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타운의 새로운 리더십, 스테판 하 신임 한인상공회의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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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한인상공회의소의 뉴리더 스테판 하(48, Stephan Haah) 차기회장에 대한 타운의 관심이 높다. 1.5세의 선두 그룹인 그는 지난 달 20일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에서 타운의 지대한 관심속에 열린 LA한인상공회의소의 회장 경선에서 차기회장으로 당선되어 화제를 모았다. 특히 이번의 경선은 26년 만에 처음 실시되어 뜨거운 열기 속에 재적이사 전원이 투표에 참가하는 진기록도 세웠다.
그의 지나온 경력과 활동을 보면 한인 커뮤니티가 기대하는 1.5세대의 지도력으로 상공인으로서의 타운경제 성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치력 신장의 주역으로 기대할 만하다.
한편, 하 차기회장은 당선된 다음날이 지난 21일 라디오코리아와 인터뷰에서 “최근 남문기 LA한인회장 을 미주상공인총연합회장으로 추대한 임시총회는 ‘날치기 총회’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해 파장이 ‘상공회의소 대 한인회’간의 신경전으로 번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성진 취재부 기자


한인상공회의소가 커뮤니티를 위한 프로젝트 중에 ‘올림픽 BID’라는 것이 있다. 이는 코리아타운의 심장부 올림픽 거리를 획기적으로 새롭게 모습을 바꾸게 되는 야심찬 재개발계획이다. 그가 이 ‘올림픽 BID’를 한인사회에 선보인 주인공이다. ‘올림픽BID’는 코리아타운 형성 40여년만에 처음으로 LA시정부가 개발자금을 투입해 친환경, 무범죄, 상가번영의 3박자를 꾀하는 장미빛 계획이다.
하 차기회장은 “이같은 계획이 타운에 제대로 홍보가 되지 않아 안타까울 뿐이다”면서 BID에 대해 커뮤니티가 관심을 갖기를 희망했다. 그는 지난 96년에 상공회의소의 홍보분과위원장을 맡으면서 LA시 재개발청(CRA)과 인연을 맺게 됐다. 당시 네이트 홀든 시의원의 추천을받아 CRA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게 됐다. 이미 그곳에 대학 선배인 안성주 위원이 있었다. 나중에 안 위원이 사퇴하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자연히 CRA 의 코리아타운 담당 자문위 의장을 맡게 됐다. 그러면서 CRA의 자금이 커뮤니티에 어떻게 쓰였는지를 알게 됐다. 이렇게 해서 ‘다울정’ 건립에서도 25만 달러의 자금을 받아 낼 수가 있었고, 최근에는 올림픽 상가를 활성화 시킬 수 있는 ‘올림픽 BID’ 프로젝트가 성사됐다.













버클리에서 풀뿌리운동


대구 출생인 스테판 하 회장은 진주고교를 졸업 후 1976년 2월 7일 부모를 따라 샌호제이로 이민왔다. 당시 샌호제이에는 10년만에 폭설이 내렸다. 83년에 UC 버클리 건축과를 졸업했다. 현재 버클리 동문회 고문을 맡고 있다.
UC버클리 대학 시절 학생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흑인학생 그룹의 정치활동을 배우는 계기를 만났다. 82년 흑인 학생그룹은 맥주회사 Coors를 상대로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흑인들이 Coors 맥주를 많이 마시는데,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환원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버클리 캠퍼스에 일어난 이 보이콧은 곧이어 UC계 9개 캠퍼스로 확산되어 나가면서 다시 다른 대학으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고, 흑인 커뮤니티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는 이같은 버클리 캠퍼스 활동을 통해 풀뿌리 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비록 1년 동안의 경험이었으나, 그에게는 이같은 활동이 강하게 각인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우리 한인들도 왜 이런 활동을 할 수 없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유대인 커뮤니티의 정치력 운동에 관심을 두고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버클리 캠퍼스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커뮤니티 봉사활동에도 열심이었다. 그가 한인노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시작한  ‘장수무대’는 벌써 20년 이상 버클리 한인학생회가 한인사회를 위한 봉사활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처음 그가 이 행사를 기획하면서 업체로부터 라면 박스를 기부받고 여러가지 물품을 기증받아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초청해 물품을 나눠주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위로했던 ‘장수무대’ 를 치루면서 노인네들을 기쁘게 한 이벤트는 아직도 그의 기억에 생생하다. 이같은 행사는 당시 지역 PBS 방송에서 크게 보도해 한인들의 효도행사로 널리 홍보가 되기도 했다.


군부독재 반대운동


80년대 한국에서는 전두환 군부정권이 등장하면서 미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한인 학생들의 시위도 잇달았다. 당시 그는 ‘광주 사건’을 상징하는 관을 만들어 버클리 교내에서 시위행진을 벌이고 화형식까지 진행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 시위는 당시 샌프란시스코의 대표적 일간지 클로니클지(志)에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됐다. 학생시위를 주도한 그는 주위로부터 ‘시위를 주도했으니 한국방문은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미시민권을 취득하는 계기가 됐다.
LA로 84년에 이주한 그는 처음 마커스 엔  밀리챕 부동산 회사에서 아파트, 사무용 빌딩, 상가 건물 등을 대상으로 한 인베스트멘트 프로퍼티 전문 브로커로 일해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 한편 그는
 버클리 학생회 때처럼 봉사활동을 하고 싶어 봉사단체를 찾았다. 그가 찾은 곳이 한미연합회 (KAC)였다. 그곳에서 KAC를 창설한 1.5세대 주역들인 정동수 변호사, 촬스 김 전KAC국장 등을 만났다. 이러한 KAC와의 인연으로 그는 97년에 KAC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처음 LA로 와서는 동양선교교회에 나가면서 주일하교 봉사활동에도 열심히 참가해 “올해의 주일학교 선생”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인들의 정치력 향상에 큰 관심을 두었다. 대학시절 캠퍼스에서 흑인학생들의 정치참여 의식을 배운 그는 LA한인사회에서 나름대로 정치력 네트워크를 기르기 위해 준비했다. 그는 미국 민주당 전국평의원으로 활동하는 박상협 위원과 한미민주당협회장을 지낸 리처드 최씨 등과 함께 두 차례에 걸친 LA와 보스턴에서 개최된 민주당 전당대회 등을 참가하면서 미주류 인사들과의 교분을 쌓는데 노력했다.
오늘날 그가 교분을 지닌 안토니오 비아라이고사 LA시장, 허브 웰슨 시의원, 에릭 가세티 시의원, 버나드 팍스 시의원 등은 대부분 이들이 현직에 오르기 전에 사귀던 인사들이다. 허브 웨슨 시의원의 경우는 그가 네이트 홀든 전 LA시의원의 보좌관이었을 때부터 사귄 인물이다. 그러기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당당하게 한인 커뮤니티의 문제를 건의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는 유대인 정치운동가로부터 ‘표수가 적은 커뮤니티는 우선 정치헌금으로 영향력을 키워야 한다’는 조언을 들었다. 웨스트 코비나 지역 선거관리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 정치헌금자 1위는 스테판 하, 바로 그 자신이다. 그는 민주당원이기에 그가 내놓는 정치헌금은 주로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전해진다. 그러나 한인 커뮤니티에 관심을 쏟는 공화당 정치인에게도 그는 모른 채를 하지 않는다. 이 중에는 에드 로이스 연방하원과 미셀 스틸 박 위원이 있다.



 


1세와 2세의 가교


그는 지난 88-89년에 하기환 전LA 한인회장과 비즈니스 파트너로 함께 일한 적이 있다. 이런 인연으로 93년에 하기환 한인상공회의소 회장 시절에 이사로 참여했고, 이용태 LA한인회 시절에는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정치력 신장 운동을 주도했다.
한인상공회의소 이사로 그리고 한인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자연히 1세들과의 연결을 갖게 되면서 1세들의 삶과 희생을 조금씩 터득하는 기회를 갖게됐다. 그러면서 1세들의 연대의식과 1.5세와 2세들의 연대의식 사이의 차이점도 느끼게 됐다. 그는 1세들이 한번 연결을 맺으면 좋게는 의리로, 하여간 싫더라도 함께 무슨 일을 도모했으면 끝까지 함께 가는 습성을 중요하게 보았다.
또 1세들 사회를 보면서 ‘내부적으로 서로 상대방을 비난할 수 있어도, 외부적으로는 이를 나타내지 않는 분위기’를 배웠다. 이런 사조는 1.5세와 2세들 사회에서는 보기 힘든 관계였기 때문이다. 1.5세와 2세들은 함께 무슨 일을 도모하자고 하더라도 중간에 개인적 일로 단합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개인적 일에 추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그는 “1.5세나 2세들이 미국사회 에서 자라온 환경 때문이 아닌가 여겨진다”고 진단했다. 예를 들면 학교에서 백인,흑인이나 멕시코 등 친구와 함께 어울려 지내다가도 가정이나 자신들의 커뮤니티로 돌아와서는 각자의 문화나 관습의 사회에 살아가야 하는 2중적 환경에 적응하다보니 개인주의적인 것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한인사회에서 정치활동위원회(PAC)을 활성화 하려고 노력했다. LA시장 선거 당시 처음으로 코리아타운에서 주류 정치인 후보들 토론회를 성사시킨 것도 그였다. 당시 토론회를 앞두고 참석을 약속했던 바야라이고사가 무슨 연유로 한때 참석을 꺼려했다. 이미 미디어에 홍보가 나간 마당에 토론회가 계획대로 열리지 못하면 한인사회 정치력 신뢰에도 이미지가 손상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물러설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비야라이고사의 선거 보좌관인 지미 블랙만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만약 토론회에 나타나지 않으면 ‘비야라이고사가 거짓말장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알리겠다”고 했다. 결국 비야라이고사는 한인 토론회에 참석했고, 결과적으로 주류사회 많은 미디어들은 한인사회의 정치력 신장에 많은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됐다.
2005년 한인회 시절 그가 주도한 유권자 등록은 7,000여명에 달해 한 이벤트에서 최고최대의 기록을 올려 정치력 신장에서 한인회가 주도해 큰 주춧돌을 만들어 미주류사회에서도 크게 주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멕시코 연해에 글로벌 신도시 개발


스테판 하 차기회장의 개인 사업체는 록킹햄 애셋 매니지먼트( Rockingham Asset Management, LLC)라는 부동산개발업체이다. 개발업체의 회장인 그는 지금 20년 미래를 두고 대망의 꿈을 지니고 키우고 있다.
지난 2002년에 멕시코 리버티 코브 해변 지역에 46,500에이커(약 5,000만평)을 구입해 6만채의 유닛을 개발하는 신도시 개발이 바로 그것이다. 뉴욕 맨해튼의 3.5배에 달하는 크기의 땅에 장차 미국의 베이비 부머 세대들이 은퇴 후 친환경에서 살 수 있는 미국형 신도시를 개발한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그가 UC버클리 대학을 졸업해 지난 20여년 동안 열심히 일하면서 축적한 자본을 올인해 투입한 것이다. “20년전으로 돌아간다면 무엇을하 겠는가”라는 질문에 “땅에 대한 투자”라고 답했다. 그는 “세월이 돈을 벌어 준다”고 말했다. 리버티 코브에는 그의 재산 전부와 부동산 투자신탁 펀드 등 초기자본 4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그동안 땅값이 많이 오르는 동시에 2005년 멕시코 정부로부터 6만 채 주택건설 허가가 나면서 땅값이 평가액 기준 6억5000만 달러로 급등했다. 또 리버티 코브 해변가를 따라 고속도로 등 인프라 건설 계획이 발표되면서 현재 시세는 다시 12억 달러에 달하고 있다.
이같은 리버티 코브 개발에 2005년 4 월 당시 비센테 폭스 멕시코 대통령은 이 프로젝트 개발 담당자와 만나 멕시코 정부의 정책 지원을 약속해 미래 신도시에서 미주한인은 물론 한국의 동포들도 투자에 관심이 몰릴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하기환 전LA한인회장
“상공회의소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LA한인상공회의소의 전직회장이며 현재 이사회의 1세그룹의 리더격인인 하기환 전LA한인회장은 “이번 상공회의소 경선에서 부재자 투표가 있었기에 전원투표하는 기록이 세워졌다”면서 “이번 경선으로 상공회의소는 한층 단합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난 24일 외국여행 중에 본보에 전화로 “선데이저널지 최근 기사에서 부재자투표 방식을 부정적으로 보도한 것은 유감이다”라고 “부재자 투표가 없었다면 전원투표의 기록이 어떻게 나오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자신이 부재자투표를 강하게 제안한 이면에 자신의 해외여행과 관련을 보도한 본보 기사에 대해서도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이번 경선에서 최라나 이사장을 회장후보로 강력하게 지지했던 하 전 회장은 “경선을 통해 우리 상공회의소는 더한층 단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면서 “비록 우리 팀이 경선에 실패했지만 그것은 선의의 경쟁에서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내 자신이나 우리 팀은 앞으로 신임 회장과 함께 상공회의소 발전을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면서 “상공회의소는 언제나 하나다” 라고 강조했다. 
한편 하 전회장은 “나는 과거에 스테판 하 신임회장과 파트너로 비즈니스를 한 경험도 있다”면서
“그가 상공회의소를 위해 많은 일을 할 것으로 믿고 나도 힘을 보탤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오래 이사직으로 있는 것 같다”면서 “이사로만 있어서 돕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고 밝혀 이번 계기에 이사직 은퇴도 고려하고 있음을 비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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