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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6년 부터 송헌영 목사와 함께 대한인동지회를 이끌 었던 최희만 미주 한반도협의회회장이 당시 상황을 회 고 하고 있다 ⓒ2005 Sundayjournalus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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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목사는 LA에서 대한인 동지회 북미총회를 이끌며, 한편으로는 ‘북미시보’를 발행하면서 한민족의 정체성과 동지회의 이념을 전파시켜 나가는데 헌신했다. ‘북미시보’(The Korean American Times)는 원래 LA 동지회에서 1943년 4월에 주간신문으로 창간한 간행물이었다. 송 목사는 동지회관에 인쇄시설을 갖추고 이 신문을 발행했다.
당시의 ‘북미시보’를 발행했던 인쇄기가 동지회관에 있었으나 최근 동지회 분쟁 와중에 이 역사적 유물도 분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 회장은 이러한 송 목사의 활동을 지켜 본 증인이다.
지난해 5월 동지회장으로 추대됐다가 그 해 일부 인사들이 불법적인 총회로 구성된 모임에서 졸지에 회장직을 박탈당한 김(송)영옥 회장은 바로 송헌영 목사의 딸이다. 김영옥 회장은 부친 송헌영 목사가 LA 동지회를 이끌어 나갈 때부터 부친을 따라 동지회원으로 활동했다.
최희만 회장은 “오늘날 그나마 동지회가 명맥을 유지하고, 동지회관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어릴 때부터 부친을 따라 동지회를 지킨 김영옥 회장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최희만 회장은 한국교회사의 순교자로 추앙을 받는 최태현 목사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선친 최태현 목사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된 한국 교회사에 기리 남는 순교 목회자였다. 일제 식민지 시절 최태현 목사는 각종파 연합회 고문으로 추대되면서 당시 종교 단체간에 대두된 어려운 시국 상항을 조화있게 이끌어 간 지도자였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던 목회자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1943년 2월에 ‘천황 폐하 대신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며, 교회도 해산하라는 일본 경찰의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며 계속되는 고문으로 순교자로서 생을 마감했다.
최태현 목사는 자녀들에게 “신앙을 지키기를 위해서는 어느 것에서도 굴복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고, 신자들에게는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를 남겼다. 부친으로부터 신앙을 배운 최희만 목사는 지난 1960년 LA에서 최초의 한인 안식일 교회를 세워 5년간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이후 커뮤니티 활동에서도 종파를 가리지 않고 선친의 가르침을 따라 사회활동에 솔선수범 해왔다.
한편 그는 지난 2000년 6.15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 해빙무드가 찾아왔을 때 한반도 평화를 위한 협의회를 구성해 해외동포로서 통일과업을 추진하는 일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의 남북 통일관은 인내와 포용하는 자세가 밑거름이다. 부인 황선희 여사는 남가주 간호협회를 창설한 커뮤니티 봉사가로, 부부가 타운에서는 “잉꼬부부”로 부러움을 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