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미 리 올림픽 2관왕 60주년

이 뉴스를 공유하기

    















1948년 런던 올림픽 다이빙 2관왕, 새미 리(Sammy Lee) 박사는 한국과 미국 모두에서 추앙받는 영웅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전설적 다이빙 스타”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초기이민세대 2세인 그는 2차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인 고 김영옥 대령과는 죽마고우로 친했다. 새미 리 박사는 오는 8월 8일에 개막하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참관에 지금 가슴을 설레고 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그가 직접 참관하는 마지막 올림픽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베이징 올림픽은 그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다이빙 금메달을 목에 건지 60주년이 되는 올림픽이기 때문에 더욱 큰 의미가 있다. 또한 올해는 대한민국의 건국 60주년이라는 의미도 된다. 그가 대한민국이 건국하던 해인 1948년 런던 올림픽 다이빙 10 미터 플랫폼에서 한국계 미국 선수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국민들에게 엄청난 기쁨을 안겨다 주었다. 그가 베이징 올림픽에 참관하는 8월에 그의 나이는 88세가 된다. 새미 리 박사는 부인과 함께 베이징 올림픽 참관에 앞서 8월 초순 서울에 도착, 청와대를 예방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올림픽 메달 60주년”과 관련 축하 인사도 받을 예정으로 알려졌다.
                                                                                              성진 <취재부 기자>


최근 본보 기자와 만난 새미 리 박사는 “이번 올림픽 참관이 어쩌면 내 생애 마지막 참관하는 올림픽이 될지도 모른다”며 “특히 이번 올림픽이 내가 런던에서 처음 금메달을 획득한지 60주년이 되어 남다른 의미도 있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또 “베이징 올림픽이 개막되는 8월은 내 나이가 88세가 된다”면서 “중국인들은 8이란 숫자를 특히 좋아한다고 하니 나도 환영을 받을 것”이라며 유머 감각을 나타냈다.
그는 또 “올림픽 참관 전에 서울도 방문해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 유치를 위해 조언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 서울 방문 중에는 청와대를 예방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금메달 60 주년” 축하 인사도 받을 예정이다. 또 그는 부시 대통령으로부터도 역시 “금메달 60주년 축하” 기념장을 받을 예정이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지사로부터도 역시 “금메달 60주년” 축하 기념장을 받을 예정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탄생한 해인 1948년 영국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올림픽대회 다이빙 고난도 부문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따내 미국의 영웅이 됐다. 이 부문에서 미국의 금메달은 새미 리 박사가 최초였다. 동양계로서도 최초였다. 또한 그의 금메달 소식은 당시 그의 모국인 신생 대한민국의 탄생 전야에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기쁨을 안겨 주었다. 그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따 2관왕에 올랐다. 이 역시 최초였다.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의 올림픽 참관은 오래된 지인인 킴 포드(Kim Ford)와 제임스 스펙만(James Spackman) 등이 삼성그룹을 비롯한 유수의 기업들의 후원을 받아 이루어졌다.
새미 리 박사는 평 생 술 담배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그는1주일에 3~4일은 수영으로 건강을 다진다고 했다. 골프도 100타를 넘게 친다고 했다. 10여년 전에 시작한 골프는 죽기 전까지 할 생각이라고 했다.









▲ 1948년 올림픽대회에서 금메달을 수여받는 새미 리


“전설적 스타”


현재 미국 스포츠계에서 이름을 떨치는 재미한인계 선수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하인즈 워드, 미셸 위 등 스포츠 스타들이 세계를 주름잡고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한국계 스포츠 스타의 원조는 바로 미국의 올림픽 다이빙 영웅 ‘새미 리’ 박사이다. 그는 올림픽 다이빙 역사를 이야기할 때 늘 빠지지 않는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5척 단신의 새미 리 박사는 올림픽 선수 이전에 USC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도 받았고, 금메달 획득 이후 동양인으로는 유일하게 미국 아마추어 최고 선수에게 주어지는 설리반상도 수상했다.
새미 리 박사는 1942년 22살의 나이에 유색 인종으로는 최초로 전 미국 다이빙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2차 대전으로 1940년과 1944년의 올림픽이 취소돼 1948년 28살의 나이에야 첫 올림픽에 출전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다이빙 10미터 플랫폼에서 당당히 금메달을 따낸 새미 리 박사는 역시 유색인종으로는 최초의 다이빙 금메달리스트였다. 그는 또 4년뒤 헬싱키 올림픽에서 당시로는 최초로 다이빙 금메달을 2연패한 남자 선수이자, 최초의 동양계 2연패 선수가 됐다. 당시 32살의 금메달리스트는 최고령 금메달리스트이기도 했다.
그는 1968년 국제 수영 명예의 전당 (International Swimming Hall of Fame)에, 1990년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에 각각 헌액됐다. 또 그는 미국의 역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 닉슨, 레이건 시절에 대통령 올림픽 사절로 활동하기도 했다. 
새미 리 박사는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자랑스런 한국인’으로 뽑혀 지난 2003년1월1일 로스앤젤레스 인근 패사디나에서 열린 ‘로즈 퍼레이드’ 축제 때 이민100주년 기념 꽃차에 박찬호 등 7명과 함께 카퍼레이드를 벌여 시민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네 꿈을 펼쳐라”


새미 리 박사는 미국 내 한인 사회에서 존경 받는 인물이다. 1966년 남가주 한인회에서 ‘우수 동포’로 선정되기도 했던 그는 지금도 한인 사회를 위한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젊은 학생들이 초청하면 기쁘게 참여해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며 꿈과 비젼을 담아주고 있다.
그는 지난 3월 조지아주 아틀란타 소재 에모리대에서 열린 전미한인학생 컨퍼런스 (KASCON)에 참석해 한인 대학생들에게 열정적인 강연을 해 많은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팔순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건강한 모습으로, 수십년 이상 나이차가 나는 학생들을 상대로 정열적인 강의를 펼쳤다. 그의 강연 주제는 ‘리빙 유어 드림’(너의 꿈을 살려라)였다.
 “내 어릴 적 꿈은 다이빙 선수가 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지만, 아버지 생각은 달랐답니다. 의사와 같은 직업을 가져야만 사회에서 존중 받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죠. 1900년대 초 하와이로 이민 와 유색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을 받았던 아버지의 경험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결국 저는 다이빙과 의사, 둘 다 하게 됐지요.”
새미 리 박사가 성장했던 1930년대 미국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인종차별이 만연했다. 공공수영장은 이른바 ‘비회원’인 유색인들에게 일주일에 단 한 번 개방됐다. 흑인과 아시안들이 연습을 하고 나가면 수영장 물을 새 것으로 교체할 정도로 심각했다.
극심한 인종차별도 다이빙에 대한 그의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지만 다이빙 때문에 갈등은 여전했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다이빙을 잠시 접고 의학박사가 된다.
 “다이빙의 꿈을 접어도 변하는 건 없었죠.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갈 때도 제지를 당했고, 고등학교 졸업무도회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지요. 하지만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올림픽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기로 마음 먹고 연습에 몰두했죠.”
새미 리 박사의 활약은 그 후에도 계속됐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군의관으로 직접 참전했다. 이어 우리나라 다이빙 선수들을 직접 지도하기도 했으며, 그가 지도한 미국 선수는 서울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대회 당시 미국선수로 다이빙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그렉 루가니스가 바로 그가 키워낸 선수이다.
그는 젊은 대학생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관 중들의 환호 속에 시상대에 올랐을 때 제 귀에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마음을 다해 노력하면 무슨 꿈이든 이룰 수 있다’ 여러분도 ‘리빙 유어 드림’(Living your dream), 자신의 꿈을 살리며 살아가길 바랍니다”









▲ 새미 리 부부


모국사랑


서울 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 한국 올림픽 위원회 상임고문, 헌정회 고문 등의 직책을 지냈던   민관식(작고, 대한체육회 명예회장)옹은 생전에 새미 리 박사와 인연이 많았다. 지난 1964년 도쿄 올림픽 대회 때 민 옹은 대한민국 선수단 단장이었다. 당시 한국선수단의 수영팀은 국제수준에 훨씬 미달했던 때다. 민 옹은 당시 새미 리 박사의 모국 사랑의 일화를 생전에 글로 남겼다.
<당시 새미 리 박사는 미국 선수단의 코치였고, 국제심판이었다.  그는 미국 선수단보다 훨씬 앞서 미국 캘리포니아 의 자택을 떠나 도쿄에 도착했다. 그러나 우리 선수단은 새미 리 박사보다 두 주일이나 늦게 일본으로 건너가 요요기의 선수촌에 여장을 풀었다. 새미 리 박사는 한국 선수들이 도착한 이튿날부터 이필중 코치와 함께 조창제.송재웅.정순자 선수 등을 이끌고 맹훈련에 들어갔다. 누구의 부탁을 받은 것도 아니요, 화제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나라 코리아의 젊은 선수들을 돕는 게 핏줄이 같은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우리 말을 유창하게 하지는 못했다. “이렇게, 이렇게” 해가면서 손짓 발짓으로 선수들을 가르쳤다. 눈빛에 열정이 가득했다. 국제심판이자 이스라엘 감독인 치코 터넨을 초청해 한국 선수 지도를 부탁하기도 했다. 필요한 비용은 자비로 해결했다. 우리 선수단으로부터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았다. 새미 리 박사가 당시 개인적으로 지도한 선수단은 한국뿐이었다. 올림픽 영웅으로부터 지도를 받고 싶다는 각국 선수단의 요청을 모두 사양했다. 특히 일본 선수단의 요청엔 “나는 한국 선수 외에는 지도하지 않는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한국을 향한 새미 리의 뜨거운 애정은 당장 도쿄올림픽에서 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70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송재웅의 금메달로 결실을 봤다. 나는 새미 리 박사의 무조건적인 한국 사랑을 통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를 가슴에 새겼다.
나는 도쿄올림픽 기간에 도쿄의 한 선술집에서 새미 리와 잔을 기울인 적이 있다. 따뜻한 미소를 지닌 사나이였다. 그때 그는 부인 이야기를 했다. 중국 사람이었지만 한국 요리 솜씨가 대단하고 김치까지 담글 줄 안다고 했다. >
그의 모국 사랑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운동에서도 잘 나타났다. 그는 지난 2003년 한국을 방문해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에 힘을 실어 주었다. 그는 평창에서 “한국은 아시안게임, 올림픽, 월드컵까지 훌륭히 치러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유치된다면 분단된 남북이 하나로 합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IOC위원 등 친분이 있는 국제 스포츠계 인사들에게 한국의 동계올림픽 유치 열망과 그 당위성을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새미 리, 그는 누구인가>













 ▲ 만년 스타 새미 리 박사
새미 리 박사는 1905년과 12년 각각 미국으로 이주한 이순기씨와 전은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순기씨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가는 이민선의 통역이었다. 프레스노에서 철도 노동자로 일한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강한 민족의식을 심어 주었다. 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로부터 “3.1 운동 때 일본군이 수많은 조선 사람을 비참하게 죽였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날 아침 주방용 칼을 들고 일본인이 사는 옆집에 찾아가 “당신들을 죽이겠다”며 소동을 피웠다고 한다. 열 살 무렵엔 전학 온 일본인 학생을 때려 실신시키기도 했다.
새미 리 박사는 올림픽 영웅이기 이전에 의사였다. 어릴 때부터 그의 꿈은 다이빙 선수가 되어 올림픽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지만, 그의 아버지 생각은 달랐다. 초기이민 시절인1900년대 초 미국으로 와 온갖 차별을 받았던 아버지는 의사와 같은 직업을 가져야만 사회에서 존중 받고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을 다해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단다.”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평생 교훈으로 삼았다.
그 자신도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만 수영장 출입을 할 수 있는 등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기에 아버지의 뜻을 잘 알았다. 하지만 다이빙에 대한 열정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는 미국에서 열리는 여러 수영대회에 꾸준히 참가했고, 유능한 코치를 만나 고된 훈련을 하며 실력을 다듬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이 된 그는 다이빙 선수로서 명성을 얻었을 뿐 아니라, 학업 성적도 뛰어났다. 게다가 그는 동양인 학생 최초로 학생회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대로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계속했지만 다이빙 때문에 갈등은 여전했다. 하지만 부친 작고 후, 아들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아버지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그는 다이빙을 잠시 접고 의학공부에 몰두했다.
의사가 된 뒤 그는 올림픽의 꿈을 향해 틈틈이 연습하고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 때에도 수영장 출입제한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백인 친구들과 함께 식당에 들어갈 때도 제지를 당했다. 자신의 고등학교 졸업 프롬파티에조차 참석할 수 없었던 경험도 있었다. 새미는 그런 현실에 분노하기보다는 올림픽에서 자신의 진가를 보여주기로 마음 먹고 연습에 몰두했다.
그리고 1948년, 28세의 그는 미국국가대표 다이빙 선수로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여 고난도의 연기를 선보이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관중들의 환호 속에 시상대에 오른 그의 귀에는 “마음을 다해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이 들려왔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