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우 전 백악관 장애위원 서거 9주년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구자적인 정신과 장벽을 넘어…

장애인의 삶의 의지를 전파한 개척자

대통령의 임명을 받고 미연방 상원의 인준을 거쳐 그 바로 후임을 맡았다. 지난 2월 23일은 강영우 전 백악관 장애위원(차관보급)의 9주년 기일이다. 그는 장애인이었으나 그 장애를 뛰어 넘는 삶을 살았다. 미국에서 장애인 정책 증진을 위한 대통령을 자문하는 중요 직책 을 수행한 것 이외에도 유엔 뿐만 아니라 루스벨트대통령재단 고문, 국제교육재활교류재단 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장애인 지원에 공헌한 자랑스런 한국인이었다. 강영우 박사는 생전에 학벌사회에 일그러진 우리 젊은이들의 초상화를 안타까워했다. 그는 “아이비리그 대학에 유대인을 제치고 가장 많이 진학하는 민족이 바로 한국인들이지만, 낙제율이 높고, 성공률이 가장 낮은 아이비리거들 역시 한국인”이라고 일침을 놓았다.

강영우 박사_인터넷그는 또 “한국 사람들 대부분이 자식이 서울대, 하버드대 가는 것을 꿈이요 목표라 한다죠? 그래서 좋은 직장에 돈 많이 벌어 잘사는 게 꿈이라면 그건 가장 작은 꿈 아닌가요? 진정한 꿈은 중단 없이 끝까지 갈 수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잘 먹고 잘사는 게 꿈이라면 동력을 잃고 끊어질 게 분명 합니다” 라고 또 일침을 놓았다. 강영우 박사의 9주기를 맞아, 강 박사 후임으로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 백악관 직속 장애위원을 역임했던 박동우 섀런 쿼크-실바 켈리포니아주 하원의원 보좌관이 추모사를 보내왔다. 추모사를 통해 강영우 박사의 업적을 조명한다.

<‘강영우 전 백악관 장애위원(차관보)의  9주기에>

강영우 박사는 2002년 미 부시 대통령의 임명과 미연방 상원의 인준을 거쳐 백악관 직속 장애 위원회 위원을 맡았다. 나는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의 임명을 받고 미연방 상원의 인준을 거쳐 그 바로 후임을 맡았다. 내가 후임으로 갔을 때 장애인위원회 사무실에는 고인이 기념으로 남겨둔 한국을 표징하는 여러 물건이 그대로 있어 그의 숨결을 느끼게 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전통 신랑 신부 인형과 천하 대장군, 지하여장군도 그 방에 남아있었다. 나는 부임 후 전임한테 인사도 하고 또 조언도 받기 위해 조미현 박사를 통해 애난데일의 한 식당 에서 그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는데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강 박사께서 퇴임 후에도 워낙 바쁘시게 움직여서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이었다. 그에게는 수많은 강연과 한국 방문, 교회 간증이 잡혀 있었다. 전임한테 식사 대접이라도 해야 했는데 결국 못 해드려 매우 섭섭했다.

다행히 사모님이신 석은옥 여사께는 인사를 드릴 기회가 있었다. 훌륭하게 자녀교육을 해오신 석 여사께서 자녀교육 특강 차 오렌지 카운티에 오셨을 때 비전교회 추영수 목사님과 합석하여 함께 다과를 들었던 것이다. 강 차관보는 2012년 2월23일, 68세의 한창인 나이에 암으로 인해 사망했다. 나는 갑작스러운 타계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장애위원회 사무실에 알려 강 박사님께 경의를 표하는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미 백악관 장애위원회는 고 강영우 박사께 경의를 표합니다”라는 제목의 글이었다. 장애위원회의 많은 직원도 추모의 글에 동참했던 기억이 새롭다.

자서전강 차관보께서 2002년 임명 이래 6년간 재직하시면서 장애인을 비상계획에 포함하는 것부터 장애인에 대한 문화적 차이와 태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제를 다루셨다. 강 박사의 일을 계승한 나는 강 박사의 타계에 즈음해 “전국장애인위원회 위원들과 직원들은 강 박사님의 사망에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발표했고, 더불어 그의 선구자적인 정신과 장벽을 뛰어 넘으시는 의지는 전 세계 장애인의 삶에 상당한 향상을 가져왔다고 덧붙였다. 또한, 14세의 나이에 시력을 잃은 강 박사가 고국인 한국에서 대학 입학시험을 치를 기회를 거부당해 이 제도 개선에 도전한 사실과 한국 명문 연세대학교 지원자 중 10위를 차지한 것, 또 연세대학교를 최고 영예로 졸업한 사실도 폐북에 올렸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강영우 박사의 일생은 이렇게 정리된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에서 출생한 그는 후천성 소아 녹내장을 앓았는데 이후 14세부터 사고로 공을 눈에 맞아 시각 장애를 앓았다. 이 사고가 나기 얼마 전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도 갑자기 숨지고 말았다. 그의 누나도 영우와 어린 동생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지만, 과로로 죽고, 이와 동시에 세 남매는 서로 뿔뿔이 흩어져야 했다. 맹인학교에 들어간 강영우는 점쟁이나 안마사가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삶을 포기하고 싶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사회적 편견과 인식을 깨고 싶었다. 학문을 갈망했던 그는 점자를 배우며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게 된다. 자원봉사자로 왔던 여대생의 도움을 받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나중에 강영우의 아내가 된 석은옥 여사였다. 그는 시각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대학 원서접수를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결국 연세대학교에도 입학할 수 있었고, 낮은 체육학점에도 불구하고 차석으로 졸업하였다. 그리고 석은옥 여사와 결혼하고 한국 장애인 최초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박사학위까지 얻었다. 이후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부름으로 미국 국무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했다. 그 뒤 2011년부터 췌장암으로 인해 투병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국제로터리재단 평화센터에 평화장학금으로 25만 달러(한화로 약 2억9000만원)를 부하였다. 그리고 2012년 2월 23일 향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에서 소개했다시피 그는 한국 교육부에서 장애인의 해외 유학을 불허하는 정책을 바꾸는 데도 성공했다. 그 후 그는 로타리재단 홍보대사 장학금과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추가 장학금을 지원 받아 유학에 나서 해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최초의 시각 장애인 한국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세계 장애인을 돕기로 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장애인 권리 옹호자, 저자, 연사가 됐다. 그의 자서전 ‘마음의 빛’ 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강 박사 타계 후, 대한민국 정부는 강 차관보한테 국위 선양을 기려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새로 홀연히 떠난 강 차관보의 9주년 기일을 맞아 그의 행적을 새삼 더듬어 본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