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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이스텍 바디샵 저스틴 한 대표
ⓒ2010 Sundayjournalu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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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형제 가운데 막내인 저스틴 한 대표. 큰 형과 작은 형은 이민과 동시에 일찌감치 취업전선에 뛰어들거나 군에 몸을 담았다.
자연히 한 대표는 형들과 다소 다른 이민생활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모님과의 한솥밥 생활은 늘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1982년 어느 날 부친이 갑자기 중풍을 맞고 쓰러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머니는 좌골신경통, 즉 디스크 판정을 받고 거동이 불편해졌다. 이 때부터 한 대표는 막내임에도 장남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당시 한 대표의 부친은 온타리오 지역 일대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수완가였다. 부친이 쓰러진 뒤 한 대표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농장을 물려받아야 했다. 결국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
그렇게 한 대표의 삶에는 갑작스런 이민과 학업포기 등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는 시련이 연이어 찾아왔다.
하지만 더 암울한 것은 막상 뛰어든 농장 일이 어린 그에게 너무나 험난했고 벅찼다는 점이다. 한 대표는 “농장이 얼마나 컸는지 지금은 초대형 쇼핑몰이 돼 있더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어 그는 “그래도 통배추, 조선 무 등을 재배해 LA 도매상에 납품하던 시절이 생각난다”며 옛 시절을 떠올렸다.
부모님을 대신해 생업에 뛰어든 후 그의 인생에 다시 전환점이 찾아왔다. 우연히 모친의 교회 지인 소개로 일하게 된 바디샵에서 소중한 경험을 얻게 된 것이다.
일주일 꼬박 하루 12시간씩 일하며 노력한 결과 그의 능력을 눈여겨 지켜본 한 바디샵 업주의 동업제안으로 한 대표는 새로운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는 불과 2만 달러에 불과했던 바디샵 매출을 순식간에 그 10배인 20만 달러로 끌어올리며 엄청난 사업수완을 발휘한 것이다.
‘에이스 텍’의 탄생
1987년 한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독립을 결심하고 업소명칭을 등록하기 위해 시청을 찾았다.
처음에는 ‘하이텍 바디샵’이라는 이름을 원했지만, 이미 누군가가 해당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떠올린 단어가 바로 ‘에이스’였다.
한인타운에서 손꼽히는 ‘에이스’ 업체가 되겠다는 그의 꿈이 태어난 순간이었다.
이어 2~3년간 업체를 전성기로 이끈 한 대표는 현재의 건물과 부지를 동시에 구입하며 탄탄대로를 달리게 됐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또 다른 비극이 그를 덮쳤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4.29 흑인 폭동의 여파로 바디샵 업계 역시 여지없이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결국 에이스 텍의 주요 고객인 백인, 유태인 고객들의 발길도 크게 줄어들었다. BMW, 벤츠, 캐딜락 등 고급차량의 우수 정비소로 명성을 얻었던 만큼 베버리힐즈 등 부촌 고객들이 떨어져 나가자 에이스 텍의 입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대표는 여기서 주저앉지 않았다. 처음 8명으로 시작해 2개 업소를 통틀어 한때 100명에 육박했던 직원들의 운명이 한 대표의 손에 달린 탓이었다. 바로 이때 한 대표의 뇌리에 “바디샵 업계 또한 변화에 맞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쩍 스쳤다.
그는 파머스, AIG, 머큐리사 등 주류회사와의 유대관계를 보다 강화했고, 오랜 신뢰 끝에 메이저 보험사들의 공인지정 바디샵으로 거듭났다. 또 5만 스퀘어피트 공간을 활용해 프레임 머신만 13대를 비치하는 등 시설 현대화에도 과감히 비용을 투자했다. 또한 무형자산이라 할 수 있는 신기술 취득을 위해 직원들의 보수교육도 꼼꼼히 챙겼다.
결국 그의 노력 덕분에 에이스텍 바디샵은 LA 한인타운에 위치했지만, 80% 이상의 고객이 미국인일 정도로 주류사회에서 인정받는 업체로 환골탈태했다.
한인타운 업계의 미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