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막난 발목… 가마솥에 삶고… “요즘 스크린은 피범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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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 하나. 펄펄 끓는 가마솥을 향해 거꾸로 매달린 사내 한 명이 슬로 모션으로 추락한다. 발목에는 꼼짝할 수 없도록 동아줄이 친친 감겨 있다. 끓는 물이 머리털, 눈, 코, 입을 차례로 ‘접수’한다. 버둥거리는 육체. 이제는 발목 동아줄까지 잠겨버렸다. 요동치던 끓는 물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스릴러 ‘혈의 누’·18세)

장면 둘. 대형 쇼윈도 유리창이 깨져 추락한다. 날선 유리의 이빨은 소름끼칠 정도로 날카롭다. 추락하는 유리가 겨냥한 곳은 분홍신을 신은 여인의 발. 유리의 이빨은 정확하게 그 발을 베어물었다. 토막난 발목. 피가 흥건하다.(호러 ‘분홍신’·등급 미정)

장면 셋. 살을 에는 추위는 대원 모두를 동사(凍死) 직전까지 몰고 간다. 그중 한 명의 다리는 급기야 썩어버렸다. 의사도, 약도 없다. 가진 건 톱 하나. 마취약이 있을 리 없다. 절규와 함께 신체는 절단됐다. 카메라는 종아리에서 떨어져나온 다리를 클로즈업한다. (미스터리 ‘남극일기’·등급 미정)

한국 영화가 잔혹(殘酷)에 매혹(魅惑)당했다. 호러의 독점영역이라고 여겨지던 잔혹한 비주얼이 장르의 감옥을 뛰쳐나와 주류 상업 영화를 활보한다. 사지는 잘려나가고, 머리통은 나뒹군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잔혹 스릴러’라는 수사가 어색하지 않은 ‘혈의 누’에는 조선시대 다섯가지 형벌이 비주얼로 구현된다. 문자로만 상상해도 소름 돋는 살인의 방식들이 스크린에 구현됐을 때의 공포라니. 돌담에 머리를 부딪히면서 여러 조각으로 깨지는 순간(석형·石刑)이 고스란히 재현되고, 사지가 찢겨나가고 내장을 드러낸 몸통과 머리만 남은 육체(거열·車裂)가 눈을 부릅뜬다.

7월 개봉 예정인 김혜수 주연의 ‘분홍신’은 아예 ‘잔혹동화’라는 카피로 마케팅을 하고 있다. 안데르센의 동화 ‘신데렐라’의 잔혹 버전에서 힌트를 얻은 이 영화는 “욕망 때문에 스스로 발목을 자르게 되는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를 담는다. 또 잔혹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남극 탐험 미스터리 ‘남극일기’도 톱으로 다리를 써는 장면을 비주얼로 구현한다.

장도리로 이빨을 뽑고(올드보이·18세), 불에 달군 인두로 등짝을 지지며(실미도·15세), 총알이 신체를 관통하는(달콤한 인생·18세) 이미지는 이미 수백만 관객이 목격한 풍경이다. ‘비틀린 미의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자신의 영토를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영화나 연극에서 ‘잔혹의 역사’는 기요틴에 의해 머리가 굴러떨어지던 18세기 말의 프랑스 대혁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최근에는 자본의 지원을 바탕으로 한 특수효과의 진화가 그 기술적 바탕이 됐다. 실제로 ‘혈의 누’에 나오는 훼손된 시신들은 “한 구에 수천만원”(감독 김대승)짜리 창작물로, 현미경적인 리얼리티를 확보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 않을 따름이지, 영화 속에서는 얼마든지 죽음을 재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인 것이다. 또 영화적으로는 “시각적 쾌락을 보여주기 위한 감독의 욕망과 새로운 스펙터클에 대한 관객의 욕망이 만난 지점”(평론가 김동식)이기도 하다. 어쩌면 탄생 이후 100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해 온 영화가, 장르의 족쇄를 벗어 주류 영화 전반에서 시도하고 있는 미의식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적으로는 “잔혹한 이미지의 시각화를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적 이미지들을 돌파하려는 역설적 시도”(평론가 심영섭)이기도 하다. 관대해진 등급심의제도도 이제 상상하는 대부분의 것을 비주얼로 옮길 수 있는 자신감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잔혹’이 관객 대중의 보편적 지지를 얻을지 여부는 여전히 미지수다.

내러티브 전개상 필연적이라고 여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그 폭력적 이미지만을 과잉으로 소비하면서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는 경우도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 영화의 완성도와 그 이미지의 신선도가 관객의 환호와 혐오 여부를 결정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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