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배 전 LA 총영사 “에벤에셀의 손길” 수기 출판 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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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회창씨와 친인척 이유만으로 사사건건 제동당해
DJ 후원자 P 모씨가 청와대에 투서 불이익 받아

오직 믿음과 기도로 고통 이겨내

1999년 9월 부터 2001년 2월까지 약 16개월간 LA총영사를 지낸 김명배 前 대사(63, 국립군산대학교 초빙교수)가 최근 LA를 방문해 아주 진솔한 자신의 생애에 대한 고백론을 간증으로 토해내 화제를 모았다.

지난 17일 저녁 코리아타운의 용궁식당 별관에서는 김명배 前 대사가 펴낸 생활수기 ‘에벤에셀의 손길’의 출판기념 예배가 열렸다. 보통은 출판기념회가 열리는 법인데 ‘기념예배’ 순서로 진행됐다.

▲ 지난 17일 열린 김명배 前 LA 총영사의 ‘에벤 에세의 손길’ 출판 기념예배 현장모습.

이 자리에서 김 前 대사는 ‘저자의 인사’ 대신에 ‘간증’으로 대신 했다. 일반적으로 저자의 인사는 10분 이내에서 끝나는 법이지만 이날 밤의 김 전대사의 간증은 한시간에 가깝도록 긴 시간을 통해 이어졌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하객들은 김 전대사의 인생역전에 깊은 관심으로 자리를 뜨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과연 무슨 이야기가 참석자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을까.

이날 밤 그의 간증과 저서에서 LA동포들이 몰랐던 비화들이 공개되어 한층 관심을 모았다.

성 진<취재부 기자> [email protected]

이날 출판기념 예배에는 임동선 원로목사를 비롯해 박희민 목사, 이정근 목사, 송정명 목사, 정상우 목사를 포함해 이재권 장로, 김종명 장로 등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많이 참석했다.

목회자들과 신도들이 많이 참석한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김 前 대사의 가정은 조부로부터 3대 째 목사를 배출한 집안이었으며 김 前 대사 자신이 외교관이기 전에 독실한 신자이기 때문이다. 지난 99년 9월 LA총영사로 부임하기 전 그는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스리랑카 대사였는데 LA 총영사로 전임명령을 받고 서울 외교부 본부에 들렸을 때 두 가지 어려운 문제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DJ 정권 시절이었는데 LA 한인사회 일각에서 김명배 총영사의 부인이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와 인척관계라는 소문이 나돌아 다닌다는 것과 LA 한인사회의 남가주 한국학원의 재정파탄이 심각하다는 것 등이었다.

만약 이회창 총재와의 인척관계를 청와대가 사전에 알았다면 발령을 내지 않았을 터이지만 워낙 정치적인 관계를 떠나 외무 공무원에 충실했던 김 前 대사이였기에 외교부 내에서도 이회창과의 인척관계를 인지하지 못했다. 그가 LA 총영사로 부임하면서 가장 고민은 남가주 한국학원의 재정파탄을 타개하는 길이었다.

또한 만약 한국학원이 파탄되면 그 동안 지원해왔던 한국정부의 위신과 남가주 한인사회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포사회는 김 총영사처럼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LA 총영사 관저에는 풀장이 있다. 김 총영사는 그 풀장을 돌면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주님! 남가주 한국학원의 재정적 도움이 이뤄지도록 도와주십시오!”라는 기도를 수만 번이나 올렸다. 매일 고민에 싸여 입맛도 잊을 정도였다.

이 같은 고민에 싸여 있던 어느날 교육학자인 김수안 박사가 김 총영사를 점심에 초대했다. 김수안 박사는 한국여성으로 UCLA에서 최초로 교육학 박사를 받은 LA 코리아타운의 올드 타이머다.

당시 김 총영사는 교육학자인 김수안 박사로부터 한국학원의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할 심정으로 기꺼이 초대에 응했지만 음식을 들지 못했다. 이를 본 김수안 박사가 직접 음식을 권할 정도였다. 식사가 끝나고 헤어질 때 김 총영사는 귀를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랠 이야기를 들었다.

“총영사님, 너무 걱정 마세요. 저도 힘 닿는 데까지 도울 생각입니다. 우선 10만 달러를 한국학원 재정에 기부하겠습니다”라는 김수안 박사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김 총영사는 “주님께서 제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라며 속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감사했고 다시 주님을 믿었다. 이 믿음은 그 후 총영사 관저에서 열린 남가주 한국학원의 새 이사진들이 즉석에서 87만 달러의 기부금을 약정 내지 기탁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때 남가주 한국학원은 재정파탄의 위기를 극복했다.

▲ 김명배 前 LA 총영사.
ⓒ2004 Sundayjournalusa

김명배 前 대사는 1941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목사인 아버지를 둔 가정이기에 해방된 북쪽의 공산정권은 아버지를 감옥에 넣어 배교를 강요하면서 갖은 고문을 한 뒤 죽기 직전에 석방했다.

그 후 기적적으로 회복한 아버지는 먼저 월남했고 이어 김 전대사의 어머니가 5남매를 데리고 월남했다. 아버지가 전북 군산에서 교회를 사목했기에 어렸을 때부터 그곳에서 자라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김 전대사는 간증을 통해 자신이 크게 3번의 주님의 응답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병역비리를 척결하겠다는 의지로 당시 전국 각 지역 병역신검 책임자들을 모조리 체포했다. 이때 김 前 대사의 큰 형도 체포되어 수도경비 사령부에 수감되어 조사를 받게 됐다.

목사인 아버지가 일찍 사망해 집안의 가장으로 있던 큰 형이 수난을 당하자 어머니도 병들고 둘째 형, 셋째 형이 사고를 당하게 되고 누나도 병들게 되는 우환이 한꺼번에 겹쳤다. 오직 김 前 대사만이 멀쩡했다. 김 前 대사는 체포된 큰 형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면회했다. 그리고 매일 오가며 기도했다. “주님! 형님만 무사하게 할 수만 있다면 제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그 당시 김 前 대사는 고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큰 형 수발을 6개월 정도 하던 때 병역비리사건을 담당한 책임자가 김 前 대사의 형을 위한 정성을 보고 “자네, 아무 걱정말고 하던 고시 준비나 열심히 하게“라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드디어 병역비리 사건의 결말이 났다.

당시 이 사건과 관련된 신검 책임자들은 모두 유죄를 받았는데 오직 김 전대사의 큰 형만이 무죄로 풀려나게 됐다. 형이 풀려나던 날 김 前 대사는 주님께 감사하면서 “주님을 위해서 언제라도 순교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서울 법대 시절 정신적인 방황으로 거의 학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중 외무고시로 외교부에 들어 온 김 前 대사는 대학시절 공부를 하지 못한 점이 크게 후회스러웠다. 그래서 다시 공부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국가 공무원이기에 어려웠다.

마음속 기도는 “주님, 다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싶습니다”였다. 당시 전두환 정권시절 함병춘 청와대 비서실장의 비서로 근무할 때였다. 전두환 대통령이 버마 방문 시 북한의 ‘아웅산 국립묘지’ 테러활동으로 각료들이 사망하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나중 사망한 유공자들을 위한 국가 장례식 기간에 함병춘 실장 빈소를 지키고 있던 김 前 대사에게 KBS-TV 방송이 다가와 실장에 대한 추모 인터뷰를 갖게 됐다. 이때 김 前 대사는 함병춘 실장의 공직자로서의 청렴 결백한 자세를 소개했다. 한 예로 함 실장은 외국출장 시 출장비를 아껴 나중에 국고에 반환할 정도로 강직한 공무원이고 서민들과 함께 하는 공직자임을 소개했다.

당시 분위기로는 이러한 함병춘 실장의 생애가 국민들에게 큰 감명을 주게 되었다. 이 같은 뉴스를 청와대에서 보고 있던 전두환 대통령이 정무와 민정 비서관에게 “함 실장은 참 훌륭한 분이었다. 저기 얘기하는 비서관을 좀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런 인연으로 김 前 대사는 미국 콜럼비아 대학원으로 국비유학의 특전을 받게 됐다. 그가 주님께 기도했던 소원하던 공부의 길이 열린 것이다.

김 前 대사가 이회창 총재와의 인척관계는 LA 총영사 시절 두고두고 그를 괴롭히고 승진기회까지 박탈당했다. 김 前 대사는 저서에서 “그 당시 나의 억울한 심정은 오죽하면 아무 죄도 없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감옥살이한 성경의 ‘요셉’을 생각하며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계시리라 믿으며 살았다”고 밝혔다.

DJ정권 청와대 민정 비서관은 외교부를 통해 사사건건 김 총영사를 괴롭히다가 끝내 보통 임기가 3년인 총영사를 1년 6개월 만에 물러나게 했다. 당시 LA에서 P 모씨 등이 주동이 되어 청와대와 국정원 외교부 등등에 투서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 前 총영사는 비록 다른 총영사들보다 짧은 임기였으나 김 前 총영사는 남가주 한국학원 재건, 도산동상 건립지원으로 민족정신 함양, SAT 진흥으로 교육개선 등등으로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특히 김 前 총영사는 누구보다도 동포사회 행사에는 크고 작건 간에 구애받지 않고 참석해 동포들과 한 가족처럼 지냈기에 많은 동포들이 그를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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