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星家 장남 이맹희, 과거 부도덕 외도 행각 끝내 법정소송 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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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가(家)가 끊이지 않는 남성들의 추문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 소위 재벌가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 폐쇄성으로 인해 루머도 끊임없이 생산되지만 삼성가 사람들의 추문은 단순 루머라 불리기에는 ‘선’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최근 삼성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장남이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형인 이맹희 씨가 거액의 양육비 청구 소송을 당해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 7일 서울중앙지법에 따르면 최근 박 모 씨가 이맹희 씨를 상대로 아들의 과거 양육비 4억8000만원을 달라는 소송을 냈다. 박 씨는 소장에서 “나는 영화배우 출신으로 1961년 이 씨와 만나 3년간 동거했고, 이 기간에 임신해 아들도 낳았다”며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이병철 삼성 회장이 크게 화를 내 어쩔 수 없이 관계를 정리할 수 밖에 없었고, 아들은 내가 키워야 했다”고 주장했다. 박 씨는 “내 아들은 이 씨 호적에 입적되지 않았지만, 1984~1986년 친아버지와 부산에서 몇 차례 만났고, 지갑과 볼펜, 시계 등을 받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 씨의 아들은 지난 2004년 이 씨를 상대로 자신이 친생자임을 확인해달라는 소송을 내 승소했다. 박 씨는 아들이 출생한 뒤부터 성년이 되기까지 20년 동안 매달 200만원으로 계산해 총 4억8000만원의 양육비를 청구했다.
삼성가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삼성가 장남 이맹희 씨의 양육비 청구 소송의 전말을 <선데이저널>이 쫓아가봤다.
                                                                                             <리차드 윤 취재부 기자>



박 씨는 서울중앙지법에 제출한 소장에서 “지난 1961년 이맹희 회장을 만나 3년간 동거를 했고, 이 기간 임신해 아들을 낳았다”며 “아들이 태어난 뒤부터 만 스무 살이 된 시점까지의 양육비를 한 달에 200만원 꼴로 산정해 지급해 달라”며 4억8000만원을 청구했다.
이병철 회장의 장남 이맹희 씨를 상대로 소송을 낸 박 씨는 무슨 목적으로 느즈막한 나이에 소송을 낸 것일까.
소송을 낸 박 씨는 부산 출신으로 1961년 영화 ‘황진이의 일생’에 출연했던 영화배우다. 현재 일흔이 넘은 나이지만, 여전히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맹희 씨와 헤어진 뒤 서울 충무로에 경양식집 ‘로제’를 차렸으며, 이후 잠시 미국 생활도 했다. 지금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입원 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 주변에 따르면 박 씨는 돈보다도 ‘자신의 아들이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들다운 대접 받기를 소망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소송 가액이 5억원에 미치지 않는 것도 이같은 이유라는 것. 
박 씨는 자신의 아들이 ‘재(在)’자 돌림을 쓰게 된 것도, “아버지 이맹희 씨가 가문의 돌림자를 따서 ‘재휘’라 이름지어줬기 때문”이라는 입장이다. 박 씨는 사석에서 “재현(50·CJ 회장), 재환(48·CJ 상무), 재휘 세 사람이 어렸을 때 함께 만나 같이 놀기도 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의 아들 이재휘(47)씨는 20세이던 지난 198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가 유학 중이던 1984년, 박 씨와 이맹희 씨, 그리고 아들 이 씨는 부산에 있는 이맹희 씨 별장에서 함께 만난 적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박씨는 “이 자리에서 이맹희 씨가 아들(이재휘 씨)에게 자신의 이니셜이 새겨진 지갑과 볼펜, 시계, 버클 등을 줬다”고 주장했다.
세 사람은 1986년에도 서울의 한 호텔에서 다시 만나 식사를 함께 했다. 박씨는 “당시 이맹희씨가 아들에게 ‘공부만 열심히 하고 돌아오라. 돌아오면 호적에 이름을 올려주겠다’고 약속했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두 아이의 아버지인 이재휘 씨는 이후 귀국해 얼마 전까지 인테리어 관련 사업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씨는 지난 2004년 법원에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고, 2006년 10월 대법원으로부터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아들이 맞다”는 확정 판결을 받았다.
이번에 양육비상환 청구소송을 당한 이맹희 씨는 현재 거주지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동생 이건희 현 회장에게 ‘대권’을 넘겨준 뒤로 이 씨는 한국을 떠나 세계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맹희 씨의 근황을 들었다는 한 관계자는 “이 씨가 최근 필리핀으로 거주를 옮긴 것으로 안다”며 “건강 문제로 서울과 필리핀을 오가며 치료를 받고 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이맹희는 누구

노년에 양육비청구소송에 휘말린 이맹희 씨는 원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의 장남으로 삼성그룹 후계 1순위에 있었다. 당초 이병철 회장은 장남인 이맹희를 그룹 후계자로 점찍어두고 10년 이상 후계자 수업을 해왔다. 반면 이건희 회장에게는 미디어 관련 계열사를 물려주고자 했다. 때문에 이건희 회장의 첫 직장도 동양방송이었다.
장남 이맹희씨는 어릴 적부터 약조가 돼 있던 손영기 전 경기도 지사의 딸 손복남 씨와 결혼했다.
하지만 이병철 회장은 1977년 3남인 이건희를 후계로 삼겠다고 결정한다.
한때 17개 계열사 경영을 맡으며 장남의 역할을 다했지만 일찌감치 그룹 경영에서 발을 빼야 했다.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입장에서 맹희 씨의 존재는 항상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묻어둔 이야기’,‘하고 싶은 이야기’ 등의 회고록에서 “고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제일모직 등 ‘제일’자 계열과 안국화재(현 삼성화재)를 나에게 넘기기로 했었다.”고 발언,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당대에 이루지 못한 맹희 씨의 꿈은 지난 2002년 장남인 이재현 씨가 CJ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어느 정도 풀렸다. 고려대 법대 출신인 이 회장은 삼성과 무관한 씨티은행에 공채를 통해 입사했다.
그러나 이병철 회장이 제일제당 경리부로 자리를 옮기도록 했다. 그는 이후 93년 잠깐 현재 이재용 상무 자리인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로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줄곧 제일제당과 함께 했다.
이 회장은 비록 CJ그룹이 삼성그룹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 차이가 나지만 삼성가의 장손으로 그 위상이 만만치 않다. 이병철 회장의 부인인 박두을 여사도 2000년 타계하기 직전까지 서울 장충동에서 이 회장과 함께 살았다.87년 이병철 회장 장례식때 영정을 들고 앞장선 사람도 이 회장이었다.
이맹희 씨가 물러난 이후 이건희 회장은 10년 가까이 선친 곁에서 경영수업을 받으며 차기 그룹을 이끌어가기 위한 준비를 거듭한다.  그렇다면 호암은 왜 이건희를 후계자로 선택했을까?
우선 장남인 이맹희가 삼성그룹을 이끌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병철 회장은 자서전인 호암자전을 통해 “장남 맹희에게 그룹 일부 경영을 맡겨보았다. 그러나 6개월도 채 못돼 맡겼던 기업체는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고 회고했다.
차남인 이창희 역시 복잡한 대조직을 관리하기에는 부족해 보인다고 판단했다. 이건희에 대해서는 “본인이 희망했다”고 짧게 설명하고 있지만 이것만으로 경영권 승계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결과적으로 이맹희 씨는 삼성그룹 후계자 자리를 둘째 동생 이건희에게 물려준 셈이 됐다. 
박 씨가 이 씨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삼성가에서도 알고 있었다. 1964년 무렵 고 이병철 회장이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해 박 씨에게 심부름꾼을 보낸 일이 있었다고 한다. “정말 이맹희 씨의 아들이 맞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맹희 씨가 돌림자를 쓰게 할 만큼 확실한 친자였지만 박 씨는 아들을 뺏길까 두려워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심부름꾼은 ‘이맹희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각서까지 받아갔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박 씨는 이 씨와 헤어져야만 했다.
헤어진 이후 3년간은 이맹희 씨가 꾸준히 생활비를 보내줬다고 한다. 아들 이 씨도 자주 보러 왔었다고. 하지만 이후 이병철 회장의 불호령이 떨어지면서 생활비도 끊겼고 이 씨는 아들을 만나러 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 씨가 박 씨에게 남긴 것이라곤 장충동에 위치한 20평대 주택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 뒤로 10년여 동안 이들은 만나지 못했다.










 ▲ 지난 1987년 11월 19일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 이병철 회장의 빈소에서 장남인 이맹희 전 회장(왼쪽 첫째)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 일행이 조문객을 맞고 있다.


상속재산청구 소송 전초전(?)

사실 이번 소송을 두고 재계에서는 ‘상속재산분할청구 소송의 전초전’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지난 2006년 친자확인소송에서 승소한 후 재계에서는 이 씨가 상속된 재산의 분할을 요구하는 소송을 진행할 것이란 예측이 나왔다. 하지만 지금껏 이 씨는 CJ그룹에 재산 분할 등 금전적인 부분에서 특별한 요구를 한 적이 없다. 지난 2008년 말경에는 이 씨가 이재현 회장을 만나 상속재산의 분할을 요구했다는 말이 한때 돌기도 했지만 이 씨와 CJ그룹 양쪽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다. 박 씨 측이 이번 양육비 소송에서 승소할 경우 상속재산분할청구 소송은 좀 더 수월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번 과거양육비상환 청구소송은 비록 피고인 이맹희 씨가 ‘소재불명’ 상태지만 재판 진행에는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 이 씨에게 소장이 직접 송달되지 못할 경우 공시송달을 거쳐 재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시송달은 원고의 신청에 따라 법원게시판에 소장을 게시한 후 피고인이 소장을 직접 받은 것과 동일한 효력을 발생시키는 방법. 피고인이 국내 거주인인 경우 게시한 날로부터 2주, 외국인 경우에는 2개월간 공시를 거친다.







이건희 또 다른 형은 누구?

이맹희 씨와 이건희 회장 사이에는 또 다른 형제가 있었다. 바로 91년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창희 씨다. 그는 집한비사건(사카린 불법유통사건)으로 한때 수감생활을 하기도 했고 67년 삼성이 인수한 새한제지(전주제지) 이사로,68년에는 삼성물산 이사로 일했지만 그룹 경영에서는 한발 비켜서 있었다. 창희 씨는 고 이병철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와세다대 동문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일본인 이영자 씨를 아내로 맞이했으나 일찍 생을 마감했다.
창희씨 사후 새한은 부인 이영자씨를 회장으로 97년 새 CI를 선포하며 독립그룹으로 발을 내디뎠지만 곧바로 경영위기를 겪고 만다. 2000년부터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돌입했는데 채권단에 따라 ㈜새한 계열과 새한미디어 계열로 나눠졌다.
새한은 99년 일본 도레이사와 3대7 합작을 통해 도레이새한을 출범시켰다.
2000년 지분을 채권단에 양도한 이영자 전 회장과 아들인 이재관 전 부회장은 현재 미국에 체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새한은 삼성의 분가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몰락하고 말았지만 혼사만큼은 화려했다. 장남 재관씨는 동방그룹 김용대 회장가의 딸인 희정 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재관 씨는 ㈜동방 주식 1만 6000여주를 갖고 있지만 경영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재찬 씨는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의 딸인 선희 씨, 재원 씨는 김일우 서영주정 사장의 딸과 결혼했다. 막내딸인 혜진 씨도 조내벽 전 라이프그룹 회장가로 시집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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