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 해산과 흥사단의 배신 도산 안창호 지하에서 통곡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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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 단소 철거 사태는
‘수치스러운 한인 이민사’

6월 6일은 대한민국의 현충일이였고, 지난 5월31일은 미국의 메모리얼 데이였다. 모두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이다. 이같은 추모의 달에 우리는 슬픈 소식을 들었다. 미주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이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동포 청년 지도력 수양과 독립운동 지도자 양성을 위해 창립한 흥사단(Young Korean Academy)의 숨결이 담긴 LA단소(회관, 3421 S. Catalina St. Los Angeles, Ca 90007)가 철거 위기까지 당했다는 것이다. 더 한심스러운 것은 흥사단의 자세이다. 흥사단은 철거되는 단소를 손 놓고 바라보았다. 이에 대한인국민회기념재단의 윤효신 이사장이 ‘최후의 일각까지’라는 심정으로 흥사단 단소를 일단 180일 동안 철거 중단 조치를 위한 긴급 추진위원회(위원장 윤효신)를 가동시켰다. 추진위원회는 앞으로 국내외를 통한 범동포 캠페인에 나서겠다며 홍명기 미주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장과 서경원 흥사단미주위원장과 함께 9일 국민 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동포사회의 성원을 당부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흥사단 단소의 철거 위기는 비단 흥사단에만 있는 현상이 아니다. 미주 한인 이민사에서 대한인국민회와 양대 산맥이었던 대한인동지회의 회관 건물(2716 Ellendale Place, LA CA 90007)도 해외독립운동의 주요 유적 가운데 하나로 지난 2005년 국가보훈처에서 유적 보호지로 선정됐지만 8년 후 2013년 후손들의 무관심과 한국정부의 외면으로 역사속으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더구나 동지회 건물 안에 보관 중이던 수많은 유물들도 유실되어 귀중한 독립운동의 역사가 실종 되버렸다. 어떻게 귀중한 문화유산이 파괴될 수 있는가? 동지회측은 건물 보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했다고 한다. 2010년 한국 정부에 재정 지원을 부탁했지만 “분쟁중인 단체는 지원 할 수 없다”고 거절당했다. 결국 한국 정부는 유적이 사라지고 훼손될 처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강 건너 불구경만 해오다 폐쇄를 맞은 셈이다.

 단소 보전 유지는 커녕 유물 방치하고 도망처

이번의 흥사단 단소 철거 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원래 도산이 1913년 5월 1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했으며, 그해 8월 21일 LA 다운타운 240 벙커 힐(Bunker hill)에 처음 단소 사무실을 설립했다. 이후 1915년 현재 디즈니 홀 근처인 106 노스 피게로아(North Figueroa St.)에 단소를 옮겨 활동하다가1932년 4월 현재의 3412 S. Catalina St. 로 단소를 구입해 흥사단 대회 등 독립운동의 산실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아 1948년 흥사단 본부가 한국으로 이전했지만 흥사단 미주 위원부 이름으로 계속 활동을 해왔다. 그후 1978년 이 단소를 매각했다. 건물이 낡아서 수리할 곳도 많고 전기 누전도 있고 단원도 줄어들고 해서 재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사정이었다. 미주에 창설된 흥사단은 지난 1935~1980년까지 단소(3421 S. Catalina St. LA)로 쓰던 미주위원부 건물을 1980년 미국인 개인에게 넘기는 수모를 겪었다. 부실운영이 원인이었다. 당시 흥사단 단소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내막은 지금까지도 수치스런 역사다. 심지어 단소에서 나올 때 일부 귀중한 유물들을 방치하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단소 유물 보전 방치한 흥사단의 수치

▲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단한 흥사단 LA단소(왼편)가 소유권이 타인에게 넘어가 철거 위기에 몰렸다.

▲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단한 흥사단 LA단소(왼편)가 소유권이 타인에게 넘어가 철거 위기에 몰렸다.

지난 2013년에는 흥사단 창립100주년을 앞두고 이 건물을 되찾으려는 의지를 보였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흥사단은 이 단소에서 나온 이후 셋방살이를 하면서 옮겨 다니다 한때 LA 한인회관 한구석에 자리 잡기도 했다. 흥사단의 궁핍한 살림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처음 단소를 매각한 자금으로 팜스플링스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다가 다시 팔고 현재는 코리아 타운에 아파트 2채를 소유하고 있다. 문제의 철거 대상 단소는 2019년에 매물로 나와 중국계 미국인 개발회사 Tripallink.com에서 185만 달러에 구입해, 단소 건물을 해체하고 새 아파트를 건립하기 위해 LA시로부터 철거 허가 까지 받아 논 상태에 이르렀다. 그동안 흥사단 관계자들은 이렇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도 특단의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속으로 꿍꿍 앓아오기만 했다. 흥사단 관계자들은 매물로 나왔을 때부터 단소를 구입하기 위해 현재 보유한 아파트 자산 100만 달러를 기반으로 한국정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받아 들여 지지 않아 단소 구입을 포기한 상태 라고 하면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다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지난 2013년 동지회 건물이 사라진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환경이었다. 흥사단측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했다는 입장이지만 그것으로 이해가 되기에는 석연치가 않다. 한편 그동안 대한민국을 정부를 대표한 LA 총영사관을 포함해, 국민회, 동지회 등 선조들이 세운 단체를 계승하여 왔다는 LA한인회, 그리고 각 한인 단체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수치스럽고 통곡할 일이다. ‘총체적 무관심’ 때문이었다.

이민사적지 보전관리 총체적 부실

미주 독립운동의 요람지인 LA에는 이민사적 유적지가 많다, 국민회관, 흥사단 단소, 동지회 건물, 로즈데일 애국지사 묘지, 맹호군 훈련장 익스포지션 팍, 1942년 LA시 태극기 계양식 자리, 클레어 몬트 한인 양성소, 초대 한인감리교회 건물 등등이 있으나 현재 실질적으로 한인 커뮤니티가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사적지는 국민회관 뿐이다. 흥사단 단소가 철거 위기에 몰렸다는 한인 언론 보도에 극민회관기념재단의 윤효신 이사장은 충격을 받아, 즉각 미주도산안찬호기념사업회의 홍명기 총회장, 흥사단 미주위원부의 서경원 위원장과 긴급 대책회의를 갖고 흥사단 옛 단소 구입을 위한 ‘흥사단 단소 건물 구입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여기에 도산의 막내 아들 랄프 안 옹도 적극 참여하고 나섰다. 윤효신 위원장은 “흥사단은 국민회와 함께 미주 독립운동에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면서 “역사적 단소 건물이 폐쇄되는 것은 우리 이민사의 수치이다”라고 말했다. 윤 이사장은 일단 법이 허용하는 철거 중지 여건을 마련하고, 이 단소 건물을 LA 역사문화 유적지로 지정하는 캠페인을 벌여 영구적 철거 중지를 마련하는데 총력을 기우릴 계획이다. 그 다음 국내외 모금을 벌여 단소를 구입한다는 계획이다. 본보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8년 LA도시계획국이 연구 조사한 SurveyLA-Koreatown Historic Resource보고서에 따르면  흥사단 단소는 LA시 역사문화 유적지 지정이 가능한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조사보고서에 참여한 USC동양도서관장을 지낸 켄 클라인 박사는 “흥사단 단소는 국민회관과 함께 한인 이민역사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LA역사에서도 중요한 건물이다”라고 강조 했다.

<촛점>흥사단(미주)은 어떻게 국민회를 배신했는가?

오늘날 국민회관기념관으로 복원된 국민회관의 원래 주인인 ‘대한인국민회’는 1909년 2월 1일 미주한인 역사상 최초의 연합운동체로 창립되어 시대에 흐름에 따라 1945년 해방이 되고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 되면서 그의 소명이 다됐다고 생각했다. 그후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조국을 위한 구호활동에 나섰으며, 한국의 민주화에도 기여 하다 가 1989년 3월 7일에 해산됐다. 국민회 해산을 위한 마지막 공식회의를 기록한 사람이 서기를 맡았던 구융회 장로(2007년 작고)였다. 지난 2003년 9월 5일 구융회 장로는 “죽기 전에 진실을 밝히고 싶었다”면서 본보 기자에게 약 3시 간 동안 피맺힌 증언을 했다. 그는 국민회를 청산하는 마지막 회의록을 보여 주면서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당시 국민회관 사료 문제와 관련 “이런저런 사연으로 국민회관의 사료 들이 분실되고 사그라지고 있다는 소식에 가슴이 메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회 존재와 흥사단의 역사

1967년 7월 13일 이민으로 LA에 정착한 구융회 장로는 당시 국민회 회장인 김성락 목사(작고)의 권유로 국민회 기관지였던 신한민보의 편집장을 맡게 됐다. 그 해 12월부터 그는 편집장과 주필로 근무 하면서 신한민보를 창간호부터 자신이 만들 때 까지를 모두 읽었다고 했다.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에 대해 그는 “대학 공부한 것 보다 더 값어치 있는 것을 배운 기분”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한민보는 한국의 국호와 연호 그리고 한글을 고수한 유일한 역사적 신문”이라며 “특히 일제강압시절 세계 각 지역 동포사회로부터 접수된 전보문을 가지고 편집하는 등 살아 숨쉬고,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신문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신한민보의 기사는 조상의 눈물 자욱이나 다름없다”고 강조 했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제강점기 시절 미국에서 나라 없는 한인들에게 조국의 정부나 다름없는 존재 였다. 1913년에는 미국정부로부터 ‘자치정부’의 대우까지 받을 정도로 역량을 보였다. 그해  안창호 선생은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창립했다. 당시 국민회는 ‘임시정부’ 격으로 국민회가 보증을 서면 이민국도 불법 체류 한인동포에게 미국 체류증을 발급해 줄 정도로 신임을 받았던 단체였다.

그러나 해방 후 세월이 흘러 1965년 개정 이민법으로 한인이민이 대폭 증가되면서 미주 동포사회 는 새로운 커뮤니티로 형성 되어 가면서 독립운동체였던 국민회는 회원들이 줄어들어 자연히 해산 의 길을 걷게 됐다. 공식적으로 국민회 마지막 회장은 안승화(작고)씨였다. 국민회 마지막 청산회의는 1989년 1월 20일 오후 1시30분 LA코리아타운의 세종회관에서 열렸다. 참석자는 당시 안승화 회장을 포함해 이화목 , 안정옥 이사, 구융회 서기 그리고 김희선 재무 등 5명이었다. 이날의 주요 결의사항은 국민회의 재산을 청산하는 문제였다. 당시 국민회 재산은 국민회관에 보존된 유물과 사료 등과 ‘홈 세이빙 오브 아메리카’ 은행에 정기 예금으로 기탁된 기금( 만기일 금액 45,118달러 25센트)이었다. 회의에서 재산을 총영사관이나 동포단체 등에 위탁시키자는 논의를 한 결과, 미주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해온 흥사단으로 결정 했다. 국민회는 은행 예치기금 약 45,000 달러와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측으로부터 받을 미수금 (국민회는 자체 건물 국민회관을 교회에 매각했다)까지를 흥사단에 모두 기탁하면서 딱 한가지 조건만 내 걸었다. ‘대한인국민회의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것’이었다. 역사 속에서 대한인 국민회 존재 만이라도 남기자는 뜻이었다.

국민회 청산자금 받아 자체 단소구입

또 국민회의 모든 유물과 사료는 흥사단이 위임을 받아 훗날 조국이 통일되면 책임 있는 기념관에 영구 보존하도록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회의는 이 결의사항을 집행하기 위해 안승화 회장, 구융회 서기, 김희선 재무 3인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들 3인은 그 해(1989년 3월7일 왕관 식당 에서 모임을 갖고 흥사단에게 국민회의의 청산결의문을 발송하고 흥사단측의 공식 수락서를 받은 후 청산업무를 집행키로 했다. 당시 흥사단 미주위원부는 위원장의 명의로 대한인국민회의 모든 조건을 수락한다는 공문을 국민회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안승화 회장이 흥사단에게 모든 것을 전달하기 전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것이다. 졸지에 구융회 서기는 국민회 회장 대행의 역할까지 맡아야 했다. 결국 국민회와 흥사단은 1989년 5월1일 한국회관에서 국민회 청산에 따른 기금 전달식을 가졌다. 국민회로부터 ‘대한인국민회 장학금 지급’ 조건으로 청산기금을 받은 흥사단은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2003년 본보와의 인터뷰 당시 구융회 장로는 “오늘 날까지 흥사단이 국민회 이름으로 장학금을 지급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면서 “그 돈이 어떤 돈인데···국민회 청산을 담당했던 한사람으로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다”며 울먹였다. 그는 “흥사단측에 연유를 알아보았는데, 자기들 단소(회관) 관련 비용에 사용했다는 말을 듣고 분이 복바쳤다”며 두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분노감을 나타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다시 흥사단에 촉구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 장로는 끝내 흥사단에서 ‘국민회 장학금’을 지급 약속을 듣지 못한 채 본보와 마지막 인터뷰 후 4년만인 2007년 3월 15일 별세했다. 생전에 그가 남긴 “선조들을 볼 면목이 없다”가 한이 됐다. 구융회 장로는 2003년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이라도 미래를 볼 수 있는 비젼을 우리사회가 지녀야 한다”면서 “우리 한국인에게는 다른 민족이 지니지 못하는 ‘뜨거움’이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취재반에게 “젊은 세대에게 우리 선조들의 역사를 알려 주는 일이야 말로 희망의 비젼이다”라며 “국민회관 사료보존에 교회나 흥사단을 포함해 관련 단체들이 서로 칭찬하면서 바른 길을 택하길” 당부했다. 하지만 흥사단은 국민회 사료도 지켜주지 못했고, 국민회 이름으로의 장학금 지급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역사와 국민회에 대한 배신 행위나 다름없다. 국민회가 청산할 때 물려주었던 그 돈으로 자신들의 단소 유지 비용에 사용했던 몰염치한 흥사단은 오늘날 그 단소 마저 지키지 못하고 철거 위기를 만났는데 아이너리칼 하게도 국민회관기념재단의 윤효신 이사장이 이를 지키겠다고 나섰다.  국민회의 “최후의 증언자” 구융회 장로가 하늘나라에서 후손들을 지켜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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