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억류됐던 국군포로 중 최초로 탈북 귀환했던 조창호 예비역 중위가 한국시간으로 2006년 11월 19일 새벽 0시30분 76세 일기로 서울대 병원에서 별세했다. 그는 지난 2002년부터 LA에 본부를 둔 국군포로송환위원회(회장 토마스 정)의 서울본부(본부장 서정갑) 부회장으로 활동해왔다. 토마스 정 회장은 조창호 선생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지난16일 밤 급거 귀국해 조창호 선생의 임종을 지켜 보았다. 조 중위의 장례식은 21일 오전 10시 서울에서 국군포로송환위원회 주관으로 최초의 대한민국재향군인회장(장례위원장 박세직)으로 거행한 후 고인의 유해는 동작동 국립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됐다. 유족으로는 북한에 2남 1녀와 남한에 부인 윤신자(66)씨, 2남 2녀를 두고 있다. 고 조창호 중위는 지난 동안 미의회와 미주동포사회에 국군포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수 차례 방문해 미주동포들에게도 잘 알려져 왔다. 조창호 중위의 별세에 대해 토마스 정 회장은 “최초의 탈북 국군포로인 조창호 선생의 별세를 애도한다”면서 “한국정부와 국민들이 다시 한번 국군포로들의 인권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바란다”고 말했다. 재미애국단체연합회의 김봉건 회장은 “국군포로의 산 증인인 조창호 선생의 별세를 애도한다”면서 “아직도 국군포로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고인의 유해가 안치된 서울대병원에 미주에서 국군포로송환위원회(회장 토마스 정), 재미애국동포연합회(회장 김봉건),디펜스포럼재단(회장 수잰 솔티), 라디오코리아(사장 최영호), 재미6.25참전동지회(회장 서명철), 한국전참전16개국민속촌준비위원회(위원장 김명관) 등이 보낸 조화가 전두환 전대통령, 박근혜 한나라당 전대표 등의 조화와 함께 자리잡았다. 제임스 최<취재부기자> |
조창호 중위는 북한에서 입은 각종 신체적 질환으로 고통을 당하면서도 동료 국군포로들의 송환 운동에 앞장 서왔다. 특히 그는 아픈 몸을 이끌고 토마스 정 국군포로송환위원회장과 함께 지난 수 년 동안 미국의회포럼과 올해 미국의회 청문회 등에 참석해 북한정권의 국군포로 학대를 전세계에 폭로했다. 또 오는12월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북한 인권회의에도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는 지난해부터 탈북한 국군포로 자녀 돕기에도 발벗고 나섰다. 미 정계에 포로문제 건의 국군포로 송환위원회는 지난 2002년 LA에서 결성되어 조 중위가 한국지부 부회장을 맡고 있었다. 2003년까지 국군포로 49명이 탈북했을 때 현 경기도지사인 김문수 당시 국회의원과 미국 디펜스 포럼재단의 수잔 솔티 여사 등과 함께 많은 도움을 주기도 했었다. 또, 이 단체는 국회에서 ´납북자 및 억류국군포로 송환에 관한 법률´제정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법률안에 서명한 의원이 100명에 못 미쳐 법률제정에 실패하자 미국과 UN에 얘기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 수잔 솔티 여사와 함께 지난해 미 하원에서 만장일치로 ´북한인권에 대한 결의서´가 통과되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울러, 오늘 12월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UN인권고등판무관에 북한 인권 문제를 제소할 계획을 세워 조 중위와 함께 갈 계획까지 세워 놓은 상태였었다. “민족 비극의 상징” 아직 7만명 미 귀환
이어 그는 “6.25때 8만 여명이 포로가 되어 7만 여명이 미귀환 상태이고 생존자로 파악된 이가 500여 명인데 국가가 있으면서 그나마 1명이라도 데려오려고 하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국가이기를 포기한 행위”라고 분개했다. 또, “귀환하지 못한 나머지 분들도 조 중위의 순직을 계기로 지금이라도 데려오는데 정부에서 총력을 다해 줬으면 좋겠다”고 바램을 나타냈다. “이것이 그분들에 대한 최소한의 국가로서의 의무이자 정치지도자들의 최소한의 양심”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는 “정부가 안 하고 재향군인회조차 장례를 맡지 않았으면 대령연합회에서 5일장으로 할 계획도 갖고 있었는데 재향군인회 장으로 하게 되어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도 했다. 최인식 국민행동본부 사무총장도 “비전향 장기수에 대한 관심에 비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국군포로에 대한 관심이 없다”며 ” 조 중위가 한 많은 70평생의 삶을 마치면서 남은 자들에게 던져주고 있는 큰 메시지가 있다”고 말했다. 잃어버린 43년?서글픈 11년 조창호 중위는 “살아 돌아온 망자”라고 부른다. 북한 억류43년만의 죽음을 넘나드는 사투 끝에 이뤄진 극적인 그의 인생은 드라마틱한 드라마보다 더하다. 그가 살아 돌아 오기 전 국군묘지 비명에는 그의 이름이 전사자 명부에 기록되어 있었다. ‘군번 212966 육군 소위 조창호’ 마스크 없이 막장노동 조창호 전중위는 1930년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연세대 재학시절 입대해 1951년 소위로 9사단 101포대에 배치되었다. 조 중위는 그 해 5월 강원도 한석산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로로 잡혀 북한 인민군에 인계, 1952년 탈주 모의 및 기도혐의로 13년 형을 언도 받고 원산, 회창, 덕천, 만포 수용소를 전전했다. 1953년에는 악명 높은 아오지 제1특별 수용소에 수용되는 등 12년 6개월의 감옥생활과 16년의 광산 강제노동 등을 겪은 그는 1994년 10월 북한과 중국을 오가며 밀무역을 하는 이 모씨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탈출, 43년 만에 인천항으로 귀환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