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 위해 무관인물들 물러나는것이 급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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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 광복절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동포들이 대한민국 건국 7주년 기념행사를 갖고 있다.

ⓒ2005 Sundayjournalusa

“동지회 분쟁은 ‘뿌리의식’이 없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LA 코리아타운의 개척자이며 올드타이머인 최희만 미주 한반도 평화협의회장이 최근 동지회 분쟁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유학생으로 1953년 도미해 대학졸업(1956) 후 일시 귀국해 약 4년 동안 국내생활을 한 후, LA로 와서 활동했으니 최 회장의 미주 이민생활도 반세기가 지났다. 그는 한인회와 상공회의소 등을 포함해 중요단체의 성장에 그의 손길이 안 간 곳이 없을 정도로 코리아타운의 산 역사의 증인이다. 최근 대한인 동지회 북미총회(Korean Dong-Ji Society of the United States)의 분쟁이 본보에 계속 보도된 것을 관심있게 지켜 보았다고 밝힌 최 회장은 “하루 빨리 동지회가 정상화가 되기를 동포사회와 함께 지켜 보겠다”고 말했다.  

제임스 최<취재부 기자>  [email protected]


















▲ 동지회를 창설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
내외가 1955년 방미 중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
관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왼편에서 3번째가 최
희만 회장. 두번째는 양유찬 주미대사.
  
ⓒ2005 Sundayjournalusa

최희만 회장은 한국에서부터 타고난 원만한 성품과 미국생활에서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한인사회의 여러 가지 이슈나 행사에서 그의 손길이 닿으면 분쟁이 없이 조화로운 결실을 가져왔다. 최 회장의 이런 품성은 한국기독교회사의 대표적 순교자인 선친 최태현 목사로부터의 영향과 반세기 전에 도미 유학으로 세계화로 나가는 개척자적인 노력의 산물이다.

최 회장은 “동지회가 정상화 되기 위해서는 관련 없는 사람들이 물러 나야 한다”면서 “동지회를 이끌고 나갈 사람들을 주위에서 도와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과거 누구보다도 동지회를 이끈 사람들과 인연이 많다. 최 회장은 1955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당시 미국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 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유학생 신분으로 만나 인연을 맺었다.

그 후 120년 전통의 퍼시픽 유니온 대학을 졸업 후 귀국해 이승만 박사가 신임하는 송헌영 목사를 위해 일하게 됐다. 이승만 박사의 요청으로 송헌영 목사가 옥인동 동지회 교회를 시무할 때 최 회장은 신도회장으로 적극 송 목사를 도왔다. 이 당시(1957년) 그는 경무대를 자유롭게 출입하면서 정계와 경제계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최 회장은 과거 동지회를 회상하면서 빛 바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50년이 지난 사진들은 한국 근대사에서 이민사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사진들이었다. 사진 하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초청으로 방미 시 주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당시 주영한 총영사)을 방문해 동포들을 격려할 때의 모습이고 또 한 장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동포사회가 1955년 8월 15일 광복절에 대한민국 건국 7주년 기념식을 개최한 장면 등이다.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해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송 목사와 최 회장은 LA에 이주했다. 


















▲ 56년 부터 송헌영 목사와 함께 대한인동지회를 이끌
었던 최희만 미주 한반도협의회회장이 당시 상황을  회
고 하고 있다
 
ⓒ2005 Sundayjournalusa

송 목사는 LA에서 대한인 동지회 북미총회를 이끌며, 한편으로는 ‘북미시보’를 발행하면서 한민족의 정체성과 동지회의 이념을 전파시켜 나가는데 헌신했다. ‘북미시보’(The Korean American Times)는 원래 LA 동지회에서 1943년 4월에 주간신문으로 창간한 간행물이었다. 송 목사는 동지회관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이 신문을 발행했다.

당시의 ‘북미시보’를 발행했던 인쇄기가 동지회관에 있었으나 최근 동지회 분쟁 와중에 이 역사적 유물도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이러한 송 목사의 활동을 지켜 본 증인이다.

지난해 5월 동지회장으로 추대됐다가 그 해 일부 인사들이 불법적인 총회로 구성된 모임에서 졸지에 회장직을 박탈당한 김(송)영옥 회장은 바로 송헌영 목사의 딸이다. 김영옥 회장은 부친 송헌영 목사가 LA 동지회를 이끌어 나갈 때부터 부친을 따라 동지회원으로 활동했다.

최희만 회장은 “오늘날 그나마 동지회가 명맥을 유지하고, 동지회관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동지회를 지킨 김영옥 회장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희만 회장은 한국교회사의 순교자로 추앙을 받는 최태현 목사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선친 최태현 목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한국 교회사에 기리 남는 순교 목회자였다. 일제 식민지 시절 최태현 목사는 각종파 연합회 고문으로 추대되면서 당시 종교 단체간에 대두된 어려운 시국 상항을 조화있게 이끌어 간 지도자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목회자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1943년 2월에 ‘천황 폐하 대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교회도 해산하라는 일본 경찰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계속되는 고문으로 순교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최태현 목사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지키기를 위해서는 어느 것에서도 굴복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고, 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를 남겼다. 부친으로부터 신앙을 배운 최희만 목사는 지난 1960년 LA에서 최초의 한인 안식일 교회를 세워 5년간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이후 커뮤니티 활동에서도 종파를 가리지 않고 선친의 가르침을 따라 사회활동에 솔선수범 해왔다.

한편 그는 지난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찾아왔을 때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의회를 구성해 해외동포로서 통일과업을 추진하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의 남북 통일관은 인내와 포용하는 자세가 밑거름이다. 부인 황선희 여사는 남가주 간호협회를 창설한 커뮤니티 봉사가로, 부부가 타운에서는 “잉꼬부부”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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