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의 신화를 일궈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가 살아온 길은 굴곡 많았던 대한민국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격동의 한국사 몸으로 겪어 이 당선자는 일제치하였던 1941년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충우(1981년 작고)씨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 채태원(1964년 작고)씨 사이의 4남 3녀 가운데 다섯째였다. 족보에 올라있는 이 당선자의 이름은 형제들과 같이‘상(相)’자 돌림을 딴 ‘상경(相京)’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치마폭에 보름달을 안는 꿈을 꿨다고 해서 ‘명박’(明博)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 때문에 곤욕도 치렀다. 일본식 이름이라는 이유에서다. ‘샐러리맨 신화’ 이명박 당선자의 인생 역전이 시작된 것은 `왕회장’ 고(故)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을 만나고 부터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회고록에서 “부지런하고 판단력이 빨랐다”고 그를 평했다. 타고난 부지런함과 과감한 문제제기로 현대건설에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대리로 승진한 것을 시작으로 29세 이사에 이어 불과 35세에 사장이 됐고 이후 최장수 CEO(최고경영자)의 역사를 쓰게 된다.
1980년 신군부가 ‘중화학공업 투자조정’이라는 경제정책을 들고 나와 현대자동차를 포기하라고 강요한 일이 있다. 국보위에 출두한 그는 군인들의 갖은 협박에도 끝내 들어주지 않았고, 현대차는 남게 됐다.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던 이 당선자가 정치판에 뛰어든 것은 1992년 당시 신한국당 대표였던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전국구 공천을 통해서다. 앞서 노태우(盧泰愚) 정권 말기였던 1991년 정주영 회장이 1천600억원에 달하는 추징금을 맞은데 반발해 아예 당을 만들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을 뜯어말렸던 이 당선자는 `왕회장’과 길을 달리해 집권 여당으로 향했다. 그러나 `기업인 이명박’에게 정치판은 녹록치 않았다. 1995년 서울시장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했고 이듬해 총선에서 `정치 1번지’ 종로구에 출마해 이종찬 씨를 누르고 당선됐지만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까지 받았다. 이 와중에 1998년에 다시 서울시장 경선에 도전, 최병렬 씨와 경쟁했지만 선거법 재판이 끝나지 않아 의원직을 사퇴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에서 1년여 와신상담하던 그가 1999년말 한국으로 돌아와 당시로선 생소하던 인터넷뱅킹 사업을 시작하면서 만난 사람이 한 때 대선정국에 최대이슈로 떠올랐던 `BBK 의혹’의 핵심인물 김경준씨다. 삼수 끝에 서울시장 당선 의욕적으로 새로운 사업을 하려던 차에 김 씨가 `수익률 조작’ 등으로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게 되자 사업관계를 청산한 이 당선자는 2002년 삼수 만에 서울시청에 입성, 4년의 임기동안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체계 개편, 서울숲 조성 등으로 주가를 올린 뒤 대권 도전장을 냈다. 다수의 반대를 꺾고 청계천 복원과 대중교통체계 개편 등을 성공시킴으로써 강력한 추진력을 대중에 각인시킨 그는 보수정당 소속이면서도 `실천하는 개혁가’라는 이미지 구축에 성공하면서 이념, 연령, 계층, 지역에 관계없이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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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특집1> 이명박 당선자,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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