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인권 운동서 배우는 4.29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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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수 한인들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지만 로사 팍스(Rosa Parks)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생소하다. 만약 한인들이 로사 팍스란 여성에 대해 많이 알고 그를 기렸다면 4.29폭동 때 수많은 한인들이 표적이 되는 비극은 없었을지 모른다.
한국전쟁이 일어났던 1950년대 미국 남부에서는 백인과 흑인이 한자리에 앉을 수조차 없을 만큼 흑백차별이 극심했다. 당시에는 그것이 법이고 사회질서였다.
1955년 12월 1일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시에서 봉재공으로 일하던 40대 초반의 흑인 여성 로사 팍스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앞자리가 비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후 백인 남자가 타며 좌석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당시 앞자리는 백인 전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팍스는 꼼짝 않고 있었다. 흑인 운전수가 다가와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경찰이 출동했지만 팍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곧 체포됐으며 14달러(벌금 10달러, 법원비용 4달러)의 벌금형이 내려졌다. 흑인과 백인 학교를 분리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 판결 1년 뒤 벌어진 이 사건은 현대 민권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이 소식을 들은 26세의 한 흑인 청년 목사가 ‘버스 안타기 운동’을 벌였고 일부 백인들도 참여해 무려 381일 동안 계속됐다. 그 20대 청년 목사가 바로 마틴 루터 킹이다. 1963년 8월 워싱턴 DC로 향한 그는 “자유의 행진”과 더불어 링컨 동상 앞에서 그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을 펼쳤고 1964년 미국 의회는 역사적인 민권법(Civil Right Act)을 제정하게 되었다.
민권법이 있기 전까지 미국에는 유럽 백인들의 이민만 자유로웠다. 한국인을 포함한 이종 민족들은 쿼터제에 묶여 극소수만 이민이 가능했다. 하지만 흑인들이 쟁취한 민권법 덕분에 이민차별이 크게 완화되면서 한인들도 이민개혁법의 혜택을 받게 됐다.
                                                                                             <성진 취재부기자>


4.29폭동 특집 기획연재
(1) 잊혀진 4.29폭동’의 진실
(2) 4.29 폭동성금의 진실(상·중·하)
(3) 한인정체성 확립과 4.29
(4) 4.29와 흑인민권운동
(5) 4.29와 미주한인사회
 



4.29폭동이 휩쓸고 간 직후 흑인사회에서는 이런 말이 나돌았다.
“우리들이 쟁취한 민권법 덕에 이 땅에 건너 온 한인들이 우리에 대한 이해심도 없이 오히려 우리를 깔보려 한다.”
민권법 통과 다음해인 1965년 이민법이 개혁돼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안, 히스패닉계의 미국 이민은 훨씬 쉬워졌다. 그러나 많은 한인들은 이런 속 사정을 잘 모른다. 지금은 거의 잘 쓰지 않지만 1970~80년대 이민 온 한인들은 흑인들을 “깜씨” 또는 “숫장사”로 부르며 멸시했다.
흑인 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하는 한인들 중에는 흑인 고객들에게 거스름돈을 손에 얹어주지 않고 던지는 버릇이 있었다. 어느 틈엔가 가게 안에 두꺼운 유리벽을 만들어 두고 손님들을 받는 촌극도 벌어졌다.
코리아타운의 식당에서 일하는 라티노들은 동료 한인보다도 더 힘들게 일하면서도 보수는 적게 받았다. 캘리포니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생각하는 라티노들에게 뒤늦게 온 한인들이 자신들을 차별하는데 대해 일종의 분노감을 지니고 있었다.
4.29폭동 때 한인 상점을 방화하고 약탈하면서 희열을 느꼈다는 일부 라티노 폭도들은 흑인보다 히스팩닉계가 더 많이 체포된 것을 두고 “인종차별”이라고 주장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일부 중국계들은 “우리는 한인과 다른 아시아인이다”라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당시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는 한 일간지에서 한 중국계 기자는 “중국인 상인들이나 일본인 상인들은 흑인 고객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왔다”면서 폭동을 보면서 “갑자기 내가 아시아인이라는 것이 두렵다. 무엇보다 한국인으로 보일까봐 두려웠다”라고 밝혔다. 도대체 우리 한인들은 아시아계에서 어떤 존재이고 라티노나 흑인들에게 어떻게 비춰졌을까.
1960년대 이전 미국에 온 대부분 한인 엘리트들이 현지에서 배운 것은 아메리카 땅의 원주민 인디언과 흑인들이 차별 당한만 하기에 당하는 것이고, 그들을 통치하는 백인들은 인권면에서 옳다는 왜곡된 현실이었다.
4.29 폭동 전후 일부 흑인 지도자들은 한인들을 일컬어 흑인지역의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는 “신종 이민자”라고 꼬집었다. 1965년 왓츠 폭동 이후 흑인이 유대인에게서 매상의 두 배를 주고 산 리커스토어를 한인들이 다시 다섯 배 되는 가격으로 사들인 것이 대표적 예다.
흑인 지역을 관장하는 당시 일부 시의원들은 한인피해상인들의 복구 작업을 교묘하게 방해하는 등 부당한 정치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흑인 시의원 정치인들에게 일부 한인 자본가들은 이 정치인에게 정치헌금을 내가면서 열렬히 지원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에 한인 폭동피해자들은 또 다른 ‘한’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4.29의 ‘한(限)’






미국에서의 민권운동은 무엇보다도 교육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않을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한 예로 ‘유색인종의 진보를 위한 전국연합’(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 : NAACP)은 인종 때문에 메릴랜드 로스쿨에 입학을 거부당한 ‘도널드 게인스 머레이 사건’이다.
1935년 휴스턴과 마샬은 법정에서 “메릴랜드에 흑인 법대가 없기 때문에 머레이는 백인 학교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해 결국 승리했다. 이는 흑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기억되고 있다.
“그가 우리에게 헌법을 가지고 온 것은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가지고 온 것과 같은 사건이었다.”
미국에서 흑인민권운동 당시 제일 많이 불린 노래는 “We Shall Overcome”이다. 반전가수로도 유명한 존 바에즈가 부른 이 노래는 한국에서도 민주화 운동의 애창곡이 되었다. 민권운동은 이 노래처럼 시작에서부터 어떻게 이를 극복해 나가는가에 더 의미가 있다.
버스좌석 버티기로 민권운동의 불을 지핀 로사 팍스는 그 후 봉재공 자리를 잃고 수많은 살해 협박에 시달리다 57년 남편과 함께 디트로이트로 옮겨가 의원보좌관으로 88년까지 일했다.
당시 그는 “우리가 언제쯤, 어떻게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결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며 스스로 민권운동의 시작점을 찾았음을 회상했다. 팍스는 90년대 후반 이후 건강이 악화되며 대중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1995년 그는 “난 항상 자유를 원했으며 그것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며 “자유는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1996년 팍스는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훈장을 받았다. 평범한 여성이라도 인간의 권리를 스스로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흑인 민권운동은 성공했던 것이다. 
4.29폭동은 미국의 대도시에서 발생한 특이한 폭동이었다. 많은 한인들은 흑인들을 주축으로 한 폭동이 한인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한 것으로 알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왜 흑인들이 유독 한인들을 공격했을까. 정말 한인들만이 그들의 공격 목표였을까.
아직도 많은 학자들은 대도시에서 발생한 1992년의 4.29폭동에 대해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지진도 주기적으로 발생하듯이 인간들의 폭동도 간격을 두고 발생했다. 1965년 LA 흑인 밀집지역인 왓츠 지역에서 도시폭동이 발생했다.
당시 흑인 지역에 있던 유태인 상인들이 폭동으로 밀려나고, 그 자리에 한인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30여 년이 지난 후 4.29폭동이 터졌다. 1992년 터진 4.29폭동은 소수민족으로 살아가는 미주한인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한인들은 심각한 무력감을 실감했다. 100여 년 전 이 땅에 온 선조들이 극심한 인종차별을 당했듯이 70년대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한인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소수인종으로 살아가면서 처음으로 정치력의 부재를 깨달았다.
미국 제2대 도시가 불에 타 순식간에 폐허가 되었고 한인 등 피해자는 거리에서 울부짖었지만 경찰은 폭도들을 바라만 보고, 사법부는 처벌이 없는 기이한 현상이 자유민주주의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더군다나 폭동 후엔 어떠한 배상이나 보상도 없었고 복구대책도 없었다. 폭도로 변한 가해자인 흑인과 라틴계는 흑인사회의 정치력을 활용하여 언제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는가-하는 식으로 적반하장으로 처벌받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는 것을 한인들이 목격한 것이다. 한인들은 흑인들의 정치력을 보고 왜 우리는 이런 정치력이 없는가에 처음으로 한인 공동체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인은 정치적 희생양

4.29폭동에서 분명한 것은 한인들이 미국 내에 오랫동안 지속된 흑백갈등의 전쟁에서 정치적 희생양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코리아타운이 그 표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백인들이나 흑인들도 한인에 대해 이해가 없었다. 그저 한인은 일본이나 중국 사이의 어느 쪽에 연결된 민족으로 치부해버리고 있었다.
조금 안다는 측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나라” 정도였다. 그 것도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이나 그들의 가족들 정도였다. 대부분 미국인들은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것이 4.29폭동 전의 한인에 대한 보통 미국인들의 생각이었다.
1970년대 한인 이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고국에서 비록 미국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고 살아 온 그들이었지만 미국은 “천국”으로만 여기고 있었다. 이민 온 한인들은 인종차별은 있을지 몰라도 인권은 평등하다고 믿었다. 한인 이민자들은 아직도 미국이 평등한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다는 현실을 모르고 LA공항에 이민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당시의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 내에서 비백인 인종들이 어떤 착취나 억압을 당해왔는지의 수난사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나 인식이 없었다. 그런 반면 근면하고 열심히 살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는 ‘기회의 땅’에 온 것이라고 믿었다. 미국에도 권력층이나 부자들이 특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상에서 민주주의 천국”이라는 망상에 잡혀 열심히 일하면 “민중의 지팡이” 경찰이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잘 보호해준다는 믿음도 있었다.
이런 한인들을 미국의 제도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공권력, 언론. 기업 들은 자신들의 기득권 보호를 위해 흑인들의 분노의 폭발에 대해 대치물이 있어야 했다. 한인 상점 여주인이 13세 흑인소녀를 과실치사로 숨지게 한 사건은 절호의 호재였다. 특히 언론들은 이 사건을 통해 흑인과 한인들 간의 갈등을 최대한 이용했다. 유태인 상인들이 빠져 나간 흑인촌에서 한인들이 이를 인계 받은 것은 마치 백인들 것을 대신하는 듯 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을 무차별하게 구타한 백인 경찰들에게 무죄평결은 개솔린 탱크에 성냥불을 던진 것과 다름이 없었다. 흑인들은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 한인 상점이 있었다. 흑인과 라티노 폭도들은 사우스 센트럴에서 북상하면서 마구잡이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코리아타운에 있는 한인들이 경찰에 전화를 했을 때 응답이 없었다. 한인 상점이 터렸을 때 경찰은 보고만 있었다. 이판사판이라 일부 한인들이 무기를 들고 스스로 재산을 지키려고 나섰다. 이런 모습을 미국 언론들은 “허가 받지 않은 총으로 나선 또 다른 난동자”로 묘사하고 있었다.
미국의 소방관들은 산불을 진화할 때 가끔 맞불을 놓는다. 4.29폭동 때도 LA 경찰은 폭도들이 웨스트LA나 베버리 힐스로 향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코리아타운을 완충지대로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노예제도의 멍애


UC 버클리대학의 한국계 엘레인 김 교수는 4.29폭동 후 발표한 글에서 <미국 언론이 한국계 미국인에 대한 악의를 증폭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첫째, 대중 매체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 지역 사회 내의 보도 가치 있는 다른 사건과는 대조적으로 이들 간의 화합 노력보다는 긴장 관계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었다.
둘째로는 이번처럼 옥상에서 총을 휘두르거나 자칫하면 군중을 향하여 총격을 가할지도 모를 불가해한 이방인이라는 인종주의적 상투형에 한국계 미국인을 활용하였다. 뉴스 프로그램과 토크쇼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한국계 미국인간의 긴장 문제를 다루면서 흑인과 백인만 나와서 얘기하도록 했으며, 출연자들은 이러한 긴장을 폭동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나는 어떤 유럽계 미국인이 무례하고 착취적인 한국계 상인들이 평화로운 인종 관계를 망쳐 놨다고 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기에 한국계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물려받은 인종 차별주의로부터, 그리고 미국 생활 조직 안에 이미 잘 짜인 경제적 부정의와 빈곤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돌리는 데 이용된 것이다.
이것은 할린스(L. Harlins)를 살해한 한국인 상점 주인과 빈센트 친(Vincent Chin)을 죽인 백인 남자들, 그리고 로드니 킹을 구타한 백인 경찰관들은 석방시키고 레너드 펠리티어(Leonard Pelitier)는 옥중에서 계속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도록 한 사법 제도에 의해서도 증명된다.>라고 말했다.
또한 김 교수는 이렇게 지적했다.
“내가 알기로 어떤 상업 혹은 공영 미주류언론도 한흑 합동 예배나 합동 뮤지컬 공연과 시 낭독회, 한국계 상인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역 사회와 청소년 대상 프로그램에 기부한 사실, 시민권 획득을 위한 한국인 이주민 강좌에서 자원 봉사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생님,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자료에 대한 한국어 번역 등 두 민족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미국에서 흑인 민권운동은 1600년대 미국 땅에 백인들이 처음 발을 디딘 이후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흑인들을 납치해 와서 노예로 생활하면서 점차 시작됐다. 그 후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되면서 미국 헌법에 약속한 인권평등을 요구하게 된다. 1865년 링컨 대통령 당시 남북전쟁에서 ‘흑인노예해방’을 선언했으나 백인들에 의한 인종차별은 계속됐다.
노예제도로 야기된 백인과 흑인간의 갈등은 오늘날까지도 미국사회를 갈라놓는 인종갈등이 되어왔다. 미국 역사에 있어서 흑인운동의 역사는 매우 길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스런 역사를 치유해 가며 투쟁해 민권법이란 산물을 탄생시켰다.
어쩌면 우리 한인들도 이들이 걸어간 길을 배워야 할지 모른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인의 정체성을 확립해야 한다. 100여 년 전 이 땅의 한인 선조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했던 그 정체성을 우리가 회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 다른 폭동에서도 똑 같은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 4.29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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