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타계한 판소리 대가 박동진 명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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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박동진(朴東鎭)명창은 판소리의 예술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면서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최고 인기의 소리꾼이었다.

68년 9월 ‘흥보가’로 국내 최초로 판소리 완창(完唱)무대에 도전한 데 이어 이듬해부터 ‘적벽가’ 등 나머지 4편도 차례로 완창해 다섯 바탕 완창 기록을 수립했다. 요즘엔 꼬마 명창들까지 완창 도전에 나서지만 당시엔 인기있는 대목만 불러 제끼던 토막 소리가 판치던 터라 판소리 완창은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졌다.

이날 공연은 무명 소리꾼에 불과했던 박옹의 소리 인생을 바꿔 놓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그때부터 판소리 꽤나 한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한번쯤 완창에 도전해야 명창 대접을 받게 됐다. 요즘엔 전주대사습놀이에 출전하려면 1회 이상 완창 발표회를 해야 한다.

92년 모 제약회사의 CF 광고에 출연해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는 유행어를 낳기도 한 고인은 판소리의 대중화에도 앞장선 인물로 꼽힌다. 박일훈 국립국악원 학예연구실장은 “고인은 귀명창(판소리 애호가)들이 부르는 곳이면 대공연장이든 사랑방이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의 품으로 달려가 판소리 한마당을 펼쳤다”며 “국립국악원 재직 시절엔 다른 곳에서 아무리 답례를 많이 준다 해도 만사를 제쳐 놓고 국악원 관련 행사부터 챙기는 등 공직자의 모범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박동진 판소리의 특징은 욕설과 음담패설까지 동원한 특유의 재담과 즉흥성에 있다. 최동현(군산대 국문과)교수는 “부를 때마다 사설이 바뀌어 제자들은 힘들지만 관객들은 무척 좋아한다”며 “목 풀기 위해 단가(短歌)를 부르는 대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가사를 지어 판소리로 불렀다”고 말했다.

“아, 그런디 요새 여자들은 말여. 아, 쓰까똔가 원 갓가튼가 그놈의 서양 치마를 딱 입었거던. 서양치마를 입고, 그 속치마 어트케 기냥 걸레같은 거 하나 입고, 요렇게 하고서는, 요기다가 꼭 요맨헌 것, 쬐간헌 것 딱 둘르고는 앉아서…한 십분만 앉었으면 요짝 다리가 저린깨, 요 놈이 차차차 내리와서 요렇게 된다 그 말여…”하는 식이다.

고인은 무대에서 욕 잘하기로 소문이 났었다. 특히 못생겼다든지 성격이 고약하다든지 하는 설명은 모두 고수(鼓手)같다고 떠넘겼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인간문화재라도 “이 쌔려 죽일 놈아, 북 좀 잘 쳐라”라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 “눈구녁을 쑥 뺄 놈이 대답은 잘 허는구나””소리만 잘 혀봐, 북이 저절로 쳐지지”라고 대화가 오갔다. 공연이 끝나고 고수와 입씨름을 벌이기도 예사였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박옹은 대전중학에 다닐 때 가출, 권번에서 기생들의 소리 선생을 하면서 국극단을 따라다니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고향집 뒷산 절터에 움막을 짓고 똥물을 마시면서 백일 독공(獨工)한 일화는 유명하다. 46세 때 비로소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취직’한 그는 자장면을 시켜 먹으면서 밤낮 없이 소리 공부에 전념한 연습 벌레였다.70년대초에는 ‘이순신 장군”예수전’ 등 창작 판소리를 직접 지어 불렀다.

박옹이 무대에서 가장 즐겨 불렀던 판소리는 ‘변강쇠 타령’이었다. 기업 연수나 특강에선 최고 인기였다. 초청받아 가면 옛날식으로 “어느 소리할까요””뭐하면 좋겄소”라고 물어 보았기 때문이다. 질펀하고 화끈한 내용에 두 눈이 번쩍 뜨이고 졸음이 싹 달아났다. 하지만 그는 남성적 기백과 혼이 살아 있는 ‘적벽가’를 판소리 중 백미(白眉)로 꼽았다.

5년전 고향땅 공주에 판소리 전수관을 지어 놓고 후학들을 지도하던 고인은 틈이 나면 인근 저수지에서 낚시를 즐겼다. 2000년 6월부터 중앙일보 연재물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에 ‘내 인생 소리에 묻고’라는 제목으로 회고담을 싣기도 했다. 국악방송(서울·경기 FM 99.1㎒ 전북 남원 FM 95.9㎒)은 오는 21일까지 매일 오후 7시부터 30분간 고인의 육성 녹음과 노래를 곁들인 다큐 프로를 방송한다.

이장직 음악전문기자
출처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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