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맥아더 ‘인천상륙작전’의 또 다른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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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아더 장군도 격찬한 ‘학도병 유격대’의 투혼
■ ‘인천상륙작전’의 교란작전에 투입된 학도병
■ ‘낙동강방어선’을 가능케 한 772명 불멸 영웅
■ 70여년전 상륙작전 바닷가에 세워진 기념관

오는 9월 15일은 6.25 한국전쟁의 전세를 한순간에 역전시킨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기념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인천상륙작전’은 잘 알고 있지만, 이 작전을 위해 희생된 다른 상륙작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이 없다. 6.25 전쟁 초반 국군이 낙동강 전선으로 밀린 상황이었던 1950 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 개시에 맞추어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한 연막작전이 있었다. 서해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인 동해 영덕 장사리 해변 일대의 북한군 점령 지역에서 상륙 작전이 펼친진 것이다. 당시 15~19세 학생들로 구성된 학도병 특공대<육본 독립 제1 유격 대대 (대대장 이명흠 대위)> 772명이 수행한 작전이었다.
<성진 취재부 기자>

LA에서 “독도 화가”로 활동하다가 최근 귀국한 권용섭 화백은 최근 약 50년 만에 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했다. 그의 점곡중학교는 두메산골에 남여 100여명이 3년간 웃고 울어 졸업한 친구들이 있는데 이번 동창회에는30여 명이 모였다. 장소는 패교된 옛 교정에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경상 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해변가 한식당. 추억에 재잘재잘 밤새듯 합숙을 했다. 다음 날 아침 6.25때 옛날 또래 학생들 출신 학도병 772명이 북한군 2군단과 맞서 싸운 역사의 현장으로 견학을 가자고 권 화백은 제안했다. 그 ‘장사리’ 바닷가는 70여년전 학도병이 상륙작전을 벌렸던 장소이고 당시 작전에 투입됐던 선박 LST ‘문산호’를 보며 동창생들은 감회에 적셔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 공격으로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은 곧이어 파죽지세로 남쪽으로 내려가 ‘8월15일에는 부산을 점령하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대구와 부산을 공격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풍전등화격이었다. 국군과 UN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필사적으로 방어하고 있었다. 이때(1950년 9월 15일) 서울과 인접한 서해 인천 앞바다에 대규모 선단이 나타나 상륙작전이 감행됐다. 인천 앞바다 간만의 차가 심해 상륙작전의 성공확률은 5,000 분지 1이었다. 그것이 성공했다. 이 성공으로 북한군은 부산을 점령하려던 계획에서 허리가 잘려 나갔다. 동시에 낙동강 방어선에서 일제히 국군과UN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북한군의 선제 침공 6.25 전쟁의 반전이 시작된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해 여러가지 국군은 여러가지 교란작전을 폈는데 그 중 하나가 15-19세의 학도병 출신 특공대의 ‘장사리 상륙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서해안의 인천과 정반대 방향 동해안 포항 북쪽 약 25㎞ 지점에 위치한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장사리 일대 당시 북한군 점령지역에서 전개된 상륙작전이다. 당시 15-19세 학도병 772명이 중심이 되어 구성된 육본 독립 제1 유격대대(대대장 이명흠 대위)가 수행한 작전이다.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풍전등화의 상황이 되자, 공세를 꺾고 반격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유격전을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점점 더 고조되었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 에게까지 전달되어, 이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에게 한국 청년들은 유격전도 불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호언하기에 이른다. 8월 중순에 이명흠대위가 희망하던 유격대 편성을 승인 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병력자원을 조달할 지역이 경상남북도와 제주도로 한정되어 있어 이명흠은 대한애국단 단원 수 명을 거느리고 대구역 광장 등 대구 시내를 돌며 모병운동을 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걱정도 있어서 예상보다 많은 청년들이 자원을 했다. 그래서 이명흠은 특히 사상이 건전하고 키 크고 담력 있어 보이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병력을 선별했다. 이들은 1950년 8월 24일에 대구역에서 화물열차로 밀양역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모인 총 760명 의 병력으로 1950년 8월 27일에 밀양에서 제1 독립 유격대대, 이른바 ‘명(明)부대’ 가 3개 중대 편제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부산 문현동에 위치해 있던 육군본부에서 숙식하며 조금 더 체계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유격전에 필요한 간단한 소화기 사용법 및 교량, 토치카 등의 파괴 방법 등을 교육 받았다. 후방에서 적으로 위장할 때를 대비해 북한 출신 대원들을 교관으로 삼아 북한군 군가도 학습하였다.

학생들 구국정신으로 자원 입대

1950년 8월 말, 인천 상륙작전의 결행이 결정되자 유엔군 및 한국군은 여러 기만작전을 동시에 준비하기 시작했다. 군산 기습작전은 비교적 덜 알려져 있지만, 인천 상륙작전 2일 전인 9월 13일에 웨어(James H. Wear) 소령이 이끄는 연합군 최고사령부 직할 침투중대(Raider Company)와 영국 해군의 자원병들로 이루어진 혼성 특수부대가 영국 해군의 방공호위함 HMS 화이트샌드베이 (Whitesand Bay)의 지원을 받아 군산 인근 해안에 공격을 감행한 소규모 양동작전 이었다. 한편 당시 인천 상륙작전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던 학도병 특공대 지휘관인 이명흠으로서는 이해 할 수 없는 장사리 상륙 작전이었지만, 육군본부가 군사극비 작전명령 제174호로 출동을 정식 명령했으므로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9월 14일에는 육군본부 연병장에서 정식 출정식까지 거행하였다.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부대들의 경우 보안을 유지하며 조용히 빠져나간 데 반해, 이들의 출정식에는 무려 정일권 육군 참모 총장을 비롯해 육군본부의 고위 장교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편성된지 3주밖에 안 되는 학도병 중심의 대대 급 부대의 출정을 사단급 부대의 대규모 작전이라고 의도적으로 과시, 역정보를 흘리 려는 성동격서라 할 수 있었다. 9월 14일 16시에 장사리 상륙부대를 싣고 부산항을 출발한 LST 문산호는 지원을 맡은 미 해군 엔디코트 함과 해상에서 합류하여 작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문산호는 천신만고 끝에 9월 15일 새벽 05시경에야 장사동 해안 외곽 4㎞ 지점에 도달했으나, 해안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고 아직도 파도가 매우 높아 정확한 상륙지점을 분간하기도, 해안 에 접근하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렇게 장사동에 도착한 문산호는 새벽 5시 30분경 선미 닻을 내리고 접안을 시도하지만 높은 파도로 인해 닻이 끊어져 버리면서 바람에 의해 해안선에 평행 으로 놓이며 좌초되버린다.

이렇게 문산호가 해안 인근에서 좌초되어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장사동 인근 고지에 위치한 북한 군 방어부대가 문산호를 먼저 포착하고 공격을 시작했다. 상륙부대에게는 운이 나쁘게도, 장사동 일대에는 포항 일대의 격전 와중에 심각한 피해를 입은 제5사단 제12연대 예하 병력이 전선에서 물러나 예비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게다가 장사동은 해안가 마을 주변이 고지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이라, 기습을 달성하지 않는 이상 이들 고지에 자리잡은 북한군 방어부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곳이었다. 악천후로 기습 상륙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문산호를 향해 집중포화가 쏟아 지기 시작했다. 방어부대의 박격포탄이 지근탄으로 떨어지는 가운데 정상적인 접안이 불가능해지자, 이명흠은 7명의 특공조를 차출하여 해안으로 밧줄을 들고 헤엄쳐 가서 백사장의 소나무에 연결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특공조들은 강풍과 파도, 맹렬한 사격에 휘말려 전사하기를 반복했으며, 결국 추가 특공조들이 편성된 끝에 해안과 4개의 밧줄을 잇는 데 성공한다.

북한군 이목 따돌리기 위한 작전

그러다 06시경이 되자 암초에 들이 받혀 해안 부근에 그대로 좌초되고 만다. 이 상황에서 제1 유격 대대 대원들은 지휘관의 독려 하에 계속 상륙을 이어갔다. USS 엔디코트 함이 이 과정에서 5인치 함포, 보포스 40mm 포 등을 총동원해 지원사격에 나서서 그나마 작전이 이어질 수 있었다. 그 사이에 제일 먼저 상륙에 나선 1중대(제28연대로 위장) 대원들이 상륙을 직접적으로 방해하던 북한 군의 해안 토치카 3곳을 파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대대는 09시까지 상륙을 완료하여 잔적 소탕과 교두보 확장, 북한군의 역습 대비를 시작했다. 2중대(제29연대로 위장)는 200고지 우측으로 우회하며 이 일대에 구축된 북한군의 해안 방어 진지 공격에 나서서 차례로 무력화시켰다. 이어 대대 전력을 정비하고 200고지에 지휘소를 차린 이명흠은 나머지 병력을 이용해 271고지를 공격, 이곳까지 확보해 교두보를 공고히 하였다.그러나 이때까지의 초기 상륙과정에서의 피해는 막심했다.

대신 이 과정에서 상륙부대는 북한군 39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했으며, 토치카 9곳을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북한군의 직사포 2문과 포탄 450상자, 지프 1대, 기관총 45정, 로켓포 1문, 따발총 5정 등을 노획했다.
북한군 측에서는 초기에 한국군의 상륙 규모를 약 2개 연대로 과대평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제5사단 예비대인 제12연대는 물론 심한 압박에 시달리고 있던 전선에서 병력을 차출 하여 장사동으로 급파한다. 정확한 동원 부대는 불분명하나 동일한 규모로 2개 연대급의 병력을 반격부대로 차출했던 것 같다. 여기에 이미 상당수가 파괴되어 몇 대 남지도 않은 귀중한 T-34 전차 4대까지 급파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이명흠 대위는 작전결과 보고를 위해 당일 육군본부로 출두했다. 그러나 그의 증언에 의하면 강문봉 대령 등 관계된 장교들을 만나자, 이들은 모두 이명흠 대위가 왜 살아 돌아왔는지 크게 놀라고 당혹해 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문산호를 그대로 버리고 온 죄를 물어 군법회의에 회부, 총살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한다. 이것은 한국 및 미국 해군이 적극적으로 구출에 나섰던 데 비하면 너무나 대조되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한국 육군 쪽에서는 제1 유격대대를 여차 하면 버리는 카드로 인식하고, 아예 적 후방에서 최후까지 옥쇄해서 북한군을 더 괴롭히는 걸 기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사리 상륙작전 자체의 엉성함과 예정을 훨씬 넘겨서 지속된 전투, 부실한 지원과 병력 열세등의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로만 적군 270명 사상에 포로 4명을 잡았으며, 방어시설인 토치카 11개 소를 파괴하고 주 목적인 교통로 차단을 위해 교량 2개소와 도로 6개소를 파괴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적군 보병무기를 노획해서 전투에 활용했다. 하지만 진정한 효과는 기습적인 인천 상륙작전을 당한 북한군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낙동강 전선 의 북한군 방어태세 약화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동해안에 2개 연대가 상륙한 것으로 적이 오판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보급로 및 퇴로 차단 위기에 직면한 북한군은 팽팽한 낙동강 전선, 특히 포항-경주 축선의 형산강 방어선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빼내어 장사동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고, 인천 상륙작전에 발맞춰 전면 반격에 나선 한국군은 보다 쉽게 북한군 방어선 을 돌파할 수 있었다.

722유격대 동지들의 용맹과 희생

70여년이 지난 현재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학도병 상륙부대원들이 탑승했던 LST 문산호를 재현하여 길이 90m, 폭 30m, 지상 5층, 연면적 4,881㎡ 규모로 만들어졌다. 당초에는 2020년 9월 장사리 상륙 작전 70주년 기념식 때 준공식을 열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연기된 끝에 2020년 11월 16일 에 준공식이 거행되었다. 그 기념관에는 맥아더 장군이 장사리 상륙작전에 춤전한 학도병들의 투혼을 찬양한 어록(1960. 10.31)도 잠겨 있다.

<I was delighted to receive your letter of recent date telling of the formation of the 772 Volunteer Comrade Club. The operation they performed in support of the Incheon Landing was a brilliant one and worthy of the highest commendation. The valor and sacrifice of its members will always be a shining example for the youth of Korea. Please extend to its members my heartiest greetings and affectionate regards. I shall always remember them as loyal and devoted comrades-in-arms.
With best wishes, Most sincerely,
DOUGLAS, MacARTHUR.>

“인천상륙작전을 지원을 위한 동지들의 전투는 혁혁한 것이 였으며 최고의 찬사를 받을 만한 것 이었습니다. 722유격대 동지들이 보여준 용맹과 희생은 한국 젊은이들에게 영원히 빛날 귀감이 될 것입니다. 저는 그들의 충성스럽고 헌신적인 전우로서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1960. 10.31 -더글러스 맥아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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