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포사회를 외면한 한인축제재단 이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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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한인축제재단(이사장 계무림)은 36년 역사에서 희한한 기록을 남긴채 2009년 한해를 보내려 하고 있다. 재단 이사회는 지난11월30일 이사회를 원칙도 없이 비공개로 하면서 언론의 출입을 봉쇄하고 장장 3시간 동안 고성과 악을 쓰면서 회의를 진행했으나 결의된 사항도 이루지 못한채 서로들 얼굴을 붉히며 회의장을 떠났다.
이사회를 비공개를 한 것은 우선 계무림 이사장의 방침이었으나 이사회가 이를 받아들인 것은 이사들 자신이 언론에 대해 자신들의 행태가 떳떳치 못하다는 방증이다. 비공개 이사회는 개인 신상이나 매우 특별한 사안에 대해 일정부분 비공개를 할 수는 있으나 이사회의 자체를 비공개로 한 것은 커뮤니티에 대한 은폐작업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심한 이사들의 작태였다. 현재 축제재단 이사회 구성에는 한인회, 한인상공 회의소, 번영회 , 봉재협회 등을 포함한 한인단체들에서 전,현직 대표직을 포함해, 대학교수도 있고, 박사도 있고, 한국의 날 축제에서 대회장이나 준비위원장 등을 지낸 인사들도 있다. 또한 이들 이사들의 면면을 객관적으로 보면 각자의 기업이나 단체활동을 나름대로 이끌어 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지난 1년을 지나오면서 이사회는 분파와 갈등 그리고 분쟁을 일삼아 오면서 끝내 지난 30일 이사회에서 분출시키고야 말았다. 각기 명분은 “개혁”과 “전통”으로 서로가 맡붙었으나  동포사회 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추태만을 남겼을 뿐이다. 만약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이사장에게 이사회가 명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면 그날의 파장은 없었을지 모른다.
한인축제재단의 비전은 “우리는 하나, 공동체 의식을 도모하면서 우리한인의 결집된 힘으로 한인문화를 주류사회에 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축제재단의 목표는 “축제를 통해 조성된 기금을 사회에 환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단의 이사들은 이같은 비전과 목표를 망각한채 파벌을 작당해 자신들의 체면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여기에는 뿌리깊게 밝힌 이사회 내부의 ‘상공회의소 파’와 ‘번영회 파’의 깊은 골과, 최근의 영입된 신진 이사들의 망동까지 겹처지면서 곪아갔던 것이다.
축제재단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해 그 폐단이 오늘에까지 물들게 된 것이다. 자칫하면 법적소송도 야기될 수 있다.                                                                           <
특별취재반>


본보는 지난709호에서 ( 2009년10월 18일자) <LA 한인축제재단 36년 역사에서 이번처럼 다수의 이사들이 이사장에 거명된 적은 없었다. 매번 이사장 선출이 담합으로 이뤄져왔기 때문이다. 한편 타운 일각에서는축제재단 이사장 선거의 피선거권이 재단 이사에 국한된 현재의 정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높다. 범동포적 유력단체로 성장한 ‘LA 한인 축제재단’을 놓고 “몇몇 유력 이사들이 감투를 나누어 가진 뒤 이사장 자리를 ‘돌려먹기 식’으로 추대하는 모양새는 옳지가 않다”라는 의견의 목소리들이 과거부터 계속되어 왔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지적이 하나도 틀림이 없이 그대로 재현됐다.
지난달 30일 비공개로 열린 이사회는 재적이사 18명중 13명이 출석하고 나머지 5명 이사들이 위임장을 제출해 이사회가 성원됐으나, 초장부터 이사들끼리 난전토론을 벌이는 바람에 가장 중요한 안건인 이사장 선출도 못하고, 또한 올해 한인축제 결산보고 등도 의결치 못했을 뿐만 아니라 차기회의 일정도 정하지 못해 자칫 재단이 표류할지 모르는 위기만을 초래했다.
회의 도중 명의식 이사는 개인사정 이유를 들어 퇴장해 12명이 마라톤 회의 끝에 이사장 선출에 들어갔는데, 자천타천으로 등장된 이사장 후보는 배무한, 이청광, 이동양, 지미 이 등 4명이었다. 원래 안건에는 이사장 후보 등록 절차를 논의하는 것이었다. 투표 결과 배무한 5표, 이청광 2표, 이동양 2표, 지미 이 1표가 나와 정관에 규정된 “재적이사 2/3찬성”에 의거 이사장은 선출되지 못했다.
이사회는 재투표를 통해서라도 이사장 선출을 시도했어야 했으나 이를 포기했다. 이사장이 선출되려면  ‘재적2/3찬성’규정에 따라 이날 출석자 인 12명 전원이 찬성해야 하는데 이는 전원이 합의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이날 이사장을 선출 투표에 들아가기전 쟁점이었던 ‘정관 위조’ 의혹은 지난해 6월9일자로 명시된 개정 정관을 받아들이기로 이사들이 합의하면서 일단락됐다.
이사장 선출을 두고 한달전까지는 계무림 이사장의 연임 고려와 배무한, 이청광, 서영석, 박윤숙, 윤난향 이사 등이 자천타천 등으로 거론됐었다. 그러나  이사회가 다가오면서 ‘배무한 대 이청광’으로 좁아지면서 박윤숙 이사와 윤난향 이사가 배무한 이사를 지지하는 쪽으로 선회하면서 한 때 배무한 지지이사들이 10명선까지 계산을 하기도 했다.




“우리 표는 10표”


여기에 계 이사장은 ‘연임 안한다’로 나오면서, 이사장 선출 불가능 작전으로 대응하면서 협상을 기다렸다. 계 이사장측은 배 이사측에게 ‘재단의 적자재정 해소’에 기여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10만 달러 선’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해 배무한 이사측은 ‘적자는 집행부가 책임져라’는 대응에 협상은 결렬됐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소식통은 “어차피 이사장은 선출되야 하기에 표가 많이 나온 배무한 이사측에게 다시 협상이 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이 소식통은 여기에서 박윤숙 이사와 윤난향 이사가 배무한 이사와 어떻게 구도를 잡아갈 것인가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이날  회의 초반에는 계무림 이사장측에서 박윤숙 이사와 윤난향 이사에 대한 제명건으로 초장부터 격론과 함께 팽팽하게 맞서는 바람에 시간만 흘러갔다. 제명건은 박 이사가  윤 이사와 함께 지난달 24일 오후 타운내 아로마 센터내 한 식당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자청해 집행부의 정관 바꿔치기 의혹을 제기한데서 나온 반발이다.
기자회견에서 박 이사는 계 이사장과 김진형 명예대회장 등 집행부측이 정관을 위조했으며, 공금 관리에 부정이개입됐다고 주장했다. 이자리에서 윤 이사는 노랑봉투를 들고 나와 ‘한국일보와 축제재단간의 문제점 증거물’이라고 했으며, 박 이사는 ‘핵폭탄급 자료’라고 말했다.
박 윤숙 이사가 제기한  “정관 위조”주장은 구체적인 증거들이 미비해 설득력이 없었다. 그리고 재미나는 사실은 재단  사무국 이 보관한 것과 이사들이 지니고 있는 정관들이 제각기 달라 어느 것인 ‘진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정관은 ‘2008년 1월6일 개정본’과 ‘2008년 5월27일 개정본’ 그리고 ‘2008년 6월 9일 개정본’ 등이 나돌아 제작기 ‘진본’으로 주장하고 나섰다.
이날  박 이사와 윤 이사 제명건은 결국 표결로 이어졌으나 찬성 5표, 반대 4표로 부결됐다. 만약 1표가 찬성에 보태졌다면, 제명이 의결되어 이사회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었다. 제명이 부결되자, 박 이사와 윤 이사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지기 시작했다. 박 이사는 회의장을 나와  취재진들을 불어 들이기도 했으나, 계무림 이사장이 완강한 입장으로 ‘비공개로 결정됐다’면서 취재진들의 퇴장을 요구했다.
한편 계무림 이사장은 3시간에 걸친 마라톤 이사회를 마친 뒤 “재선거가 불가피하다”며 “단일 후보를 추대하는 쪽으로 이사회 의견을 조율해 12월 혹은 1월 이사회에서 이사장을 선출하겠다”고 밝혔다. 정관에는 이사장은 ‘현 이사장 임기종료 전 11월 중에 선출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계 이사장의 임기는 올해 12월까지다. 한편 축제 결산과 관련 계 이사장은 “재단은 기부금을 받지 않는 단체인 만큼 결산을 공개할 의무는 없다”는 상식밖에 답변을 내놓았다.


뿌리깊은 파벌


지난 30일 이사회의 파행의 원인을 이해하려면 축제재단의 과거 행태를 살펴야 한다.
원래 한국의 날 축제는 72년에 설립된 ‘코리아 타운 번영회’ 라는 비영리 단체가  주축이 되어 당시 초대회장인 김진형 명예대회장의 주도로1974년 제1회 한인 축제를 개최한 것이 오늘날 축제의 효시가 되었다. 그후 1988년 ‘코리아 타운 번영회’가 ‘코리아 타운 교민회’로 개칭하면서 1995년 까지 축제를 주최하였다.
그후1996년 23회 축제부터는 확대 개편되어 개최되다가 박희태 LA총영사 시절인1998년에 LA교민회와 LA한인상공회의소와 통합하여 공동주최를 하게됐다. 그러다가 한인축제만을 개최, 운용하는 필요성의 의해 1999년에 ‘로스앤젤레스 한인 축제 재단’이라는 명칭으로 설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축제를 두고서 주최측 내부와 언론사간 마찰 등 여러가지 문제들이 복합적으로 파생해 불거저나온 것이 단독재단 설립이었다.
‘한국의 날 축제’ 36년 역사에서 창시자 김진형 명예회장을 제외하고, 축제재단의 공식적인 이사장 직함을 지닌 사람은 김남권 초대이사장(1999-2005년 재임)과 현 계무림 2대 이사장(2005-현재)뿐이다. 김남권 초대 이사장은 3번 연임한 후 당시 정관상 3회 이상4선을 할 수가 없어 6년 임기를 마쳤다. 계무림 2대 이사장은 현재 2회 연임 중이다.
김남권 초대 이사장이나 계무림 현 2대 이사장 모두 경선없이 이사장에 추대되는 형식으로 선출됐다. 정관에는 선거를 하도록 규정되어 있으나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김 초대 이사장은 당시 7명의 이사가 있었으나 하기환-계무림-김남권 3인 주도 체제에서 재단으로 시작되면서 김 초대 이사장이 선출됐다. 당시 하기환 이사는 상공회의소 출신이고, 나머지 2명은 교민회 출신이었다.
제2대 계무림 이사장은 지난 2005년 12월 6일 열린 이사장 선거에서 추대형식으로 이사장에 선출됐다. 당시 7명의 재적 이사 중 5표(재적인원의 3분의 2이상)를 얻어야  당선되지만 7명 이사(김남권,계무림, 김준배, 김진형, 하기환, 서영석, 이청광)들이 묵인하에 추대로 합의해서 만장일치라는 형식으로 선출했던 것이다.
당시나 현재나  재단 정관상 이사장 후보 자격은 재단 이사들에게만 피선거권이 있다. 당시 재단 이사진 구성이 ‘타운번영회派(김진형-김남권-계무림-김준배-)’와 ‘상공회의소派(하기환-서영석-이청광)’가 팽팽하게 나뉘어져 있어 양측의 맞대결 구도가 예상되었으나,  계무림 이사가 번영회 소속이어서 일단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으로 낙점됐다.
당시 타운 일각에서는 축제재단 이사장 선거의 피선거권이 재단 이사 7명에 국한된 재단 정관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도 높았다. 범동포적 단체로 성장한 ‘LA 한인 축제재단’을 놓고 “몇몇 유력 인사들이 이사진 감투를 나누어 가진 뒤 향후 이사장 자리를 ‘돌려먹기 식’으로 추대하는 모양새는 옳지가 않다”라는 의견의 목소리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이사회는 타운의 소리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국의 날 축제’를 말할 때, ‘김진형’이라는 인물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지난 36회 동안 ‘한국의 날 축제를 통해 그의 영향력이 없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 아니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의 1년은 ‘한국의 날 축제’와 동일선상에 있다. 그래서 그를 “미스터 코리안 패스티벌”이라고 한다. >













 ▲ 김진형
김진형 LA한인축제재단 명예대회장은 코리아타운의  올드 타이머로서 70년대에 올림픽 가, 웨스턴 가, 버몬트 가 지역 당시 60곳에 달하는 한인 업소에 ‘한글간판을 달기’ 운동 등 코리아 타운 건설에 개척자였다. 당시 30대 청년의 김 명예대회장은 ‘꿈’이 있었다.
그 때부터 김 대회장은 오늘의 ‘한류 문화’의 꿈을 지녔다. 당시 스럼가와 비슷한 올림픽 거리가 나중 ‘코리아타운’이라는 자랑스런 지역이 될 것이라는 상상을 한 동포는 거의 없었다.
김 대회장은 평양출신으로 서울대 문리대 불문학과를 졸업하고 국제 관광공사 비서실과 동경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중 뜻이 있어 68년 페퍼다인 대학원 종교학과로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을 와 청소부, 통조림 공장 직공 등 갖은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고생을 하다가 71년 올림픽 가에 한국서점을 개업했고,  ‘한글간판’ 달아주기 캠페인을 벌이는 등 오늘날 ‘한류’의 개척자 역활을 했다.
그는1972년 코리아타운 교민회(나중 번영회)를 창설해 초대회장(현재 명예회장)을 지내면서 사재 5천 달러를 쾌척, 74년 11월 4일에는 한국일보의 협력을 받아 제1회 LA 코리언 퍼레이드를 출범시켰다. 이름하여 ‘한국의 날 축제’를 태동시켜 주류사회에 한인들의 위상을 알렸고, 한인 커뮤니티의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내는 미주한인 이민 역사의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가 이룬 공적 가운데 하나는 LA 시의회가 1981년 8월 11일 오늘의 한인타운 지역을 ‘KOREA TOWN’이라고 명명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이다. 시의회는 김 대회장이 주도한 ‘코리아 씨티 프로젝트 안’을 받아 들여 올림픽 가, 웨스턴 가, 버몬트 가에 이르는 지역을  ‘코리아 타운’의 경계로 의결한 것이다.
그리고 81년 10월 30일에는 LA 시의회로부터 코리아 타운 파출소설립에 관한 승인을 얻어내는 데 힘써 한인타운 중심부인 8가와 놀만디 코너에 두 명의 경찰관이 순찰, 상주하는 등 치안유지를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김 대회장은 첫 부인과 사별 후 김은회 여사와 재혼했는데, 부인 김은회 씨와 공교롭게도 생일이 같다. 이들 부부는 2003년에 김 대회장의 칠순(七旬)을 맞아 고희(古稀) 잔치를 갖는 자리에서 부인인 김은회 씨의 은(銀)자와 김진형 씨의 진(鎭)자를 빌려 은진회(銀鎭會)라는 장학재단을 설립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김 대회장은 2004년 최장수 LA커미셔너직을 마치면 장학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과거 이민 1세대들이 미주지역으로 건너올 때는 가난한 조국을 두고 있었다. 그러한 시절에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국심에 불타 미주 지역에서 꿋꿋이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고 해냈다.내년으로 임기가 끝나 커미셔너 직을 그만두게 되면 이민 1세대로서 후진양성을 위해 힘쓰는 올드 타이머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 때로부터 36년이란 세월을 통해 ‘한국의 날 축제’의 실질적 선장으로서 혼신의 힘을 쏟았다.
공적도 많지만 그의 의지와는 달리 그로인해 분쟁과 갈등의 소지도 많았다. 언론사와도 마찰도 많았다. 지난해는 계무림 이사장이 갑작스런 질환으로 업무를 볼 수 없었을 지경에 설상가상으로 축제 행사가  펑크가 날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법을 따지기전에 ‘축제가 중단되서는 안된다’는 마음에서 ‘무슨 일인들 못하랴’는 심정으로 계 이사장의 권리를 이용하면서까지 재정 문제에 개입하는 불법을 저지르기까지 하면서 축제를 가동시켰다. 그의 공과는 역사가 심판할 것이다.
현재 한인축제재단 정관 제 9조에는 “재단 축제 창시자인 김진형을 명예 대회장으로 추대한다”로 규정되어 있다. 그에게는 최고의 영예인 셈이다. 한인단체들 정관에서 이처럼 한 인물의 이름을 정관에 명문화하여 명예를 준 예는 없다.
지난 36회동안 한국의날 축제를 돌아보며 그의 공적을 일일히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오늘의 파쟁에는 그도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축제재단은 그의 분신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그가 관여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는 축제재단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야 한다. 원로목사가 교회를 떠나지 않으면 그 교회는 분쟁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우리는 실지로 많이 보고 있다. 그것이 그가 태동시키고 키워온 축제재단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는 커뮤니티의 바램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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