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삼 놀랄 것도 없다. 37년 전 재판 과정에서 다 밝혀진 일’
‘최태민-박근혜가
10.26 박정희시해 동기였다’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압도적 찬성으로 국회를 통과한 가운데, 지난 1979년 10월 박정희 전대통령시해사건의 주범인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형제들은 ‘새삼 놀랄 것도 없다. 이미 37년전 김재규중정부장이 최태민의 비리를 밝혔고, 박정희시해사건의 원인이 됐다’고 담담하게 밝혔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매제인 오수춘 한의학박사는 탄핵소추안 국회가결다음날인 지난 10일 만나 이같이 밝히고, ‘김 부장이 37년 전 자신을 버리면서 이를 응징했음에도, 또 다시 최태민의 딸이 국정을 농단한 것은 정말 통탄스러울 뿐’이라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박정희시해사건이후 김재규 전부장의 8남매중 적어도 여동생 2명과, 김전부장의 동서 1명이 천신만고 끝에 도망치다시피 미국으로 떠나 뉴욕에 정착했지만 여동생 1명과 동서는 사망했고 현재는 김전부장의 넷째 여동생 김단희씨와 부군 오수춘 한의학박사만이 생존해 있다. 기자는 박근혜대통령 탄핵에 대한 김재규부장 일가를 만나 그간의 전황과 소회를 들어보았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김재규 전 중정부장의 매제인 오수춘 한의학박사, 육사를 졸업한 엘리트군인이지만 대령으로 진급하지 못하고 ‘자의반타의반’ 전역이후 1986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을 와 한의학공부를 한 뒤 현재 뉴욕 모처에서 한의원을 운영 중인 오 박사는 군인출신답게 직설적이고 다혈질이었다.
오 박사는 국회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박근혜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통과된 다음날이 지난 10일 토요일 오후 4시 50분 뉴욕 자신의 한의원에서 기자와 만나 ‘최태민의 국정농단은 이미 37년 전 명백히 밝혀졌던 문제’라며 ‘새삼스럽게 왜 나를 찾아오고 호들갑이냐’며 호통부터 쳤다.
오 박사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지난 1979년 최태민 비리문제를 박정희대통령에게 명명백백하게 지적했다. 특히 딸인 박근혜가 최태민에게 현혹되면서 온갖 부정부패를 일삼고 있음을 상세하게 보고했다’고 강조했다. 오 박사는 ‘박대통령이 충심으로 자신을 보필하는 김 부장의 충언을 믿지 않고, 박근혜를 불러서 친국을 실시함으로써 김 부장은 지울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으며, 특히 박대통령의 국가지도자로서의 자세를 의심하는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오 박사는 ‘당시 박대통령이 박근혜-최태민의 문제에 대해 사심을 버리고 국가지도자로서 올바른 자세를 보였다면, 37년이 지난 오늘, 그 딸이 또 다시 최씨일가에 의해 농락당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박사는 ‘평소에는 김전부장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던 사람들까지 최근 전화를 걸어온다’며, ‘이미 37년 전에 밝혀진 문제이며, 현재 모든 것이 인터넷과 유투브에 공개돼 있다. 그것부터 다시 찾아보고 들어보라’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최태민 비리 관련 보고서 갑론을박
기자는 오 박사의 반문에 대해 ‘네 재판과정에서 김전부장이 주장한 내용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다짜고짜 군대는 갔다 왔느냐고 물어 현역으로 제대했다고 했더니, 어느 부대에 있었느냐는 물음이 이어졌다. ‘방공포부대에 있었다’고 하자 ‘나이롱부대구만. 방위병아니냐’고 물었고 ‘현역’이라고 하자, 그래도 ‘보병에 비하면 나이롱부대’라고 ‘규정’한 뒤 그제야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오 박사는 자신은 1979년 1월부터 중앙정보부가 운영하는 1년 과정의 정보학교에 재학 중이었다고 밝혔다.
중정이 운영하는 정보학교는 군과 정보부 요원들이 교육을 받는 곳이고 특히 정보부내 엘리트들이 거치는 과정이어서 한국의 모든 정보가 자연스럽게 취합되는 곳이라고 밝혔다. 매일 아침 교육 전에 정보부출신 교육생들이 자신이 재직하던 곳과 전화해서 이것저것 정보를 물어오고, 이 정보가 자연스럽게 유포된다는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김전부장이 최태민에 대한 보고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오 박사는 10.26 수개월 전 정보학교 일과개시 전 정보부출신 교육생들의 대화를 들었다고 한다. 정보부출신 교육생들은 ‘오늘 부장님이 최태민관련보고를 한다는데, 그게 잘될까, 대통령가족이야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데, 피붙이 이야기를 하면 대통령이 받아들일까’하며 갑론을박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정보부 교육생들은 ‘아마 잘 안 될거야, 힘들어’하며 결론을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정보부교육생들은 ‘부장님이 제대로 한건 하셔야 되는데’하며 걱정을 늘어놓았다.
오 박사는 정보부교육생들이 ‘한건’이라고 말한 것은 ‘간첩단사건’같은 사건을 말한다고 풀이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동베를린까지 정보부요원들을 급파, 이응로씨 등을 한국으로 붙잡아 온 ‘동백림사건’처럼 국민들이 깜짝 놀랄 사건을 말한다는 것이다. 오 박사는 김전부장이 간첩사건을 조작하던 전임자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며, 그 같은 종류의 ‘한건’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리고는 정보부요원들의 대화를 듣고는 최태민관련보고를 박대통령이 수용하지 않는다면 큰 사달이 나겠구나 생각했다는 것이다.
피붙이에 대한 빗나간 박통의 ‘근혜사랑’
오 박사는 자신의 기우가 맞아 떨어졌고, 정보부 요원들의 판단이 맞았다고 밝혔다. 박대통령은 김전부장의 보고를 내쳤다는 것이다. 오 박사는 자신이 가장 분노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라며, 박대통령과 김전부장의 관계는 군대로 따지면 ‘사단장과 참모장’의 관계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나 마찬가지라고 밝혔다.
김전부장이 그토록 충심어린 보좌를 하며, 쉽게 입에 담을 수 없는 박대통령자녀문제까지 사심없이 보고했음에도, 박대통령이 김전부장의 보고를 믿지 못하고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고 밝혔다. 오 박사가 밝힌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란, 박대통령이 딸인 근혜를 불러 김전부장 보고의 사실여부를 따지는 친국을 말한다고 설명했다. 박대통령이 국가지도자로서의 냉정함을 잃고 사심에 치우침으로써 그때 이미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오 박사는 한참을 설명하더니 커피 한잔을 내왔다. 다정다감하게 ‘우리 집은 대접이 이렇다, 이해하라’며 말을 이어갔다. 오 박사는 박정희시해사건을 짐작하지는 못했지만 10.26 약 1주일 전 자신에게 의미심장한 일이 있었으며, 훗날 그 의미를 알게 됐다고 밝혔다.
박정희시해사건 약1주일 전 정보학교로 김전부장 비서실장인 박흥주대령이 자신을 찾아왔다고 한다. 정보학교의 점심시간이었다. 박 대령은 김전부장이 찾는다며 오 박사에게 다짜고짜 차에 타라고 한 뒤, 어디론가 데려갔고, 그곳은 남산 정보부가 아니었다고 한다. 훗날 알고 보니 그곳이 궁정동 안가였다는 것이다.
오박사는 박흥주대령의 차를 타고 가면서 ‘정보학교를 마치면 외국 대사관의 무관으로 파견될 수 있기 때문에 사정상 빨리 무관으로 나가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를 부른 것인가’ 내심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같은 예상은 빗나갔다. 이날 김전부장과 매제인 오 박사의 만남은 약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정보학교는 시간을 엄격히 지키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돌아가야 하기도 했지만, 오래 나눌 이야기도 아니었다. 김전부장은 얼굴이 창백하고 초조한 상태로 매제에게 말했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군인답게 정도를 걸어라, 결코 흔들리지 말고 잘 처신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비장함이 느껴졌다고 한다. 이날 만남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라’ 이것이 매제에게 전한 유언이 됐다는 것이다.
박흥주 통해 궁정동서 마지막 10분 만남
오 박사는 이때가 김전부장이 어떤 모티브에 의해 모종의 결심을 굳힌 상황임을 시해사건 뒤에야 알았다고 밝혔고, 그 모티브가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오 박사는 이 같은 일화를 소개하며, 김전부장이 박대통령을 사살하며 최태민의 국정농단을 엄단했지만, 결국 박대통령의 딸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도 최를 멀리 하지 못함으로써 오늘날의 비극이 잉태됐다고 밝혔다.
최태민의 딸 최순실일가가 국정을 농단한 것으로 보이지만, 더 큰 책임은 박근혜대통령에게 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유로도 대통령을 사살한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 그래서 김전부장은 군법회의 재판 끝에 사형언도를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그가 왜 그런 일을 저질렀을까 되새겼다면, 또 다시 최씨일가가 대한민국의 비극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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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최태민 단죄 못한 박정희가 부메랑…오늘의 비극 잉태’
‘박정희정권의 기형아가
바로 자신의 딸 박근혜’
오 박사는 1971년 12사단에 근무하며 ‘육사출신의 별난 노총각 장교’로 알려졌을 때, 장군들의 소개로 김전부장의 넷째 여동생을 만나 결혼에 골인했다. 오 박사는 1972년 유신헌법 제정이후 부부동반으로 3군단장으로 재직 중인 김전부장의 공관을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김전부장은 보안사령관으로 3년간 근무한 뒤 3군단장을 맡았던 상태, 오 박사는 ‘이제 유신시대가 됐으니 박대통령의 통치가 더욱 원활해 질 것 같습니다’라고 말을 건넸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고 한다.
김전부장은 ‘내가 북한과 남한의 체제를 상세히 비교, 장병들이 자연스럽게 남한이 우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정신교육 교범을 작성했는데, 박정희가 모두 망쳐놓았다. 유신헌법으로 남한 체제의 우수성이 모두 사라졌다’며 박대통령을 신랄하게 비판했다는 것이다. 오 박사는 이처럼 김전부장이 국민을 우선시하고 공사구분이 명확했다며 박대통령 시해는 잘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민을 위해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스스로를 던진 것임은 분명하다’고 강조했다.
국가원수 시해범인 가족 이유로 불이익
오 박사는 중앙정보부 정보학교 위탁교육전인 1978년 말까지 9사단 보병대대장으로 근무했다. 후일 9사단은 노태우 전대통령이 사단장을 맡았고 10.26사건이후 전두환 등 신군부의 권력 장악을 위해 1979년 12월 12일 밤, 서울로 진격했던 부대다.
오 박사는 자신이 중앙정보부에 파견된 뒤 노태우소장이 사단장을 맡았다며, 만일 자신이 정보학교에 파견되지 않고 9사단 보병대대장으로 계속 근무했다면 명령에 의해 서울로 출동할 수 밖에 없는 불운한 장교가 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오 박사는 1978년 9사단 보병대대장으로 근무하며 보국훈장까지 받을 정도로 우수한 장교였지만 대령진급에서 줄줄이 미끄러졌다. 국가원수를 시해한 범인의 가족으로서의 당연한 운명이었다.
1986년 자의반타의반 중령으로 예편한 오 박사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준비했다. 예편했지만 감시의 눈초리가 번득이고 있었기 때문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NYU 대학원에 응시해 입학자격을 얻은 다음 자신을 담당하는 경찰서 보안과 형사에게 1986년 8월께 미국유학을 떠날 것이라고 스스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그 한 달 전인 7월 가족들과 유학을 떠나기 전 경주로 여행을 간다며 집을 나섰고 그 길로 김포공항으로 달려가 뉴욕행 여객기에 몸을 실었다.
형님이 공항에 환송을 나왔지만 만나서 인사를 나눌 형편도 되지 못했고 멀리서 손만 흔들고 헤어져 이민 길에 올랐다, 뉴욕에서 갖은 고생 끝에 다시 한의학을 공부, 약 15년만인 2001년 5월11일 한의사 면허를 획득한 것으로 확인됐다. 뉴욕주 확인결과 한의사면허번호는 ‘1751’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한의원을 개원하는 한편, 최근에는 브롱스의 한 병원에서 ‘페이닥터’로 일하며 하루 60여명의 환자를 보고 있다고 밝혔다.
10.26 거사 동기는 바로 최태민-박근혜 추문
그렇다면 오 박사가 호통 치다시피 말했던 ‘37년 전 이미 김전부장이 모든 것을 다 밝혔다’라는 대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박정희 시해사건 재판과정에서 김전부장이 밝힌 ‘거사동기’, 즉 시해동기를 말하는 것이다.
김전부장은 육군군법회의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자 즉각 항소를 했다. 1980년 1월 21일 이돈명, 강신옥변호사 등 김전부장의 변호사 7명은 육군계엄고등 군법회의에 항소이유서를 제출했고 같은 날 김전부장 자신도 항소이유보충서를 제출했다.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것은 변호사들이 제출한 항소이유서이다. 요약하자면 ‘1975년 5월 구국여성봉사단 총재로 있는 사이비목사 최태민이 자칭 태자마마라 칭하며 사기횡령 등은 물론 여자들과의 추문도 있어 대통령에게 보고했으나 대통령은 ‘정보부에서 그런 것도 조사하나’ 반문해서 놀랐고, 큰딸 근혜가 부인하자, 직접 조사하고 최태민을 총재에서 물러나게 됐지만 나중에 보니 다시 근혜가 총재가 돼 있더라. 근혜는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야 하며, 회계도 똑바로 해야 한다고 건의했지만 대통령이 그에 대해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이것도 거사의 동기가 됐다’ 이런 내용이다. 이것은 변호인들이 제출한 내용이다.
같은 날 김전부장이 직접 작성한 항소이유보충서는 이보다 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전부장은 ‘본인이 결행한 10.26의 혁명의 동기가운데 간접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한 가지는 그것이 박대통령이나 가족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공개된 법정에서는 밝힐 수 없는 것이지만, 꼭 밝혀둘 필요가 있으므로 이 자리에서 밝히고자 합니다’라며 대통령가족들의 문제를 지적했다.
놀랍게도 항소이유보충서를 확인한 결과 박근혜뿐만 아니라 박지만의 문제까지 각각 별개로 언급돼 있었다. ‘구국여성봉사단이 많은 부정을 저질렀고 여성단체의 원성이 자자해 중앙정보부 백광현 안전국장을 시켜 조사하고 박대통령께 결과를 보고했으나, 박대통령은 이를 믿지 않고 친국까지 실시했고, 그 뒤 근혜가 총재가 되고, 최태민은 명예총재가 되는 등 대통령이 개악을 저질렀다, 지금도 조사보고서가 중정 안전국에 보관돼 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박지만의 지나친 성관계 오입문제도 직언
또 ‘지만군의 문제’라는 소제목 하에 깜짝 놀랄 내용을 대통령에게 보고했음을 밝혔다. ‘육사에 입학한 지만이 2학년 때부터 서울에 외출, 호텔 등에서 육사생도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오입을 하고 다녔다. 그래서 다른 학교에 전학시키거나 외국유학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밝힌 것이다.
부정한 성관계를 뜻하는 ‘오입’이라는 단어를 언급하고 있다. 지금은 세간에 박지만씨가 누구누구와 어울려 부정한 성관계를 하고 다녔다는 소문이 자자하지만, 당시 박지만이 오입을 하고 다닌다고 보고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박대통령은 지만을 계속 육사에 다니게 했고, 소위로 임관한 것은 물론 대위까지 진급한 뒤 예편했다. 그리고는 마약복용혐의로 무려 6차례나 구속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같은 항소이유서와 항소이유보충서를 살펴보면 최태민의 국정농단은 37년이 지난 지금 데쟈뷰처럼 되살아난다. 박근혜 대통령은 41년 전인 1975년부터 최태민의 손아귀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37년 전 아버지 박정희 전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도 모자라 37년이 지난 오늘 대한민국을 절망으로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최태민이 41년전 박근혜대통령을 휘어잡은 그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그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근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최태민의 망령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다. 오후 6시50분까지 약 2시간 5분정도에 걸친 인터뷰 끝에 오박사는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었고, ‘궁금한 일이 있으면 다시 오라’며 ‘과거를 모르면 또 다시 오판한다. 새로운 것을 찾기 전에 지나간 일부터 찬찬히 되돌아보라’는 말을 남겼다.
가족들 사건 이후 도망치듯이 무일푼 한국 탈출
오 박사 외에도 김전부장의 둘째 여동생인 김재숙씨 부부도 1980년 도망치다시피 무일푼으로 한국을 빠져나와 뉴욕에 정착했었다. 뉴욕의 모교회목사의 도움을 받으며 악착같이 살았고, 델리 운영으로 돈을 모았고, 집도 사는 등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부군과 함께 수십 차례 차를 몰고 미국 대륙횡단을 하며 인생을 즐기기도 했었다. 1937년 5월 6일생인 김씨는 내가 잘 아는 선배의 어머니와 여고동창이라서 두세 번 만날 수 있었다. 김전부장에 대해 묻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야기 하겠다’고 했지만 남편을 남겨두고 지난 2014년 9월 24일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 김전부장의 손윗동서로 10.26당시 주일공사로 근무했던 심리학박사인 최세현씨도 뉴욕에 정착했었다. 본보는 지난 9월 15일 발간된 1042호에서, 외교부 비밀전문을 입수, 10.26직후 최세현박사의 난처했던 상황과 일본탈출비화를 소개했었다. 그리고 지난 10월 6일 반기문유엔사무총장의 조카인 국제사기꾼 반주현씨의 은신처를 찾으러 가는 길에 최박사의 소재도 찾아 나섰었다. 10월 6일 오전 반주현과 관련이 있는 뉴저지 주택들을 가가호호 방문, 테너플라이에 은신한 반씨를 찾아낸 다음 오후에는 뉴저지 포트리로 추정되는 최씨의 주거지를 방문했었다. 당초 최씨의 소재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2000년대 초반 모 방송에 잠시 비쳐졌던 아파트 사진 한 장뿐이었다.
난감했지만 그 아파트 사진은 포트리에서 유명한 한 아파트로 확인됐다. 다짜고짜 관리사무소를 방문, ‘친구의 아버지인 최씨를 찾는다’고 둘러대며 최씨의 소재를 물었고, 관리인은 컴퓨터로 최박사를 검색했다. 관리인의 감시 속에 컴퓨터 모니터를 살짝 엿보자 ‘쳐다보지 말라’는 엄포가 이어졌지만 최박사가 성을 ‘CHOI’가 아니라 ‘CHOE’를 사용하며 15층에 살고 있음을 알아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척 돌아 나와 15층 해당호수를 눌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 때 보고서 받아들였다면 최순실 게이트 없었을 것
최박사는 1923년 6월생으로 김전부장보다 2살 많다. 생존해 있다면 93세다. 정말 생존해 있을까 하는 흥분속에 집으로 돌아와 ‘사설 정보사이트’를 통해 최세현에 대한 검색에 나섰다. CHOI가 아니라 CHOE로 했더니 금방 최세현박사가 검색됐고, 내가 방문했던 아파트가 주소지로 명시돼 있었다. 생일은 1923년 6월 14일이라고 나왔지만 그 아래에 지난 2009년 12월 8일 사망했다는 사실도 기록돼 있었다. 2009년 86세를 일기로 사망한 것이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전산망에는 예전 거주자까지 고스란히 기록돼 있어, 관리인의 검색 때 최박사가 검색됐던 것이다.
과연 김전부장의 둘째 여동생 김재숙씨와 손윗동서인 최세현박사가 생존해 있었다면, 최태민일가와 함께 국정을 농단하다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한 데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가? 아마도 그들도 김전부장이 최태민 박근혜의 부정부패에 대한 엄단을 직언했지만, 그 직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오늘의 사태가 초래됐다고 안타까워 했을 가능성이 크다. 결국 박정희 전대통령이 민주주의를 역행, 종신집권을 위한 유신을 단행하는 가 하면, 국가지도자로서 공사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대한민국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자신의 딸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고 분석할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정희 정권의 기형아가 바로 자신의 딸인 박근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