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길 교수가 뿔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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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여행에서 여행사나 주관 업체들의 불성실로 즐거워야 했던 관광 일정이 망가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닌데 이번에는 잘 알려진 노교수가 봉변을 당해 화제다.

라디오코리아 방송을 통해 시사칼럼을 16년째 해오는 김동길 교수가 LA에서 관광 일정에서 푸대접을 받아 노발대발 했다는 소식이다.

사연인즉 김 교수는 노구의 몸을 이끌고 지난달 우리크루즈가 주관하는 지중해 크루즈 여행에 강연자로 나섰다가 유럽에서 LA로 돌아오는 항공편에 크나큰 불편을 겪어 LA에서의 다른 스케쥴에도 지장을 받아 화가 폭발했다는 것. 이 불똥은 지중해 크루즈 관광을 주선한 라디오코리아 측에 떨어졌다.

이번 지중해 크루즈 관광에는 라디오코리아 측이 접수 받은 참가자와 우리크루즈 측이 접수 받은 관광객 등 약 80명이 참가했는데 문제는 돌아오는 항공편에서 발생했다. 지난달 8일부터 16일까지 8박9일 일정의 지중해 크루즈 관광 참가자들이 관광을 끝내고 유럽에서 LA로 돌아오는 파리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연금개혁 법안에 반대하며 노동계가 전국적인 파업을 벌인 관계로 파리 공항의 항공계가 심한 몸살을 알아야 했다. 덩달아 관광업계도 타격을 크게 받았다. 이 바람에 김동길 교수 동행의 지중해 크루즈 관광 참석자들도 LA로 돌아 오는 항공편 연결에 문제가 생겼다.

우리크루즈 측은 항공편에 차질이 생기자 LA로 돌아오는 관광객들을 2개 팀으로 나눠 LA로 귀환시켰다.
일부 관광객들은 하루를 더 묵어야 하기에 호텔에서 숙박을 해야 했다. 여기에 김동길 교수도 포함됐다. 김 교수는 예정된 스케쥴로 LA에 돌아와야 하는데 관광 편을 담당한 우리크루즈 측은 호텔 예약이나 항공편을 빠른 편으로 주선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이 김동길 교수 측의 주장이다.

김동길 교수의 이름으로 모집한 관광 일정에 주빈격인 김 교수를 제대로 안내를 하지 못한 관광회사나 이를 주선한 라디오코리아 측에게 김 교수는 섭섭한 마음을 주위 친지에게 토로하면서 이야기가 번져 나갔다.

김동길 교수는 지난 25일 오후 2시 LA영생교회에서 재향군인회가 주최한 시국강연회 연사로 참석한 후 참석한 일부 향군 관계자들과 만나 자신이 지중해 크루즈 관광에서 당한 수모(?)를 이야기하면서 “마음 같아서는 소송도 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김동길 교수는 이번 지중해 크루즈 관광 일정에 나섰다가 큰 슬픔을 겪어야 했다. 평소 호칭을 “형”이라 했던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서기의 사망 소식을 지중해 선상에서 들었다. 당시 김 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려 비통한 마음을 적었다.


김 교수의 여행 중 눈물 “황장엽 형, 그렇게 떠나시다니!”




















 

지중해에서 형의 돌연한 서거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지난 2일 제 생일에 오셨을 때 몸이 수척한 것은 여전하셨지만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다고 느꼈는데 어찌된 일입니까. 그 날도 단 둘이 앉아서 김정일의 하는 짓을 잘 알고계신 터이라 “그 놈이 머리는 빨리 도는데 아주 나쁘게 돌아요”하며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제 집에 와서 점심을 나누고 떠나실 적에는 양복 속주머니에 용돈 쓰시라고 봉투 하나를 넣어 드리는 것이 동생인 저의 즐거움이었는데, 아! 이토록 허무하게 우리들의 관계는 끝나고 마는 겁니까. 서럽고 아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두 사람의 우정은 형이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고 나서 얼마 뒤에 아직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군의 보호 하에 계셨을 때, 하루는 단장되는 이가 전화를 하고 황장엽 선생이 김 교수를 만나고 싶어 하는 데 올 수가 있겠느냐고 묻기에 가겠다고 답하고 군의 정보기관이 관리하는 그 곳까지 찾아가 만나는 시간부터 시작이 됐습니다.

군살이라고는 그 몸, 그 얼굴, 어디에도 붙어 있지 아니한 깡마른 형의 첫 인상을 지금도 잊지 못하는데 눈빛이 남달리 날카롭던 그 기억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하기야, 그 엄청난 희생이 뒤따를 줄을 다 알고 감히 몸을 격랑에 내던진 그런 ‘지독한 인간’의 표정이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형은 나보다 5년이 연장이셨는데,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군에 끌려가 소련국경 어디에선가 목숨을 잃고 작은 상자 속의 한 줌 재가 되어 집에 돌아온 저의 친형과 나이가 한 살 차이여서, 그런 인간적인 정을 더욱 느끼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형은 김영삼이 대통령이던 시절에는 그런대로 견딜만했지만 그가 얼마 뒤에 물러나고 적어도 남북관계를 생각하면 절대로 청와대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될 인간들이 그 집에 들어서게 되면서 예기치 못했던 엄청난 시련과 고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김정일에게 아첨을 일삼는 자들이 대통령이랍시고 청와대에 들어앉았으니 형이 눈의 가시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하겠습니다.

두 차례나 형을 암살하려는 악당들이 당국에 의해 검거되었을 때 어떤 신문사의 기자가 물었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지 않느냐고. 그 때 황형은 대답했습니다. “내가 나이가 몇인데!” 한국사람 나이로는 88세, 천수를 누렸다고 여겨집니다. 내년 형의 생일에는 ‘산수’를 기념하여 우리 집 마당에서 냉면 파티라도 한번 크게 벌이고 싶었는데! 억울하게 목숨 잃은 부인과 다른 식구들도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겠습니다.]


2010/10/19(화) 김동길<www.kimdonggi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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