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커크 전상원의원 재미이산가족 상봉 재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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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으로 1천만 명 이상의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미국 내 한인들 중에도 수만 명이 여전히 북한의 가족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72주년을 맞아 미국의 소리 방송이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의 얘기를 “3일의 약속” 2부작으로 방영했다. 커크 전의원은 재미이산가족상봉 사업을 전폭적으로 도운 미 상원의원이었다. 그는2001년 3월 재미이산가족상봉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2001년 9월 재미이산가족 상봉 이슈를 미국 정부 정책에 채택시켰으며, 2007년 첫 재미이산가족상봉 법안을 상하원에 통과시키며 2008년 1월 28일 조지 부시 대통령의 사인을 받았다. 해당 법안의 시효가 2008년 7월 28일 끝나자 그 다음 해에 전국 재미이산가족 상봉추진위원회와 함께 두 번째 법안을 상하원에 통과시켜 2009년 12월 16일 오바마대통령이 사인하고 로버트 킹 대사를 재미이산가족대사로 임명했다.

이산가족 상봉의 주인공 커크 전의원

커크 전의원은 2012년 3월 힐러리 클린턴 장관과 함께 정식으로 북한에 두차례에 걸쳐 재미이산 가족 명단을 보냈다. 하지만 그 해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하며, 북미 이산가족 상봉이 절차 도중 무효화 되었다. 커크 전의원은 2016년 병환으로 상원을 떠났지만, 이후로도 미정책의 특정지역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올해 Voice of America의 이산가족 다큐멘터리 “3일의약속”을 본 후, 20년 전 시작한 재미이산가족 업무를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앞으로 커크 위원은 캘리포니아의 남가주 추진위원회 (회장 최창준), 아트란타도민회 (회장 정광일), 시카고 도민회 (회장 고찬열, 이사장, 김선금), 재미이산가족 추진위원회 (회장, 이철우, 이사장- 박균희), Political Action Committee (김왕기, 신현웅, 이철우) 와 함께 재미이산가족 업무를 재개할 계획이다.

마크 커크 전의원은 2012년 당시 연방상원의원(공, 일리노이)으로 당시 마크 워너 연방상원 의원(민, VA)과 함께 이산가족 상봉 결의안을 공동으로 상정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시 결의안(S. Res 190)은 <북한이 미국내 한인들과 북한내 그들의 친척들이 상봉할 수 있도록 촉구한다. 또한 한국정부가 향후 이산가족 상봉시 미주 한인을 포함할 것을 요구한다. 또한 미국무부가 미주한인들이 북한내 이산가족들과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요청한다.> 이었다. 그 후 차세대 DFUSA가 지난 10년간(Jason Ahn은 13년간) 미국정부와 재미이산가족 상봉 사명을 이끌어 왔다. 저희 DFUSA는 2014년 게리 코넬리(Gerry Connolly)의원과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2015년 찰스렝거(Charles Rangel)의원과도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트럼프 (Trump)정부시절에 이산가족상봉 프로젝트를 제기하여 국무부와 가깝게 일을 했다.

2016년 12월부터 DFUSA는 조셉 윤(Joseph Yun) 국무부 북미대사와 상봉추진 사업을 시작 하여 결과적으로 2017년 말에 재미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 질 계획이었으나 북한의 ICBM 도발로 북미협상이 무효로 되어버렸다. 한편 커크 전의원은 자기가 “The First Korean American Congressman”이고 유일한 “Korean American Senator”라고 말하면서 한국 여동생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이다. 커크 전의원은 앞으로 현재 연방상원으로 활동하는 히로노(Hirono)상원의원이 이산가족상봉 법안을 검토할 것이며 미정부와 한국정부와 함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것이라고 전했다. 한편 남가주추진위원회의 최창준 회장은 최근 히로노 의원의 법안(Hirono bill)을 통과 시키기 위하여 연방상원에 페티션( petition)을 2번 보냈다. 그는 또 최근의 방영된 VOA 다큐멘타리의 “3일의 약속”에 출연한 이산가족의 한 주인공이다.

결의안은 통과, 상봉은 지연

재미이산가족상봉 사업을 이끌고 있는 이차희 사무총장은 북한에 아버지와 오빠를 둔 이산가족 으로 미 의회에 한인 이산가족 문제를 처음 알리고 20년 간 적극적으로 관련 운동을 이끌어 온 주인공이다. 그는 한반도가 일본의 강점에서 해방된 1945년, 어머니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만주의 산골 다푸차 헤에서 대구로 열차를 타고 내려갔다. 대지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아버지 이상문 씨와 넷째 오빠 이웅희 씨도 곧 뒤따라 온다고 했지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1950년 그녀의 아버지는 넷째 오빠를 데리고 만주에서 북한으로 갔다. 한편, 한국에서 삯바느질 일을 하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이차희 씨는 대학 졸업 뒤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학에 언론 전공 으로 수학했다. 그녀는 1988년 유년기를 보낸 만주를 다시 방문하며 뿌리찾기에 관심을 컸던 이차희 씨는 이듬해 한인들이 많은 시카고 알바니 파크 지역의 도서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 정부의 기금을 받아 15만 달러어치 한국 책을 들여놓자 도서관은 곧 한인들의 사랑방이 됐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1990년대 미국 내 한인 이산가족들을 북한의 가족들과 연결해 주겠다는 브로커들이 기승을 부렸다며, 자신이 직접 상봉운동에 뛰어들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당시 지역 출신인 마크 커크 상원의원의 선거운동을 도와주며 인연을 맺었고, 2000년 들어 함께 한인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했다. 이차희 사무총장은 1990년대에 북한의 넷째 오빠와 짧게 서신교환을 하기도 했다. 연락이 닿은 오빠로부터 북한에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60청춘’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버지가 북한에서 ‘천리마 할아버지’로 유명해진 것이다. 아버지는 이미 1974년에 돌아가시고, 오빠와도 연락이 갑자기 끊어졌다. 본인의 가족 상봉은 무산됐지만, 다른 한인들의 상봉을 위해 계속 힘써왔다. 2017년 림프종이 발견돼 암투병을 하면서도 그 해와 이듬해 국무부의 언질을 받고 혹시 성사될 가능성에 대비해 화상 상봉을 준비했다. 올해 82살인 이차희 사무총장은 이제는 젊은 한인들이 관련 활동을 이어나가길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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