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평범한 한 가정의 가장이 ‘간첩’으로 몰려 사형선고를 받은 지, 불과 20여시간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박정희 정치는 X도 아니다”란 한마디에 끌려가 징역을 살고 나와 범법자가 됐다. 유신체제에서 ‘긴급조치’로 무려 1,140명이 정권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대통령이 나쁘다. 도둑놈이다. 새마을 사업은 서서히 해도 되는데 너무 무리하게 억압적으로 한다”고 말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는가 하면, 한 고물행상이 양평군청 정문에서 하천부지 하자 절차를 문의하려고 군수 면회를 신청했다 거절당하자, 75년도에는 잘살게 해 준다고 하더니 이것이 잘살게 한 것이냐, 박정희가 백성들을 굶어죽게 했는데 너희들은 아부만 하느냐, 종합개발계획이 잘 될 줄 알았느냐, 다 거짓말이다”고 소리쳐 유언비어 날조유포로 징역 1년 6개월에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았다. 억울한 통한의 32년 1971년까지였던 대통령의 임기가 1975년까지 연장된 박정희 정권 시절, 안보의식과 위기의식,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혼란은 유신체제의 명분을 제공했고 그 누구도 마음대로 입을 열 수 없었다. 지난 23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는 32년 통한의 눈물과 오열이 흘러 나왔다. ‘사법 살인’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이 이 날 32년 만에 무죄판결을 받았다. 유가족들은 비록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연루돼 처형된 8명의 피고인들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억울해”를 연발할 수밖에 없는 사건, 무죄판결을 받았다 해도 유가족들에게는 끝나지 않을 아픔인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무죄판결을 받고도 유가족들은 돌아올 수 없는 8명의 죽음과 통한의 세월을 울음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 평범한 국민 ‘간첩’
31일 ‘긴급조치 위반사건 판결 판사실명공개’로 인한 많은 논란 속에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는 긴급조치위반 판결을 분석한 보고서를 공개했다. 긴급조치, 과거사, 인혁당 등 현 젊은 세대들에게는 낯선 단어들이고 다가오지도 않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적어도 ‘과거사를 청산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한 물음은 진실화해위원회의 보고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인혁당 사건만을 보더라도 어느날 갑자기 한 가정의 가장이 끌려가 한줌의 재로 돌아왔다. 하루아침에 ‘간첩’이 된 가족들은 사회적으로 고립되고 매장당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로써는 가장 무서운 ‘간첩’,‘빨갱이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과거사 속에서 지금까지 대다수의 긴급조치위반 피의자들은 막연히 ‘간첩’이었다. 보고서 146쪽 분량 중 73페이지에 달하는 1,140명의 긴급조치위반 판결 사례는 일목요연하게 정리 돼 있다. 이 중 피고인들의 직업과 판결요지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더라도 김대중 전 대통령, 윤보선 전 대통령, 김지하 시인 등 당시 이름을 떨치던 몇몇 외에는 대부분 이름 없는 평범한 국민들이 피의자였음을 알 수 있다. 또 보고서의 직업란을 보더라도 대학교수, 대학생과 같은 지식층 보다 농민, 목수, 숙박업, 노동, 인쇄공, 침술사, 양계업, 전기청부업, 어물행상, 부동산소개업 등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직업군이 더 많이 눈에 띈다. <표> 긴급조치위반 유형별 판결 현황을 보면 가장 많은 유형이 기타(음주대화 중, 수업 중 박정희 비판, 유신체제 비판발언) 282건으로 전체 48%를 차지한다. 폭압적 유신헌법 하에서 긴급조치가 박정희 독재정권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억압하기 위한 장치였음을 알 수 있다. 취중진담 한마디, 징역 7년?
평범한 국민 지난 1월 23일 인기드라마 ‘주몽’이 방영되는 황금시간대인 밤 10시에 KBS, MBC, SBS 공중파 3사가 대통령 신년인사를 동시 생중계로 내보내 네티즌들의 불만과 비난이 쏟아졌다. ‘주몽을 왜 못 보게 하나, 국민의 행복 추구권을 보상하라, 언론 장악해 자화자찬하려거든 낮 12시에 해라’ 등 노무현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네티즌들의 성토가 끊이질 않았다. 70년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박정희 정권하에서 긴급조치위반 피의자들은 바로 지금의 우리와 다를바없이 ‘하고픈 말’을 한 평범한 국민이었다. 이러한 국민들의 과거 고초를, 단순히 “나에 대한 정치적 공격”이라고 보는 ‘아버지의 딸’ 박근혜 전 대표의 발상이 위험해 보이는 이유다. 주경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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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한 민초들의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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