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착취재] 조재길 세리토스 시장 출판기념회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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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타운 올드타이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냥 올드타이머들이 아니다. 과거 서로가 한 자리에 앉기를 거부했던 인사들이 역사적인 화합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지난 18일 오후 6시 옥스퍼드 팔레스 호텔에서 조재길 세리토스 시장의 자서전 ‘소명’ 출판기념회와 시의원 재선을 위한 후원의 밤이 열렸다. 이 자리에 보수계와 진보계가 어울려 한마음으로 조재길 시장의 ‘또 다른 꿈’에 동참한 것이다.
이날 모임은 조 시장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날은 조 시장의 공식적인 한인타운 입성일인 까닭이다. 과거 미국 정치계에 진출에 성공했거나, 진출을 꿈꾸는 많은 한인들이 LA코리아타운에서 정치모금 파티를 개최했다. 하지만 조 시장은 두 번의 낙선이후 재기에 성공해 2007년 LA카운티 내 세리토스 시의원에 당선됐고 한인 최초로 세리토스 시장에 선출될 때까지도 LA코리아타운에서 후원회 모임을 가지지 않았다.
조재길 시장은 지난 80년대 초 <스트릿 저널> 주간신문을 발행한 유력 언론인 출신으로 미 주류 정계에 진출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성진 취재부기자>



이날 옥스포드 팔레스 호텔 그랜드 볼룸에는 한인사회에서 극보수를 표명하면서 활동한 김봉건 애국단체연합회장이 진보통일 운동을 펴온 이활웅 선생과 반갑게 만나 악수를 나눠 시선이 집중됐다.
또 이날 모임에는 소위 우파와 좌파 인사들이 자리를 함께 했고, 영남과 호남 출신 인사들도 서로를 환대했다. 모두 미 주류 정치계에서 ‘더 큰 꿈’에 도전하는 조재길 시장을 후원하고 지지하기 위해 나선 것이었다.
특히 하기환 윌셔코리아타운 주민의회 의장과 윌셔은행(행장 조앤 김) 등이 스폰서로 나섰고, 조익현 한미 에스크로 회장과 남문기 미주총연회장도 후원자로 참석했다. 이날 후원회 기도 순서를 맡은 세리토스 동양선교교회의 석태운 담임목사는 조 시장의 ‘정신적 맨토’로 알려진 인물이다. 시의원 선거에서 두 번의 낙선을 경험하며 주저앉을 뻔한 조 시장을 일으켜 세운 장본인인 셈이다.
이날 환영사를 맡은 이청광 박사가 짧은 인사를 마치고 연단에서 내려오자 사회를 맡은 제임스 방 변호사는 “이런 행사 때 말을 짧게 하는 분이 가장 환영을 받는다”면서 “다음 축사하실 분들도 간단히 해주기를 바란다”고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는 한층 화기애애해졌다.


이념 초월한 화합












 ▲ 조재길 의원
그러나 이어서 연단에 오른 남문기 미주총연회장의 가시 돋친 독설로 모처럼 함께한 인사들이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남 회장은 특유의 ‘미소’를 띠면서 1세 원로로서 최근 라크레센타 타운 위원에 당선된 서영석 전LA한인회장을 지목해 “왜 서영석 회장 같은(나이 많은) 1세들이 시의원에 나섰는가”라고 비꼬았다.
그는 또 화살을 1.5세인 사회자 제임스 방 변호사에게 돌렸다. 남 회장은 “방 변호사는 타운에서 얼쩡대지 마시고 시의원에 나서세요”라고 쏘아 붙인 뒤 1.5세인 이창엽 전 LA한인회 이사장에게도 “이창엽씨, 어디 가서 시의원에 출마하세요”라고 말해 아연실색케 했다.
이 자리에서 남 회장은 “LA시장 선거는 (우리가)두 번 실패하더라도 세 번째는 당선될 수 있다”면서 조 재길 시장이 과거 시의원 선거에 두 번이나 실패한 점을 상기시켰다. 이어 그는 “우리 동포사회가 본국에서 1억원만 뺏어 오면 시장 만들 수 있다”고 소리를 높였다. 남 회장이 축사를 마치고 내려오자 사회자인 방 변호사는 “오늘 말씀 잘 듣고 심사숙고하겠다”며 받아쳐 일단락됐다.
다음 축사자로 나선 인물은 최근 실시된 라크레센타 지역선거에서 당선된 타운카운슬의 서영석 의원이었다. 서 의원은 남 회장의 축사를 언급하면서 “남 회장은 자기가 출마한다는 이야기를 빼고 좋은 말은 다 한 것 같다”고 말해좌중의 웃음을 끌어냈다. 남 회장이 다른 사람들 보고 미국 정치계에 출마하라고 하면서 왜 자신은 안하는가를 역으로 찌른 것이다.
서 의원은 “오늘 이 자리는 조재길 시장님의 출판기념회 자리지만 제 인사부터 하겠다”면서 “나의 선거 운동을 도와 준 자원봉사자, 후원자 그리고 응원을 해 준 분들께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베버리 힐즈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사업하기 좋은 도시에 세리토스 시가 선정되어 조 시장이 상패를 받기도 했다”면서 “조 시장이 2012년 주하원에 진출하기를 바란다”고 추켜세웠다.
LA평통의 이서희 회장도 축사 순서에 포함됐다. 이 회장은 “조 시장은 입지전적 인물”이라고 운을 뗐다. 마지막 축사자로 나선 LA한인상공회의소 김춘식 회장은 “내가 남문기 회장과 동갑이고 강석희 시장과도 동갑이라 남 회장과 동갑 모임 만들자고 논의하다가 이 자리에 나왔다”면서 “조재길 시장이 펴낸 책 이름 ‘소망’이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조 시장은 1세 중에서 김창준 의원(김창준 전미연방하원) 다음으로 용기 있는 분”이라면서 “자기 돈 써가면서 선거운동 했다”고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어 그는 “어제 하기환 회장 댁에서 개최된 톰 라본지 의원후원 모임에 갔는데 타운에서 이런 모임에 오시는 분들이 그저 그분들이었다”면서 “이제 우리 모두가 조 시장을 도와야 한다”고 말했다.


서동성 변호사의 서평

이날 서평을 맡은 서동성 변호사는 일반적인 서평과는 달리 소위 정치인들의 자서전에 대한 비판을 가한 다음 조 시장에 대한 인물평을 새로운 각도로 평가하여 새로운 시각을 참석자들에게 전달했다.
마이크 앞에 서면서 그는 “서평을 부탁 받고 아끼는 후배라 거절을 못했다”고 언급한 후, “논평의 대상이 서평이라 주저했다”고 운을 떼었다.
서 변호사는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자서전이 없는 사람은 행세를 못했다”면서 “자서전은 꼭 써야 하는 사람이 쓰지 않고 엉뚱한 사람들이 쓰고 있다”고 꼬집으며 “정치인들이 대중화에 영입하기 위해 함부로 책을 출간했다”고 말했다.
또 그는 “적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권을 거머쥔 정치인은 급조된 자서전을 만들었다”면서 “그런 자서전도 본인이 쓴 것이 아니라 밑에 사람이 대필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인사회에서도 과거30대 중반의 변호사이고 단체장인 사람이 서울의 특급호텔에서 정재계 인사들을 초빙해 출판 잔치를 보고 대단하구나 했다”면서 “사회 초년병이 급조된 자서전으로 나서는 세태”를 꼬집었다. 한 때 국내외로 화제가 됐던 K 변호사를 지칭한 것이다.
이어 서 변호사는 “중견 도시의 시장인 조 시장의 자서전이 혹시나 앞으로 그의 정치도구화로 쓰여질가 의심도 있었다”고 전제하면서 “하지만 그의 책을 읽고서는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고 말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이 책이 주관을 가지고 이민자의 삶을 진솔하게 써 나갔다”면서 “조금도 꾸밈없이 친구와 대화하듯 써내려 갔다”고 소개했다. 그리고는 “이 책이 자서전이라기 보다는 신앙인의 간증서”라고 강조했다.
서 변호사는 “책을 읽고 보니 뻥튀기 찬양가가 아니고 보기 드물게 진솔하다” 면서 “대부분 자서전이 자기 과시의 글인데 이 책은 신선하다는 느낌을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누군가 우리의 5천년 역사 중에서 편안했던 역사는 250년밖에 안된다고 했다”면서 우리는 격동기의 고난의 행군을 이어 왔는데 (조 시장은) 오히려 이를 축복으로 생각하고 이겨 냈다”고 분석했다.
마지막으로 서 변호사는 “이 책을 읽으면 가슴이 따뜻해진다”면서 “여러 사람들이 읽어야 하고, 특히 2세와 3세들에게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 책으로 전달했으면 좋겠다”고 의미를 전했다.



진보-보수 한자리 어울려

이날 모임이 보수계나 진보계의 이념을 떠나 한인동포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대열에 동참하자는 취지인 만큼 ‘보수계의 대부’격인 김봉건 애국단체연합회 대표회장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인사말에서 40년 전 조재길 시장과의 특별한 인연도 소개했다.
김 회장이 대령으로 국방부 재직 시 조재길 시장은 당시 공군총참모총장 서한장교였다고 회상하며 조 중위의 뛰어난 문장력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 회장은 “미국에 오니 조재길 중위가 언론인으로 군사독재 반대운동을 펴고 있었다”면서 “오늘 이 자리에 온 이활웅 선생도 저와는 반대 입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그들이 저와는 다른 길을 걷고 있었으나 불쾌한 생각은 지니지 않았다”면서 “각자의 길이 통일의 지향이기에 개인적으로 만나면 반갑게 악수하고 지냈다”고 말했다.
평안북도 큰 지주 가문 출신인 김 회장은 북한에 김일성 정권이 들어서면서 친일파로 간주되어 집안이 숙청되었다. 당시 20세 나이인 그는 초산 근처에 주둔한 소련군에게 사제폭탄을 투척하고 이남으로 내려왔다.
그 후 서북청년단에 들어가 행동대원으로 남로당과 투쟁했다. 공산당을 척결하기 위해 육사 7기생으로 1948년 소위에 임관되어 6.25 전쟁 시 육군대위로 말 11필을 이끌고 말에 올라 평양에 입성했다.
김 회장은 “공산당은 싫어하지만 개인은 싫어하지 않는다.”며 “조재길 시장의 중단 없는 전진을 기대한다”며 격려했다.


중국 커뮤니티에 영향

이날의 주인공 조재길 시장은 감사 인사를 통해 모든 여건이 부족한 1세인 그가 왜 미국 정치에 올-인 한 꿈을 소개해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그가 세리토스 시의원에 출마할 때, 사람들은 ‘어떻게 조재길이 시의원에 나갈 수가 있는가’라며 반신반의했다고 한다. 자녀들도 가족회의에서 “아빠 그 영어 실력으로 시의원을 어떻게 해”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자녀들은 또 “아빠는 시청에도 가보지 않았잖아”라고 타박을 하기도 했다.
당시를 회고하며 조 시장은 “당시 나는 시의원이 무엇을 하는지 정확히 몰랐다”면서 “회의를 진행하는데 나오는 ‘동의’(Motion)나 ‘제청’(Second)이란 단어도 모를 때였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미국정치에 뛰어든 것은 일종의 계시였다”고 강조했다. 2001년 운영하던 회사를 정리하고 집에서 쉬면서 우연히 케이블TV를 보다가 세리토스 시의회 중계 장면을 본 것이 계기가 됐다는 얘기다.
그는 “한인이 가장 많이 산다는 세리토스 시의원의 발언에도 놀랐지만 방청석에 한인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에도 놀랐다”면서 “이를 보면서 그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세를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 세리토스 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시에서 하는 행사에도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그가 LA타임스를 보면서 2000년 들어서 중국계의 정치력 신장을 다룬 2페이지 기사에서 충격을 받았다. 중국커뮤니티는 1993년부터 CAUSE(Chinese American United for Self Empowerment,중국계미국인정치력신장연합)라는 조직체를 구성했는데, 그 단체 이사들이 10분간 전화모금 캠페인으로 30만 달러를 모금할 정도의 능력을 발휘해 오늘의 중국계 미국정치인의 신장 기반을 마련했다는 기사였다.
오늘날 LA 카운티에 중국계 선출직 정치인으로 시장이나 시의원이 30여명을 포함해, 교육위원 주하원까지 합하면 60여명이나 되지만 한인은 한 명도 없다. 그는 이 땅의 주인이 되기 위해 한인사회도 CAUSE처럼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2004년 한인정치력향상위원회를 출발점으로 생각해 다음 재선운동을 함께 하자는 의미로 오늘의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강조했다.
조 시장은 이날 부인 권숙혜 여사를 직접소개하면서 “내가 이 자리에 있게 된 가장 큰 공은 아내에게 드린다”고 말했다. 2005년 두 번째 도전한 선거에서 그는 당선을 믿었다. 하지만 결과에서 200여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는 “선거 다음 날 그 화려했던 자리는 오간데 없고 황량한 벌판처럼 나는 실의에 빠져 부인이 앞으로 10일을 앓을 것인지 한 달을 아플 것인지만 걱정됐다”면서 “그런데 한 시간 후에 나타난 아내는 ‘다음 번 선거에 쓰기 위해서라도 런 사인판(선거홍보 팻말)을 거두어야 한다’면서 돌아다니기 시작해 일주일 만에 거두어 들였다. 그런 내조가 있었기에 오늘의 조재길 시장은 존재했다”고 힘차게 말하자 좌중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서 그는 “과거 김영삼 대통령 방미시 호텔 앞에서 나는 반대데모를 했고, 김봉건 회장은 환영 데모를 주도했다.”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원을 그렸다. 하지만 김 회장은 나를 보살펴 주었다”고 말했다.
그는 “내가 자서전을 쓴다고 하니 자녀들이 먼저 ‘자서전 쓸 때가 아니다’고 했다”면서 “이만 하면 성공했다고 해서가 아니라 쓸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누구보다 굴곡이 많고 오해와 한인사회에서 논란이 많았던 사람으로 지나 온 삶의 오해와 진실을 한 분 한 분 만나서 설명하기에 힘들다”면서 그래서 책을 쓰게 된 동기도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더 큰 꿈’을 한인 사회와 공유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했다.
그의 자서전 ‘소명’이란 책 제목은 출판사의 편집자가 지은 제목이라며 편집자는 그의 원고를 읽고 ‘선생님은 시대가 요구한 것을 따라 갔을 뿐’이라고 한 것처럼 그의 뜻과는 정반대로 갈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소명’ Calling 은 나의 소명(My Calling)이지만 이제는 ‘우리의 소명(Our Calling) 이 돼야 한다. 그리고는 “20년 후에 정말로 자서전을 쓸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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