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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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동안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면서 사세요.”
천주교 김수환(金壽煥·87·사진)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한 김 추기경은 10월 초 한때 호흡곤란으로 위독했다가 의식을 회복했지만 가슴에 꽂은 링거주사로 영양을 공급받아 왔다. 의료진에게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으니 무리하게 생명을 연장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김 추기경은 전날 갑자기 폐렴 증세를 보였고 이날 오후 병세가 급격히 악화됐다. 그는 선종 2~3일 전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로 고맙다”고 말했다.
“주여,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당신과 만나고 싶습니다. /당신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목숨 다하는 그날까지/ 당신과 함께 영원을 향하여 걷고 싶습니다. /형제들을 위한 봉사 속에 /형제들을 위한 가난 속에/ 그들과 함께 모든 것을 나누면서 /사랑으로 몸과 마음 다 바치고 싶습니다.” (‘나의 기도’·1979)



김수환 추기경의 일생은 그가 엄혹했던 유신정권 말기에 간절한 마음을 담아 지은 자작시 그대로였다. 종교인 김수환은 남들이 모두 우러러보는 추기경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하느님과의 만남과 합일(合一)을 갈구한 소박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2001년 사제 수품 50주년을 맞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돌아보면 하느님께 오히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사제가 될 때 택한 성경 구절이 시편 51편의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였는데, 지금 심정이 똑같습니다.”라고 했다.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 집무를 중단하고 피정(避靜·성당이나 수도원에서 묵상이나 기도를 통하여 자신을 살피는 일)을 떠났는데 하느님을 잘 만날 수 없어서 얼굴이 까맣게 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 단순한 종교지도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하는 인물이 된 것은 천주교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형제’로 삼아 그들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데 몸과 마음을 바쳤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격동이 몰아쳤던 지난 40년간 그는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70~1980년대 민주주의와 인권이 억압받던 군사정권 시절에는 국민의 민주화 열망을 대변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우리 사회에 반미친북(反美親北) 경향이 강해지는 점을 우려하고 북한의 인권 개선과 체제 변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파와 이념의 갈등과 대립 속에서 혼돈을 겪던 국민은 언제나 김 추기경을 바라보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지난해 6월, 86회 생일을 맞아 “빨리 사라져야 하는데 아직도 사라지지 못하고 하느님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차분하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입원 후에는 문병 온 사람들과 매일 병실에서 미사를 올리며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대변인 허영엽 신부는 “선종하시던 날은 말씀이 거의 없으셨고, 특별히 남긴 유언은 없다”며 “선종 10분 전까지 의식이 뚜렷했고 고통스럽지 않으냐는 질문에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고 전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세계성체대회 때 장기기증을 약속했으며, 선종 직후인 이날 오후 7시2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 적출 수술을 마쳤다. 김 추기경이 남긴 눈은 두 사람에게 시술할 예정이다. 김 추기경의 유해는 이날 밤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본당에 마련된 유리관 안에 안치됐다.
장지는 용인 천주교 서울대교구 성직자 묘역이다.
한편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善終ㆍ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에 애도의 뜻을 표했다고 교황청이 밝혔다. 베네딕토 16세는 서울대교구장인 정진석 추기경에게 보낸 전보에서 김 추기경의 선종으로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애도했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바라본 진짜 성직자


                                                                                                                    변홍진(언론인)


“북한은 정말 목자로서 꼭 가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곳에서도 우리의 동포가 있기에 정말 가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가 평양교구의 교구장 서리로 있기 때문에도 가봐야 하는게 의무인데, 여러 여건 상 방문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고 안타깝습니다.”


이 말은 지난 1992년 9월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LA를 방문했을 당시 필자가  ‘북한을 가보고 싶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답한 말이다. 끝내 그 분은 그 땅을 가보지 못하고 하늘로 떠났다. 그리고는 그 분은 “미주동포들이 많이 가주고 있어 한편으로 든든하다”고 말했다.
추기경이라는 자리는 매우 중요하고 또 바쁜 자리이지만 김 추기경은 미주동포를 끔찍히 사랑하셨다. ‘미국에 오면 편하다’고 했다. 그래서 틈이 있으면 외국 순방 중에도 아메리카 땅을 스쳐가기를 수십 번이다. 때로는 서부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했던 ‘모뉴멘트 밸리’ 등 아리조나의 인디언 땅의 광활한 대평원을 보기를 좋아했다.
4.29 폭동의 잿더미가 아직  남아 있을 당시에  LA를 찾아 재기에 여념이 없는 동포들을 만나 “폭동 때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했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 분은 미주 한인천주교계에서 큰 행사가 준비되면 국내에서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가능한 틈을 내어 LA,뉴욕, 워싱턴DC는 물론 캐나다 토론토 그리고 남미까지 방문해 그곳 동포들을 만나기를 좋아했다.
천주교에서는 신부들과 만나는 것도 격식을 차려야 하는데, 그 분은 동포들과 만나서 격의없이 대화하는 것을 좋아해 한마디로 “인기 짱”이었다. 동포 가정집에 초대받아 그 집의 어린이들과 함께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를 부르는 모습은 바로 산타 크로스나 다름 없었다.
지체 높은 추기경이지만 권위를 나타내지 않았다. 특히 언론과의 만남은 매우 즐거워 했다. 그분은 기자의 직책이 높고 낮음을 가리지 않고 만났다. 지난 90년대 중반 그 분이 LA를 방문했을 때 한 올챙이 기자가 데스크로부터 ‘추기경 인터뷰 건’을 지시 받았다. 그 올챙이 기자는 ‘추기경님이 저 같은 기자를 만나 주실까요’라며 걱정하더니 갔다와서는 ‘너무나 소탈한 면에 반했다’면서 즐거워 했다.
그 분은 처음 만나는 기자에게 농담반 진담반으로 “나중에 죽어 하느님을 만나면 무슨 질문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 이처럼 그분을 만난 기자들은 추기경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생각하게 만드는 선각자를 만나는 생각을 갖게했다.
천주교계의 추기경이지만, 일반 동포들을 만나서도 큰어른이었다. 종교를 가리지 않고 격식없이 손을 마주 잡고 대화하기를 좋아했다. 이곳에서 종파를 떠나 사회운동을 하는데 천주교 신자들이 함께 니서는데는 그분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반에 그 분이 LA.를 방문했을 때다. 당시 한국은 ‘서울의 봄이 왔다’며 3김이 서로 정권을 잡기위해 필사적인 쟁탈전을 벌릴때였다. 그분은 대화모임에서 “지금은 너도 나도 마음을 비울 때다”라고 했다. 그 때 필자는 이 말을 듣고 그저 이민생활을 하는 동포들에게 주는 말로만 생각했다. 귀국해서 그 분은 3김씨에게 “마음을 비우라”고 충고했다. 아마도 그 때 3김씨가 그 충고를 새겨들었다면 한국의 역사도 달라졌을거다.  그 후 “마음을 비우라”는 말은 우리사회에 널리 회자됐다. 지금도 그 말은 우리들의 정치인들이 새겨 들어야 할 것 같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78년 10월에 제 264대 교황으로 선출되어 1995년에 선종했다. 생전에 교황은 전세계를 순례했다. 한번은 기자회견에서 ‘지금까지 방문한 인상적인 나라가 어디냐’는 질문에 그는 첫 번째가 교황이 되어 방문한 모국 폴란드이고, 두 번째는 천주교 200주년, 순교 복자 103위 시성식을 위해 1984년에 찾아간 한국, 세 번째도 1989년 방문한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교황은  김포공항에 내리자 무릎 꿇고”순교자의 땅”이라고 외우며 그 땅에 입을 맞추었다.
당시 교황을 영접한 김 추기경은 전세계 가톨릭 교계로부터 “우리시대에 주목해야 할 인물”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우리가 사는 LA에도 추기경이 있다. 바로 LA대교구를 관장하는 로저 마호니 추기경이다. 김 추기경도 최연소 추기경으로 봉직됐지만 마호니 추기경도 미국에서 최연소로 추기경이 된 분이다. 마호니 추기경은 지난날 LA를 방문한 김 추기경을 만난 자리에서 “한인 신자들의 열심한 자세가 부럽다” 면서 “그 열심한 신자들의 추기경이기에 더욱 존경스럽다”고 말했다.
김 추기경은 지난 2006년 1월 13일에 ‘미주한인의 날’을 축하하는 글을 LA동포 화가 김복림씨를 통해 보내왔다. 미주동포를 생각하는 그 분의 자상한 모습이 담겨있다. 이처럼 그분은 동포사회의 기쁜일 을 자신의 일처럼 좋아했다.
그 분이 떠난 후 허전한 마음이 가눌길 없다. 암울한 시절엔 우리를 대신해 인권과 정의의 목소리를 내주던 그 분이 떠난 자리가 너무나 깊다. 누가 이자리를 메울것인가. 당장 생각이 나질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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