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점 4·29 폭동 26년전 우리가 기억해야되는 이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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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문화부터 익혀라”

한국에서는 4.16 세월호 참사사건 4주년을 맞아 전국민들이 애도의 물결을 이루고 있지만 정작 26년 전인 지난 1992년 4월 29일 발발 코리아타운은 시뻘건 불바다로 잿더미로 변했던 LA폭동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며 형식적인 행사로 치부되고 있는게 작금의 상황이다. 이제 아무도 그날의 피해참상을 기억하는 이들이 없다. 분노한 흑인들은 무슨 이유로 무엇때문에 방화와 약탈 그리고 살인까지 자행했는지 조차 망각하며 오로지 외적 성장에만 치우치고 있어 안타깝기만 하다.
<성 진 취재부기자>

흑인그렇게 26년이 덧없이 지난 지금의 코리아타운은 지금 LA역사 이래 최대 건축 붐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LA시 당국으로부터 허가 받은 대형 건축 건만 52개가 코리아타운내에서 건축이 진행되고 있다. 그중에는 한미박물관과 주상 복합건물도 있다. 외형적으로 코리아타운은 “건축 붐 타운”이지만, 코리아타운 경기는 좋아 보이지 않는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코리아타운은 시뻘건 불바다로 잿더미로 아비규환이었다. 1992년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LA에서 주로 흑인과 남미계 폭도들에 의한 도시 폭동으로 대대적인 약탈, 폭행, 방화 및 살인이 발생했다. 사망자는 한인 청년 에드 이(당시 18세)군을 포함해 50여명이고 부상자는 2,000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은 11,000명 이상이었다. 경찰로서는 폭동이 진압되지 않아 4,000여명의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출동해서야 진압이 될 정도였다.

짧은 이민역사가 만든 자업자득 결과

재산 피해액만도 약 10억 달러에 이르렀다. 한인이 운영하던 2,000여 건물이 파괴되었고 재산 피해만도 4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 폭동은 그때까지 LA에서 일어난 12번째 폭동이지만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당시 한인사회는 최대 피해자였다. 폭동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991년 3월 3일 LA에서 백인 교통경찰관들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하는 장면이 언론에 방영되면서 흑인 사회는 흥분 하였다. 그 사건이 있은지 10일 후인 3월 16일에는 한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오렌지 주스를 훔쳐 나간 것으로 생각해, 주인 두순자씨와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와 실랑이 끝에 두씨가 주먹으로 안면을 수차례 강타당하자 생명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라타샤에게 권총을 발사하여 그 소녀가 사망한 것이 흑인 사회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백인 경찰관의 폭행 사건은 피해자인 로드니 킹이 백인 교통경찰관들의 집단구타로 평생 청각장애인이 될만큼 경찰심각한 사건이었는데도 1992년 4월 29일 열린 법정에서 배심원들에 의해 무죄로 생각되는 평결로 가볍게 처리 되었다. 이같은 판결에 특히 흑인 사회는 들끓었다. 미국 사회의 특권계층인 백인에 비해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에 젖어 잠재적 폭발 요인을 안고 있던 빈민층의 흑인 사회(라틴계 청년들도 상당수 포함 되어 있었다)가 폭발, 시위가 번졌고 급기야는 6일간의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특히 이들은 흑인 소녀가 한인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사살당한 것을 두고 흑인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코리아타운을 주로 약탈 타깃으로 삼아 방화를 하는 등 치안부재의 무법천지를 만들었다. 이때의 약탈·방화로 LA한인사회는 정신적·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지만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흑인들은 한인들을 일컬어 ‘커뮤니티에서 돈을 벌면서 지역 발전에 아랑곳하지 않은 어글리 코리언’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최대 피해자는 한인 그러나 예견된 사건

미주한인 이민사에서 최대의 수난으로 기록되는 1992년 4월 29일에 발생한 LA폭동을 우리는 “사-이-구”(4·29)라고 부르고 있다. 26년 전에 일어난 이 수난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우리의 역사이다. 원로 언론인 이경원씨는 “4·29 폭동이 발생한지도 올해로 26년이 되어 온다”면서 “앞으로 또 다른 4·29폭동이 다가 올 조짐도 있다.”고 경고한다. 그가 우려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은 4·29 폭동의 교훈을 잊고 있다.”면서 “4·29폭동에서 한인 커뮤니티가 유독 표적이 되어 수난을 당한 것은 우리 커뮤니티가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지역사회 발전에 동참을 호소한다. 그는 “우리 한인들의 아이덴티와 커뮤니티가 변해야 한다”고 강조 했다. 그는 “왜 우리 한인 커뮤니티가 4·29폭동에서 가장 큰 수난을 당했는지를 배울 필요가 있다.”면서 “이제는 미국땅에서 배운 교육과 환경에서 커뮤니티를 이끌어 가고, 보호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리더십을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우리 커뮤니티는 4·29폭동의 진상을 밝혀야 하고, 타인종과 함께 어울려 살아 가는 한인 커뮤니티로 성장시키는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다.폭동

그들을 탓하기 앞서 우리들부터 반성을

한인 이민사를 연구해 온 도산 안창호의 외손자인 필립 커디씨는 4·29폭동을 바라보는 한인사회에 대해 “과거는 우리의 유산, 현재는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 미래는 도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며 4·29폭동의 진상 규명과 한인커뮤니티의 명예회복은 우리 한인들의 숙원사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아직도 해결되야 할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당시 국내외로 LA한인사회의 피해가 알려지면서 전 세계에서 1200만 달러의 성금이 답지했다. 하지만 수많은 단체들이 동포들을 대변한다고 나서 듣기에도 민망한 성금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피해자가 아닌데도 피해자를 자처한 사람도 많이 있었다. 약 2천명이 500~3천 달러의 위로금을 받아 갔으나 남은 수백만달러는 지금까지도 행방이 오리무중, 4·29폭동 한인대책위원회의 일부 임원들의 쌈지돈을 쓰여졌으며 피해자들에게 돌아가야할 성금들이 그들에 의해 탕진했지만 지금까지 그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LA타임스는 지난해 LA폭동 25주년을 기해 ‘당신은 잊혀지지 않았다’는 제목의 관련 기사를 통해 흑인 커뮤니티를 조명했다. 그러나 최대 피해자인 한인사회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유도 따지고 보면 짧은 이민생활에 대한 문화차이에서 결과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사속에 ‘두순자 사건’의 흑인소녀 라타샤 할린스 추모행사를 소개하며 ‘한국에서 태어난 업소주인(South Korean-b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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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폭동 당시 타운을 지키는 한인들

n shopkeeper)’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이는 4·29 폭동의 원인을 흑인커뮤니티와 한인사회의 갈등으로 몰고 가는 대단히 위험한 접근 방식이었다지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하지 못했다. 한인들은 LA타임스의 기사가 형평성을 잃은 편파적인 기사라고 입을 모았다. 흑인 피해자와 흑인 커뮤니티의 입장을 다루면서 더 큰 피해를 당한 한인사회의 시각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은 은연 중 폭동의 원인을 한인사회로 돌리려는 의도로 보인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공동체 문화 후세에게 교육해야

바로 이것이 4·29 폭동을 지나간 일, 아픈 기억으로만 간직해서는 안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책임 인정과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한인사회 차원에서 4·29 관련 기록물들을 보존 전시하고 폭동의 원인과 전개과정, 문제들을 후세에게 교육하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해야한다. 그것이 ‘사-이-구’의 교훈을 간직하는 길이다. 그래서 다시는 또다른 ‘사-이-구’를 당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세월호 사건을 기억해야 하듯이, 200백만 동포들은 4·29폭동을 기억하고 명심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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