라고 말했다. 추락 등에 의해 간과 비장 등 장기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손상되는 바람에 사망했다는 의미다. 당시 네티즌들은 ‘기절시킨 후 창문으로 던졌다’며 타살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었다. 정 회장이 투신했던 현대사옥 12층의 창문은 가로 95㎝, 세로 54㎝의 반(半)개폐식이라 어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였다. 이한영(당시 법의학과장)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서부 분소장은 “건장한 성인을 기절시키려면 폭행하거나 약물 등을 써야 했을 텐데, 폭행흔적도 없었고 약물도 검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부검에 참여했던 김회종(당시 서울지검 형사3부) 검사는 “당시 가족들은 부검에 반대했는데, 내가 나중에 타살의혹 등 문제가 불거질까봐 일부러 부검을 주장했다”면서 “목 졸린 흔적이나 타살로 의심할 만한 외상이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사건을 맡았던 전강진 검사 또한 “추락 직전까지 살아있었음을 보여주는 생활반응이 시신에 있었다”고 말했다. 네티즌들이 당시 제기한 또 다른 의혹인 ‘외상이 거의 없다’는 점에 대해서도, 관계자들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당시 사건현장을 가장 일찍 찾은 서울 종로경찰서 김희수 경장은 “소나무 가지에 걸치면서 한 번 충격을 완화했기 때문에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 없는 것”이라며 “시신을 들어내니 화단의 흙이 30㎝ 정도 깊이 파여 있었다”고 말했다. 김 경장은 “집무실 창문 근처에 의자가 하나 놓여있었다”며 자살 직전의 정황을 설명했다. 김 경장은 또 “알려진 것과 달리 책상 위에 유서봉투가 4통이었는데, 3통에만 유서 4장을 담았고 1통은 비어있었다”고 말했다. 정 전 회장은 유서 겉봉투에 각각 ‘지이엄마’(2장) ‘김윤규 사장’(1장) ‘죄송합니다’(1장)라고 적어놓았으나, 1통의 겉봉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2003.6.30 대검 중수부, 불법대북송금 및 현대 비자금 수사 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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