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연구> 한미은행 33년 역사의 산증인 안이준 이사의 특별한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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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은행 안이준 이사가 지난 12월 31일을 끝으로 33년간의 이사직을 내려놓고 75세로 조용하지만 화려한 은퇴식을 가졌다. 그의 은퇴는 단순한 의미의 은퇴가 아니라 우리 이민사회 역사의 한 단편이라는 점에서 시사하는 의미가 적지 않다.
지난 1982년 설립 당시 이사로 참여 세 번에 걸쳐 이사장을 지낸 한미은행 산증인의 퇴장은 우리 한인이민사회의 역사와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 ‘국제시장’ 주인공의 한 사람인 그는 서독광부에서 미국에 건너와 50년 가까이 살면서 온갖 인생의 여정과 파란만장한 인생의 수난기를 겪으며 살았다. 최초의 한인은행인 한미은행 설립자 중 유일하게 은퇴식을 가진 인간 안이준은 “지금까지는 영어도 모르고 미국문화도 이해하지 못한 1세들이 단순히 꿈과 열정하나로 출발했지만 지금부터는 역량 있는 후세들이 커뮤니티 은행을 넘어서 메인스트림으로 가야한다’고 당부했다.
자본금 500만불로 시작해 40억불의 중대형은행 만들기까지 그가 33년 동안 이룬 발자취와 한인은행이 나아가야할 방향과 좌표, 그리고 그의 역경과 고난의 삶과 인생여정을 종합 정리해 보았다.
성 진(취재부기자)

한미은행은 미주 한인사회에서 아주 독특한 금융기업이다. 한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제2의 이민 행렬이 시작된 1970년대 당시 LA코리아타운에 자리 잡은 한인업주들은 소규모 자본이 너무나도 필요했는데 미국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 파견 나온 한국계 은행들도 한인들의 예금은 환영 하지 만, 소액 대출조차 인색했던 것이 관행이었다.
이 같은 환경에서 한인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동포 은행을 만들어야 하는 공감대가 일어났다.  소수민족 이민자들의 자기 은행을 갖고 경제적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면 전체 사회에서 한인의 위상 역시 제고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태어난 은행이 한미은행이다.

먼저 온 이민사업가들이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면서 비슷한 처지의 후배 이민들도 도우려는 마음으로 설립했으며, 같은 이민자인 직원들이, 같은 이민자인 고객들과 함께 성장하는 은행이라는 점이다. 이 같은 한미은행에서 안이준 전 이사장은 “은행의 창립자”이며 “1등 은행”으로 키운 장본인이며, “33년을 키워준 버팀목”이였다. 이 같은 사실을 은행과 관계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한인들은 모르고 있다. 안 전 이사장은 실상 개척자의 삶을 살아왔으나, 몸에 배어있는 겸손함 때문에 조용한 면모가 더 느끼게 한다. 한미은행은 많은 한인들이 “1위 은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BBCN뱅크가 과거 나라은행과 중앙은행이 합병하여 생겨나서 외형적으로 1위에 자리에 있으나, 한미은행은 1996년 역동적인 주가 상승으로 한인사회의 전폭적인 관심 속에 한인은행들 중에서 단연 1위의 지위로 올라서면서 “코리아타운의 1등 은행”이란 이미지를 뿌리 깊게 심어 주었다. 여기에 안 전 이사장의 집념과 성취욕이 있었다.

 

 ▲ 한미를 최고의 지위로 만든 안이준 전 이사장(왼편)과 민수봉 전 행장

독일광부에서 월스트리트까지

 

 

한미은행(HAFC)은 지난 2012년 12월 17일 세계경제시장의 총본산이라 할 수 있는 뉴욕 증권 거래소 나스닥 클로징 벨 타종 행사에 초대돼 한미은행의 존재감을 나타내며 은행 창립 30주년 기념행사의 대미를 장식했다. 당시 행사에는 안이준 전 이사장, 노광길 당시 이사장, 유재승 행장을 포함해 전체 이사진들이 함께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날의 타종 행사는 지난 2001년 1월 29일 한미은행이 나스닥에 상장된 이래로 처음이다.
이날 안이준 전 이사장은 클로징 벨을 들으며 47년 전 독일 광산에서 석탄을 캐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았다. “독일 광산에서 월 스트리트까지의 내 인생은 헛되지 않았다”고 중얼 거렸다. 인생의 분위기는 선택하기 나름에 달려 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이야기의 알맹이를 결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지난해(2015)말, 한미은행 이사회에서 33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뒤로 하고 은퇴한 안이준(76) 전 이사장은 “자식 키우듯 한미를 사랑 해왔는데…섭섭한 마음이다”라면서 “그 어려웠던 지난  2008년의 위기를 슬기롭게 넘기고 이제 단단한 은행으로 거듭 태어났다”고 말하며 ‘이제는 메인스트림으로 가야할 때다’라며 오늘의 한미 은행을 평가 했다.
이제 시대 변화에 따라 젊고 능력 있는 새로운 이사들이 영입되어 코리아타운을 잘 알고 있는 이사 들이 경영진들과도 호흡이 잘 맞아 ‘마치 은행 분위기가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오듯 하다’고 말하는 안 전 이사장은 “그래서 지난해를 끝으로 나의 은퇴시기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속담에 “서당개 3년이면….”이란 말이 있다면서 자신은 “서당개 33년….” 이기에 한미은행에 대하여는 ‘눈 감고도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그가 이사회에 있는 33년 동안 9명의 행장들이 거쳐갔다. 그 행장들이 남겨 준 장,단점을 몸소 느꼈다. 은퇴라는 표현은 Tibbitts(1954)가 미국의 사회학 학술지에 ‘은퇴는 우리 사회에 상대적으로 새로운 현상 이다’라는 언급을 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은퇴의 개념은 이렇게 다양하지만 생애설계 차원에서 은퇴란 현역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창조하는 것으로 보아야 바람직할 것이다.
안이준 한미은행 전 이사장의 은퇴는 아주 유별나며 독특하고 의미 있는 행동이다. 특히 한인은행권의 대표은행의 하나인 한미은행에서 창립자로 동참하여 33년이란 장구한 시간을 ‘한 우물’을 판 것이고, 실질적으로 자녀를 키우듯이 은행을 키웠으며, 이제 33살의 뿌리가 단단한 은행이 되었기에 그림자로 남겠다는 것이다. 한인 커뮤니티가 필요로 할 때 나섰다가, 떠날 때를 잘 준비했던 것이다. 위대한 기업인의 표상이다.

광부시절 몸에 밴 근검 절약정신

지난해 극장가에서 대히트를 친 작품 중에 ‘국제시장’이 있다. 한국 선진화의 ‘이름없는 영웅들’을 그린 작품인데 독일광부 이야기가 나온다.
안이준 전 이사장도 바로 독일광부 출신이다. 그는 ‘국제시장’을 한번 보고 울고, 두 번 보고 또 눈물을 흘렸다. 자신의 옛 모습을 스크린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자식들에게도 영화 ‘국제시장’을 보라고 했다. 자식들도 보고 울었다고 했다.
안 전 이사장에게 광부 이력서는 단순한 경력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인생철학을 새롭게 터득한 ‘광부인생’이었다. 한국에서 남자들이면 다 해야 하는 군복무를 마칠 때가 26세였다. 실제로 사회에 첫 출발하는 제대하는 날 그는 ‘서독광부’ 신청에 나섰다. 그 후 난생 처음 외국 땅인 독일의 ‘아켄 광산’에서 2년6개월 동안의 광부 생활이 그의 인생을 확 바꾸어 버렸다.
그는 “광부생활 2년 6개월 동안 내 인생철학을 새로 쓰게됐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생활하면서 독일 국민의 근면성, 성실, 단결심, 일하는 모습, 노는 모습, 검소한 생활 등등을 체험하면서 자신의 인생관을 새롭게 설정했다.
그는 “독일인들은 초등학교 때  지닌 가방을 대학까지 지닐 정도였다”면서 “자전거는 새 것이 없었고, 음식 먹을 때도 남기지 않았는데 사과를 먹더라도 꼭지서부터 전체를 알뜰하게 먹는 것을 보고 느낀바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또 그는 “주말에 밤늦게까지 놀고 나면 독일인들과 한국인들이 놀던 자리가 틀리다”면서 “독일인들이 피운 담배꽁초는 필터를 끝까지 피웠는데, 한인들은 그렇지 못했다”며 웃음을 지었다.

하루는 독일 가정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이방에서 다른 방으로 자리를 옮길 때에 지나간 방의 불을 끄는 것을 보고 그 절약성에 놀랐다고 했다. 한국과는 달리 청소년들의 5%만이 대학에 진학을 한다며 각자가 필요에 의해 진로를 결정한다는 사실에 새로운 면을 배웠다. 사회생활에서 조직원들이 리더의 말을 잘 따른다는 사실도 배웠다. 독일 군대는 ‘예스’만 있지, ‘왜’가 없다는 규율도 배웠다.
독일 생활에서 안 전 이사장은 ‘근면’(fleißig arbeiten), ‘절약’(sparen), ‘청결’(sauber machen), 그리고 ‘정리정돈’(Alles in Ordnung bringen) 등이 그의 앞으로의 생활수칙이 되었다.
무엇보다 일을 위해 집념과 끈기를 지녀 성취해야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의리를 중요시하고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이 내 몸에 뱄다”면서  “내 일생 모토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육체로 석탄을 캐기도 했지만, 머리로는 앞날을 위한 인생철학을 담았던 것이다.

큰 꿈을 안고 68년 미국 이민 생활시작

안 전 이사장은 독일광부 생활을 마치고 큰 꿈을 지니고 1968년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왔다.
당시 미국은 65년 새 이민법 개정으로 한인들도 ‘제2의 이민’ 대열을 이루면서 미국으로 건너와 ‘코리아타운’ 건설에 나설 때였다.
그는 처음 청소업으로 미국생활을 시작하다 우연한 계기에 봉제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LA 다운타운 봉제업계는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었다. 어느날 봉제공장에 다니는 친구 부인을 픽업해주다 처음으로 봉제공장을 2-3분 정도 구경했는데, “나도 해보자” 그것이 전부였다.
다운타운 브로드웨이 8가에 자리 잡은 12층 건물에 비어있는 5층을 렌트하여 공장으로 개조했다.
대리석으로 된 건물 5층을 부수고, 리모델링하여 전기시설을 완비해 미싱 25대 들여놓고 봉제 공장을 시작했다. 그가 LA한인 중에서 2-3번째의 봉제공장을 차렸다.

처음 주문을 바지 600장을 계약했는데 6개월이나 걸려 주문을 완성시켰다. 우여곡절이 많았다. 작업한 500장을 리턴 당해 다시 만들고, 또 리턴 당하고 다시 만들어 주고 하여 500장에서 400장으로 다시 300장으로 하여 이런 식으로 총 90%를 납품하고 10%는 원가 변상하는 등으로 결과적으로 인건비도 안 나왔다. 남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신용을 얻었다. 그리고 봉제업을 배웠다.
그 후 주문처도 커지고 덩달아 그의 봉제 공장도 함께 커졌다. 신용이 그를 키워주었다.
그의 공장은 훈련소나 다름없었다. 당시 봉제업계가 유대인 장악에서 한인으로 옮겨지면서 많은 한인들이 봉제업계에 진출했다. 자연히 그의 공장에서 일했던 매니저급들이 독립해서 나가 공장을 차렸다.
당시 노동법에 대해서 무뢰한이었다. 노동법규에 깜깜했고, 단속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4-5년이 지나면서 주노동청 사무실이 다운타운에 설치되면서 단속이란 것이 생겼다. 그러면서 법규 위반으로 벌금을 받는 업소들이 늘어만 갔다.

그래서 자구책이며 구심체 역할을 위해 봉제협회를 만들었다. 안 전 이사장은 초대 이사장에서 3대 이사장까지 맡았다. 회장은 변창환 씨였다. 협회 회원 업소들은 봉제협회가 실질적으로 노동법규 계몽사업은 물론 업소들의 애로사항과 문제점을 해결하는 단체였기에 회비를 잘 납부 했다.
당시 봉제협회는 회원 업소 수도 500여개로 LA한인사회에서 가장 막강하고 건실하고 경제적으로도 가장 부강한 단체가 되었다. 이같은 봉제업소 운영자들이나 근로자들은 자신들이 벌은 돈을 코리아타운에 가서 소비했다. 코리아타운 경제의 30% 정도가 한인봉제업소들이 뿌린 액수 덕분이었다. 자연히 다운타운 봉제업계가 코리아타운의 ‘젖줄’이 되었다.
이 같은 ‘젖줄’을 태동시키는데 안 전 이사장이 솔선수범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코리아타운의 한인은행들을 건설하는데 신화적인 이야기가 있다. 바로 다운타운 한인 봉제업계가 있었기에 한인은행들이 생겨날 수 있는 자본의 터전이 될 수 있었다.


한미은행 태동과 ‘나우회’의 역활

1970년대 당시 LA코리아타운에는 ‘나우회’라는 비즈니스를 운영하던 한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매월 1회 모임에 연사를 초청해 세상 이야기를 나눈 곤 했다. 회원들은 회비를 착실하게 적립해 기금을 만들었는데, 이 기금을 적립해 지금의 조선갈비 건물과 땅을 구입했으며 나중에 매각하여 회원들이 각각 10만불 정도씩 배당을 받았다.
당시 ‘나우회’는 코리아타운에서 경제력을 키운 한인 비즈니스맨들이 똘똘 뭉친 건실한 단체였다.
‘나우회’ 소속인 안 전 이사장은 모임 때 동포은행의 설립이 화제가 된 적이 많았다. 당시 41세인 안 전 이사장은 한인타운도 차츰 커져가고 있어 차제에 은행 설립의 꿈을 지니게 됐다. 이런 참에 하루는 “한인사회 은행의 대부”라고 불리는 정원훈(작고) 행장이 찾아와 “영감! 나와 함께 은행 만들어 봅시다”라고 제의했다. 당시로서는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정 행장을 하늘처럼 생각했던 때였다.
원래 정 행장은 국내에서 한국은행 조사부장, 국제부장을 지내고 1967년에 LA한국외환은행 설립 작업을 성공시키고, 나중 한국정부가 출자한 가주한국외환은행의 초대 행장을 맡았다.  정 행장은 은행 경영에서 한인 비즈니스들을 상대하면서 해마다 2배씩 성장시켜 미국은행 관계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나중 가주외환은행의 자본금을 1000만 달러를 넘어섰을 때 행장직을 사임하고, 순수 동포은행의 설립을 구상했다.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임을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았다. 그는 비즈니스로 성공 한 순수 동포 1세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는 ‘코리아타운의 젖줄’을 만든 사람을 발견했던 것이다.
정 행장은 안 전 이사장이 운영하던 봉제공장으로 찾아와 왜 은행을 설립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순수 동포은행을 만들면 성공할 뿐 아니라 동포사회 발전에도 원동력이 된다고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다.
평소 정 행장을 존경했으며, 한편으로는 한인 비즈니스 업소주인들의 목소리를 들어오던 안 전 이사장장에게는 정 행장의 설명이 바로 답이 되었다.
당시 LA 코리아타운에서 한인들은 주로 하는 비즈니스는 주유소, 햄버거샵, 식당, 세탁소, 리커 스토어 등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노 크레딧’ ‘노 텍스 기록’ 등이라 미국은행이건 한국계 은행이건 융자를 해주지 못했다. 한국에서 진출한 가주외환은행 있었으나 역시 융자는 어려웠다.
안 전 이사장은 “은행가서 돈 빌리자는 이야기를 못 했다는 것이 코리아타운 비즈니스 업주들의 한결같은 푸념 이었다”면서 “당시 정 행장의 은행 설립 권유는 나에게 또 다른 희망 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나우회’ 회원인 안응균 전 이사장(작고)에게도 은행 설립을 이야기하고 동의를 받아 냈다. 악기 사업으로 성공한 안 전 이사장은 “나만 해도 당시 가주한국외환은행에서 융자 받기가 어려웠다”면서 “순수 우리 동포 은행이 생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생전에 말하곤 했다.

한편 역시 나우회 소속이고 미육군 제대 후 뱅크 오브 아메리카(BofA)와 유나이티드 캘리포니아 뱅크 등에서 은행 경험을 지닌 부동산 업주이며 나중 조지 최 한미은행의 초대 이사장의 동참을 끌어냈다. 애초 조지 최 초대 이사장도 정 행장으로부터 은행 설립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했다.
그러다가 ‘나우회’에 나가서 은행 이야기가 나오면서 안 전 이사장과 안응균 전 이사장이 은행을 만든다고 하는 바람에 기꺼이 합세했다.
여기에 ‘나우회’ 회원들도 ‘당신들이 은행을 설립하겠다면 우리도 힘을 보태겠다’고 했다. 안 전 이사장의 비즈니스 성공과 그의 신용이 회원들을 움직였던 것이다. 안 전 이사장의 신용이 어느정도 인가를 잘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신용 성실 하나로 살아 온 불굴의 사나이

과거 봉제협회 회장을 지내고 현재 봉제업계 발전을 연구하는 박철웅 목사(파커 비즈니스 컨설팅 대표)는 “코리아타운 초창기에 안 전 이사장이 60유닛 콘도미니엄을 처음 개발 건축했는데, 분양이 어려웠다. 그런데 안 전 이사장이 ‘내 콘도에 투자하기를 바란다’고 하자 봉제협회 회원들이 너도 나도 분양에 뛰어 들어 삽시간에 분양이 이뤄졌다”면서 “콘도 분양을 함부로 투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그 정도로 당시 안 전 이사장의 신용은 100%이고 그의 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박철웅 목사는 “안 전 이사장은 ‘한 눈 팔지 않는’ 건실한 비즈니스맨이었으며, 집념과 의리의 사나이로 통했다”면서 “봉제협회를 이끌어가면서 모범적인 자세와 성취욕으로 단체를 단합시키는데 친화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특히 박 목사는 “한미은행 주식이 20%에서 2% 이하로 곤두박질 쳤을 때 안 전 이사장의 주식도 2천만 달러에서 2백만 달러로 엄청난 손실을 당했다”면서 “웬만한 사람이면 손을 털고 한미은행을 떠났겠지만 그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한미은행을 지켰다”고 밝혔다. 이어 박 목사는 “이 같은 안 전 이사장이 있었기에 한미은행의 전통이 이어 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1981년에 한미은행 설립 승인에 드디어 1982년 미주한인 이민사상 최초로 순수 동포 1세들이 만든 한미은행이 LA 코리아타운에서 태어났다. 당시 캘리포니아 은행국은 한미은행 창립 준비 위원 10명 중에서 5명만을 승인했는데, 안이준, 안응균, 조지 최, 정원훈, 안성주 씨 등이었다.
이를 보더라도 안이준 전 이사장이 한미은행의 창업 공신임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순수 동포자본 이민1세가 만든 한미은행이 태어나자 비즈니스 업주들이 다투어 은행으로 들어 왔다. 당시 제1호 고객으로 개점도 하기전인 82년 12월1일에 구좌를 연 폴 감씨(작고)와부인 정숙 씨는 당시 봉제업을 하고 있었다. 감 씨는 안 전 이사장이 은행을 설립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에서 체킹과 세이빙스 구좌를 열었다. 감 씨 집안은 지금까지도 그 구좌를 지니고 있다.
감 씨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한미은행을 찾아준 한인 고객들이 믿고 맡긴 돈, 한미가 고객들을 믿고 빌려준 돈, 그렇게 믿어 주는 것에 감격해 반드시 되갚은 돈들이 오가며 차곡차곡 쌓여서 한미은행의 역사는 이렇게 다져갔다.

한미은행의 역사창조 신화 이룩

한미은행의 안 전 이사장을 포함한 1세 이사들은 타운에서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잘 안다. 함께 비즈니스를 해온 같은 1세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처지를 보고 살아 왔다. 그래서 한미은행은 소규모 비즈니스 업주들에게 5만불, 10만불을 빌려주었다. 그 사람들이 한미은행의 가족이 되었다.
은행의 융자를 받기 위해서 예금 대출 재무재표 등이 증거 서류이지만 한미은행은 서류보다는  지역사회에서의 신용도를 더 중요시 했다. 서류자체가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영업 실태에 대한 비공식 자료가 요긴하게 사용될 때였다. 한미은행은 창업 목적에서 밝힌 것처럼 ‘동포를 위한 은행 새로운 은행’으로서 다른 은행들에서 외면 받던 것을 한미은행이 해결했다.
안 전 이사장은 “우리가 함께 타운에서 살아왔기에 그들의 기록 서류보다는 그들의 신용을 알 수 있기에 돈을 빌려주는데 노력했다”고 말했다.
한미은행의 제2호 지점이 다운타운이었다. 당시 KBS TV에서 홍보할 때 그 지역 봉제업소 주인들이 서로가 나서서 은행을 선전해 주었다.
힌미은행이 진정 동포들의 은행이란 실감은 4.29 폭동 때였다. 지난 1992년 4월 29일 LA 대도시에서 분출한 폭동으로 한인사회는 미주이민 역사상 최대의 수난을 당했다. 2천여개나 되는 많은 한인 비즈니스가 폭도들에 의해 잿더미로 무너져버렸다.

당시 안 전 이사장을 포함해 벤 홍 행장은 말로만 듣던 폭동을 목격하고 보니 잠이 안 올 정도로 생각이 많았다. 안 전 이사장은 당시를 회고하면서 “그 분들이 어떻게 일군 비즈니스인데…. 그 분들이 망연자실 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을 잘 알고 있었다”면서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밴 홍 행장은 직접 80여개 우리 은행 고객업소를 돌며 위로를 하는 한편 무언가 지원해야 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한미 이사회는 다른 은행과는 달리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속담처럼 10만 달러 무담보 신용대출을 즉각 결행했다. 당시 한미은행의 도움을 받았던 고객들은 그 고마움을 잊지 못했다.
한미은행은 창업 이후 기복을 오가다가 제4대 이사장으로 취임한 안 전 이사장의 세대에서 크나큰 전기를 만난다.
당시 한인사회는 9개 은행이 난립양상을 보이고 있어 한인은행가에서 제2의 도약을 위해 당위로 여겨져 온 인수합병을 누가 먼저 하느냐가 숙제였다. 그 숙제를 한미은행이 성취했고, 그 결과 한인은행 중 한미은행이 선두주자가 되겠다는 이사회의 오랜 꿈도 이뤄졌다. 바로 이 꿈은 안 전 이사장의 리더십에서 나왔다.

한인은행 최초로 글로벌 은행 인수 합병

지난 1996년 말에 합병 대상 은행은 나라은행과 무산된 퍼스트 글로벌 은행이었다. 안 전 이사장 이 합병 교섭 책임자로 나섰다. 양측 모두에게 실리가 돌아가는 만족스런 결합을 위해 안 전 이사장은 특유의 친화력과 집념 그리고 상대방에게 신뢰를 주는 신용을 바탕으로 합병교섭을 진두지휘 했다.
1998년 7월 28일자로 인수합병을 승인 받기에 이르렀다. 인수합병 하는 복잡한 과정들을 처리 하면서 한미은행 이사회는 귀중한 배움의 기회를 가지게 됐다. 그런 심도 있는 지식과 다양한 경험에 안 전 이사장을 정점으로 하는 남다른 팀워크와 기강이 합해서 한미은행의 미래는 다져졌다.
이에 대하여 안 전 이사장은 “요즘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정도의 합병 이야기꺼리다” 면서 “요즈음처럼 컨설팅 컴퍼니에게 맡기면 되는데…”라고 운을 떼면서 “당시 나와 상대방인 퍼스트 글로벌 뱅크의 정호섭 이사장과 만나 합의하고 CFO등 실무진이 논의하고 다시 이사장끼리 만나 타결 하는 등 모두 19차례나 오갔다”고 말했다.

퍼스트 글로벌 은행을 성공적으로 인수하면서 한미은행은 당시 최대인 가주외환은행을 능가하는 발판을 굳혔다.
퍼스트 글로벌 은행과의 인수합병을 성공시킨 안 전 이사장은 1997년 12월 5일 다운타운 옴니 호텔에서 열린 한미은행 개업 15주년 행사에 ‘한인 커뮤니티 최대 은행’이란 선물을 안기게 했다. 한미은행은 2004년에 PUB를 인수합병하면서 명실공히 미주한인사회 1위 은행으로 우뚝 서게 됐다.
한미은행의 33년의 역사 속에는 “한인금융사관학교”라는 별명이 나돌 정도로 수많은 뱅커들이 길러냈다. 오늘날 대부분 한인은행들의 행장들은 한미은행 출신이다.
한미은행 전 직원을 상대로 인기투표를 한다면 당연히 안 전 이사장이다. 본보는 안 전 이사장에게 한미은행의 전직 이사장으로서 올해 한인금융권의 최대 이슈로 등장할 BBCN과 윌셔은행 간의 합병논의에 대한 견해를 요청했다.

안 전 이사장은 “아주 잘 된 일이다”면서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으로 생각했다”면서 “앞으로도 한인은행권에서 합병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는 현실적으로 한정된 구역에서 은행이 너무 많다”면서 “그래서 서로 경쟁도 자연히 치열하다”고 지적했다. 또 그는 “이 같은 환경에서 서로의 경쟁자들이 서로 소속 은행만 다를 뿐 서로가 잘 아는 친구들끼리라는 점이다”면서 “이런 실정이니 서로의 마음이 어떻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지난 과거 시절에 정원훈 행장이 다운타운 업소를 찾아 올 때를 기억하면서 안 전 이사장은 “그때 우리들은 정 행장이 ‘우리를 알아준다’고 주위에 자랑했었다”고 했는데 “요즈음 비즈니스를 새로 오픈하면 여러 은행 간부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오히려 피곤하다는 푸념이 나 올 정도로 은행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과도한 현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은행 합병보다 중요한 것은 참신한 도덕성

특히 합병 문제에 안 전 이사장이 염려하는 점은 “합병도 어렵지만 합병 이후가 더 어렵다”면서 “합병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너무 무리수를 두지 말고 2-3년 내 모든 것을 안정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합병으로 인해 자연 구조조정에 따른 감원 조치 이전에 새로운 상품개발에 주력하여 감원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로 생각하고 있다. 이어 그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소위 “팽” 시키는 조치에 대해서도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그는 합병에서 ‘시너지 효과’라는 말을 너무 사용하면 안 된다고 했다. 서로가 합병을 정식으로 했더라도 컨설팅 회사의 조언을 모두 무조건 따라 실시하는 것도 신중해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이사회가 법적 처리도 중요하지만 법 이전의 도의적인 문제와 실질적인 운용문제와 경험도 중요하다며 과거 한미은행의 경험을 떠 올렸다.

한미은행은 2004년 PUB은행과 합병 후 구조조정을 위한 사후 처리 2-3년 기간에 갑자기 선장을 갈아 치워 ‘경제학 박사’를 영입했다. 신임 ‘스타 행장’은 “은행의 CEO는 75% 시간을 아웃사이더로 보내야 한다”라는 이론으로 이사회를 당황케 했다. 결국 그 CEO는 6년 임기도  채우지 못하고 사퇴 했으며 그 와중에 경제 파동까지 닥쳤다.
당시 컨설팅 회사의 보고서만 믿고 ‘스타 행장’으로서의 화려한 인지도를 지닌 ‘박사 행장’을  영입 했지만 은행의 이미지 제고, 실적 인센티브제 도입 등 체질 개선을 위한 시도 등 긍정적 성과가 있었다. 하지만, 부임 후 1년간 영업실적 부진, 인사행정에서의 시행착오 등에 따른 경영진 조직 안정 실패 등으로 행장으로서의 리더십이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들이 나왔다.
특히 윌셔은행과 중앙은행 등 경쟁 은행들이 한 해 25∼30%의 성장세를 보이는 동안 ‘박사 행장’의 한미은행은 성장률이 절반에도 못 미치는 10%에 머물렀다.
한미은행이 창립 후 20여 년 동안 축적한 이사회의 경륜을 제치고 컨설팅 회사의 보고서만 과신하고 ‘스타 행장’을 영입했으나 결국 중도하차로 실패한 것을 좋은 경험으로 삼아야 했다.
안 전 이사장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의 자라는 2-3세들에게 모국에 대한 교육을 한층 강화하여 한국을 잊지 말도록 했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 한인사회에는 지금 수많은 단체들이 있는데 가능하면 유사단체들이 통합해  한인회를 구심점으로 하여 유기적인 네트워크 시스템으로 나아간다면 더욱 커뮤니티가 성장할 것이다.
올해는 미국의 대선도 있는 중요한 해로 주류사회로 진출하는 한인 정치인들을 많이 도와 미주 한인들의 권익을 도모하고 미국사회 발전을 위한 정치력 신장에 힘을 모으기를 바란다.
코리아타운에는 유사업종들이 서로 출혈경쟁을 하는 것을 보며 마음이 아프다. 서로 ‘윈-윈’하는 비즈니스 풍토를 만들고, 무엇보다 상도의를 중시하는 풍토를 만들어 건전한 커뮤니티 경제 활성화를 바란다.>고 끝맺으며 유달리 술을 즐기는 인간 안이준은 한 잔의 소주를 삼키며 남다른 감회를 달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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