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인터뷰] 윌셔은행 최초 여성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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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리스마’란 일반적으로 리더십과 통솔력이 뛰어난 리더들에게 붙이는 최고의 수식어다.
윌셔 스테이트 뱅크의 신임 조앤 김 행장(Joanne Kim, President & CEO, Wilshire State Bank)이야말로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가 가장 잘 어울리는 CEO 중의 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행내에서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 은행장”으로 불린다.
그의 내공은 하루 아침에 쌓인 것이 아니다. 지난 30년간의 은행원 생활에서 갈고 닦은 리더십과 성실한 커뮤니티 봉사를 통해 나타난 인격적 토양에서 바로 그의 힘이 나오는 것이다.
김 행장과의 1시간 남짓한 회견를 통해 그는 윌셔은행의 비젼과 함께 한인 금융권의 미래를 확실하게 조명해 주었다. 
뱅크 오브 아메리카와 웰스 파고 뱅크 등 여러 은행들로부터 아시안 뱅커에 대한 헤드 헌터 사항을 주문 받은 적이 있는 한 백인 금융 컨설던트는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우리가 쩜찍은 한인 뱅커로 조앤 김 행장이 있다”면서 “아시안 뱅크 마켓에 진출하는데 우리는 그녀를 탐내고 있다”고 말했다. 김 행장의 리더십은 이제 한인사회를 넘어 미주류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는 셈이다.
그녀는 더 일찍 행장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조건 빠른 길을 걷는 것보다는 절차를 무시하지 않고 ‘천천히’ 정도를 걸어왔다.
]한인사회는 아직도 여성이 한 분야에서 수장이 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지만 김 행장에게만은 예외인 것처럼 보인다. ‘조앤 김, 윌셔은행 여성 행장 되다’라는 보도에 은행과 관련된 많은 사람들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였다.


                                                                                       성진 <취재부 기자>


“은행원 생활이 벌써 30년이 됐군요”
지난 10일 오후 4시, 3200 윌셔 불러버드 소재 윌셔스테이트 뱅크 본점 14층에 자리잡은 행장실에서 만난 김 행장은 지난 세월을 잠시 스치며, “370명 전체 행원들과 함께 Living American Bank의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김 행장 사무실은 아마도 한인은행들 중에서 가장 검소한 축에 들 것이라고 여겨진다. 모 은행의 지점장실보다 훨씬 못했다. 하지만 실내에는 ‘축 행장 취임’의 축하 ‘란’ 화분에서 나는 향내가 조앤 김 행장실을 아름답게 쓰담어 주고 있었다.  
지난 4월 1일자로 정식 행장 업무를 시작한 김 행장은 임시행장 3개월동안 정말 혼신의 노력을 기울려 은행업무를 돌봤다. 누가 행장으로 오더라도 인수인계를 철저히 하기 위해서다. 정작 자신이 신임행장으로 이사회의 결정을 통보받고 업무를 시작한 지난 1일에는 그동안의 과로로 감기와 몸살이 닥처와 고생을 톡톡히 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도 아직도 감기 기운이 가시지가 않았으나 시종일관 편안한 자세로 이야기를 나누어 평소 고객과의 ‘편안한 만남’을 지침으로 삼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당연한 귀결”


오늘의 윌셔은행의 고속성장을 이루어 논 민수봉 전행장은 “조앤 김 행장의 취임은 당연한 귀결이며, 그의 업무 추진력은 타인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며 “윌셔은행이 또 다른 도약을 가져 올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민 전행장은 “무엇보다 대출분야에서 김 행장의 심사분석은 가장 돋보이는 부분이다”면서 “앞으로 행장으로서 그의 탁월한 리더십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 행장은 윌셔은행과 인연이 많다. 윌셔은행이 80년대 태동할 때 창설요원으로 참여 후 한미은행으로 자리를 옮겨 대출분야에서 근무하다가 지난 1999년에 윌셔은행 대출부장(CLO)으로 영입되어 왔다.
은행간부는 실적으로 평가받는다. 조앤 김 CLO 의 리더십은 그녀가 윌셔은행에 영입되어 임시행장직에 이르기까지 그가 이루어 논 대출계정액을 보면 잘 나타나 있다. 그녀가 윌셔은행에 올 때 총대출액이 2억달러를 넘지 못했다. 하지만2007년 현재까지 총대출액은 무려 18억 달러에 달한다. 그녀가 오면서부터 매년 2억 달러씩 증가시켰다는 계산이 된다. 이 대출증대율 기록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또 하나 놀랄만한 기록이 있다. 대부분 한인은행들의 대출은 주로 한인계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윌셔은행의 대출의 50% 이상은 비한인계 비즈니스에게 제공되었다. 그만큼 그녀의 대출능력이 타인종에게 저변확대로 실시되었다는 것이며 이는 윌셔은행이 타인종에게도 호감을 주고 있다는 의미다. 이를두고 캘리포니아 은행국의 한 관계자는 “윌셔은행이 커뮤니티 뱅크로서 임무를 성실히 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그녀가 대출분야 이외에도 영업업무에서도 뛰어난 실적을 보여주었다. 지난 2005년 택사스주의
댈러스 뱅크를 인수할 당시 이를 주도해 윌셔은행의 택사스 진출의 길을 여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또 그 해 뉴욕의 리버티 뱅크를 성공적으로 인수하는데도 그녀가 주도했다. 이어 2006년에는 뉴저지까지 진출해 윌셔은행의 미동부 진출의 최초의 교두보를 구축하는데 발판을 만든 것은 바로 그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윌셔은행에 처음 영입되어 지점장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한 때 그녀는 미드시티 뱅크에서 론 오피서로 근무했고 은행원 생활은 가주한국외환은행에서 출발했다. 이같은 그녀의 경력과 능력 그리고 리더십은 그가 한국계 은행들의 속성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새로운 도전에서도 탁월한 실적을 보여 주었음을 나타낸다. “대출 전문”으로 알려진 그녀가 이제는 최고경영자의 자질을 갖추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한인사회에서 김명자 (프리미어 뱅크 윌셔본부장), 서니 김(하나금융 대표), 김주학(전 새한은행장)씨 등이 대출분야의 개척자들”이라고 말하며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겸손함을 보였다.













새로운 기회의 나라


그녀는 한국에서 이화여고를 졸업해 원래 정외과를 가고 싶었으나 고려대 영문과를 택했다. 70년대 한국의 군부독재 정권하에 암울한 시절은 고대 영문과를 나온 그녀에게는 사회진출이 단단한 벽이나 다름없었다. 당시 한국의 사회는 인맥이나 연고나 소위“빽”이 없으면 좋은자리에 취직도 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더구나 그녀의 가정은 부모가 북한에서 월남한 가정이라 남한엔 친척도 없이 단촐한 가정이라 애시당초 인맥이나 연줄이 있을리 없었다.
이러한 그녀에게 미국 이민은 또 다른 기회라고 여겼다. 20대에 결혼해 70년대 미국 땅을 밟은 그녀는 한국에서 펼치지 못했던 꿈을 이루는 새생활에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공부도 하고 싶었으나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그녀는 78년 LA에 도착한지 2개월 후 수소문 끝에 가주한국외환은행에 문을 두드렸다. 김 행장을 인터뷰한 당시 정원훈 가주한국외환은행장은 “내일부터 일하라” 고 했다. 그 때가 오늘의 조앤 김 행장의 은행 캐리어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초창기 행원 시절 야간에 학교를 다녔다. 평소 하고픈 정치분야 공부를 선택하려고 했는데 은행의 임원들이 갖 이민온 그녀에게 언어 문제도 있으니 차선책으로 대학원 코스의 도서관학과를 선택하라는 조언에 따라 선택했는데, 한 임원이 ‘현재 행원으로 있으니 이왕이면 회계학이나 재정학도 공부해보라’ 는 조언에 칼스테이트LA에서 과목을 선택했다. 또 김 행장은 시애틀의 퍼시픽 코스트 뱅킹 스쿨의 석사과정도 이수했다.  그 때의 공부가 나중 대출분야에서 근무할 때 도움이 됐다.
“한인은행가의 대부”로 불리는 정원훈 전행장은 아직도 30여년전의 조앤 김 행장을 기억하면서 “그 당시 무척이나 열심히 일하는 돋보이는 행원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또 정 전행장은 “그 후 김 행장이 여러 은행에서 근무하면서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는 것을 볼 수 있어 언젠가 은행의 책임자 자리에 오를 것으로 확신했다”고 말했다.
한인사회에서 지난 88년 최초의 여성 지점장 김명자(현 프리미어 뱅크 윌셔지역본부장) 시대가 열리면서 여성 행장의 시대도 예고됐다. 언론에서 “차기 여성행장”으로 거론될 때면 여성뱅커 중에서 “조앤 김”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370명 행원 소중한 자산
 
임시행장의 딱지가 떨어지는 날, 김 행장은 370여명의 윌셔은행 행원들을 우선 생각했다. 윌셔은행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고 바로 이들 직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그래서 은행 식구들이 조직원으로서 유용성을 지니고 친화력으로 서로가 일체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은행 직원 한사람 한사람이 바로 윌셔은행을 대신하는 것임을 직원들이 공유하도록 하는 방안에 고심했다.
김 행장은 행원들에 대한 대우가 잘되어야만 그들이 윌셔은행을 자신의 진정한 일터라고 여기기에 우수직원들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직책과 스탁옵션도 제공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행원에 대한 대우는 ‘행원들 스스로가 제대로 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도록 은행을 운영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또한 행원들에 대한 승진제도의 확립과 성과에 대한 보너스 지급에도 상장은행으로서의 책임을 갖고 계속 실시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기자가 ‘커뮤니티 여러 곳에서 도네이션 요구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는데 매년 얼마나 나가는가’라는 문의에 대해 김 행장은 “오늘도 여러 건의 도네이션을 조치했다”면서 “매년 수십만 달러 정도가 된다”라고 말했다. 다시 기자가 ‘그 중에는 장학 단체들에 대한 기부도 있을 것으로 아는데 정작 행원들 자녀들에 대한 장학제도가 있는가’라는 질의에 김 행장은 “아직 없으나, 앞으로 고려해 볼 사항이다”라며 노트에 메모하기도 했다.
김 행장이 전체 행원들에게 당부하는 방침은 ‘고객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하라’는 것이다. 고객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하려면 무엇보다 고객과의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감동을 주는 만남은 윌셔은행의 평생고객을 삼게 된다는 지론이다.
김 행장은 세가지 지침을 정했다. 새로운 ‘은행문화’의 씨를 심는다. 우선 첫째 윌셔은행에서 근무하는 것이 재미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행원들이 매일 돈을 만지고 있으나 은행생활에서 인생의 가치관을 지켜 나갈 수 있는 직장으로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윌셔은행을 진정한 코리안 아메리칸 뱅크로 키워 나간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한인 이외 타 인종 고객이 윌셔은행에 들어오더라도 편하게 상담할 수 있는 환경조성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세째로는 커뮤니티 뱅크로서 ‘Living American Bank’의 역할에 충실하겠다는 것이다.  백인 고객이 들어와서도 뱅크 오브 아메리카에서 느끼는 분위기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갖도록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대출 분야에는 한국어는 물론이지만 이제는 거의 영어로 상담을 주고 받는다. 대부분 행원은 영어를 구사한다. 앞으로 2년 후 모든 행원에게 영어는 필수이고, 스페니시 정도는 이해할 정도로 은행원 업무 향상을 도모할 방침이다. 대출도 중요할 뿐만 아니라 예금 등에도 중요성을 강조한다. 


직원 모두가 ‘신명나는 직장’


임시행장 시절인 지난 1월 김 행장은 LA 지역의 모든 지점을 방문했다. 모두 한번 돌아보는데만 3주가 걸렸다고 했다. 현장에서 많은 것을 도움을 얻었기에 앞으로 가능하면 매분기마다 전 지점망을 돌아 볼 계획이다.
김 행장은 윌셔은행에서 일하는데 ‘신명이 난다’고 했다. 자신의 업무에 대해 이사회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준다는 것이다. 타 은행들처럼 말많고 탈많은 이사회와는 달리 윌셔은행 이사회는 “탄탄하고 합리적”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사회를 구성하고 이사들의 은행주식 소유율도 타은행들에 비해 월등히 높아 은행에 대한 공동적인 책임의식이 높다는 의미다.
비즈니스로 성공을 바라는 동포들에게 주고싶은 말을 해달라는 요청에 김 행장은 “한인들에게 자주 쓰이는 ‘빨리 빨리’의 습성을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반적으로 미국에서의 비즈니스는 자가자본과 은행의 대출과 함께 자금력을 키워 나가야 하는 것이 정설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김 행장은  “자기자본과 은행대출을 조화있게 구성하는 요령으로 우선 자기자본에 대해 건강한 바탕속에서 비즈니스를 운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기자본은 적은데 욕심을 부려 대출을 많이 받아 ‘빨리빨리’ 하는 풍토는 지양해야 한다는 것. 김 행장은 “절대로 무리수를 두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미국사회는 원래 기본 규정에 따라 절도 있게 구성된 사회구조이기에 이 환경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 실패를 막는 최선의 길이라는 것이다. 김 행장은 한인들과 백인들의 비즈니스 스타일을 비교했는데 한인들은 ‘나홀로’와 ‘빨리 빨리’를 추구하는 스타일인 반면, 미국사회는 ‘다함께’와 ‘천천히’ 가는식이다. ‘천천히’ 디딤돌로 비즈니스를 운영하는 것이 장기간 강한 경제력 바탕을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잘라 말했다.


전문 은행가로서 김 행장은 커뮤니티 봉사에도 열심이다. 그녀는 지난 20여년간 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해 오고 있으며, 타운에 여러 비영리단체에서 자원봉사자로 활동해 많은 감사패도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다.
김 행장이 30년전 가주한국외환은행에서 처음 일할 때다. 하루는 바쁜 업무 중에 은행 로비를 지나야 했다. 그녀는 빠른 걸음으로 가면서 문득 바닥에 휴지가 떨어진 것이 보였다. 집어야겠다고 생각했으나 하지만 워낙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 “나중에 다시 올 때 집어야지”라며 지나쳤다. 
그 때 그자리를 지나던 정원훈 행장이 손수 휴지를 집어 들어 버리고는 돌아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휴지가 보이면 바로 그자리에서 버려야 한다’고 꾸중을 들었으나 김 행장은 오히려 그날의 기억을 소중한 유산으로 삼고 있다.
김 행장은 그때의 일을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생생하게 기억속에 간직하면서, 당시 어린 신입행원의 눈에는 ‘높으신 행장 어른이 손수 휴지를 집던 모습’이 그처럼 충격일 수가 없었다. 그 시절의 일을 기억하면서 김 행장은 오늘의 행장직에 오른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짐하고 있다.
‘고객에게 좋은 인상, 편안한 분위기를 주는 윌셔은행’을 키워가는 일이다.
일선 행원으로 시작해 30년만에 미주 한인사회 4대은행의 하나이며 최초의 상장은행, 윌셔은행의 당당한 행장이 된 그는 이제 전문직을 꿈꾸는 젊은여성들의 롤모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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