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격고백 특별인터뷰 :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가오리 모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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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보 발행인의 단독 인터뷰 기사가 실린 월간조선 3월호 표지.

본보가 극비리에 추진한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가오리 양의 생모인 이경선 씨와의 전격 인터뷰’가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한국의 조선일보가 발행하는 유력 월간지인 ‘월간조선’ 3월 호는 ‘본보 발행인(연 훈)과 이경선 씨와의 전격 인터뷰 기사’가 포함된 ‘김영삼의 숨겨진 여인이라는 이경선 입 열다’라는 제하의 기사를 게재해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다.

본보가 지난 92년부터 끈질기게 추적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는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 보도 공방전’과 관련해 이번 월간조선의 보도로 말미암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모습이다. 전직 대통령의 사생활 비리가 담긴 이 기사로 인해 ‘월간조선’ 3월 호 판매량이 부쩍 느는 등 입소문이 번지고 있는 상태라 ‘YS 상도동 측’마저 이례적으로 바짝 긴장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번 기사는 ‘김영삼 씨가 안기부 김기섭 前 기조실장을 통해 이들 모녀에게 대통령 재직 및 퇴임시절을 합해 지난 93년부터 수 차례에 걸쳐 총 23억원의 거금을 건넸다’라는 이경선 씨의 충격폭로 내용을 담고 있어 이 같은 내용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자금조달’ 문제와 관련해서도 파문이 번질 전망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 자금이 舊 안기부의 국내 및 해외비자금의 실체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정치권에서 이 문제를 크게 비화시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관련 YS 상도동 측근들은 이번 월간조선 취재진과의 인터뷰를 통해 관련사실을 극구 부인하고 있기는 하나, 이경선 씨의 충격폭로 내용이 점차 사실일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면서 김영삼 前 대통령의 도덕성에 흠집이 나고 있는 형국이다.

이로써 지난 92년 2월 제14대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당시 본보의 자매지였던 LA 매일신문이 3회에 걸쳐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의 대표였던 김영삼 씨에게 30년 전 버려진 딸이 있다’고 기사화함으로써 촉발된 ‘김영삼 씨의 숨겨놓은 딸 공방전’과 관련 진위여부에 종지부를 찍을 계기가 마련되고 있다.

처음 기사화가 된 지난 92년 당시 김영삼 민자당 대표는 “사실무근이며 자신을 음해하려는 무리들의 공작”이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LA 매일신문 기사를 인용 전재한 인사이드 월드 발행인 손충무 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전격 구속시켰다가 20여일 만에 풀어주고 고소를 취하하는 등 큰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번 ‘본보 발행인과 이경선 씨와의 전격 인터뷰’가 월간조선에 전재되는 등 ‘사건 실체의 전모’가 차츰 수면 위로 부각되자, 상도동 측은 기존의 입장 표명과는 달리 “딸을 앞세워 돈을 요구하는 이경선 씨가 측은하다”는 식의 한발 물러선 반응을 내비치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이는 지난 1월 본보가 ‘김영삼 前 대통령의 버려진 딸 가오리 모녀의 통한의 편지’를 공개하는 등 이 사안과 관련 끈질긴 추적기사를 다뤄옴에 따라, 한국의 많은 주요 언론들마저 본보 홈페이지(www.sundayjournalusa.com) 인터넷 기사를 인용 보도함으로써 한국 내에서도 더 이상 숨겨질 수 없는 비화(秘話)로 자리잡고 있는 데에 따른 입장변화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한편 본보는 월간조선에서 보도하지 못한 기사를 포함한 취재전문을 총 3회에 걸쳐 ‘No Cut(무삭제)’으로 게재한다. 또한 본보 인터넷 홈페이지(www.sundayjournalusa.com)를 통해서 집중 보도할 예정이다.

연 훈<본보 발행인> [email protected]
















▲ 본보 발행인(연 훈)과 본보 사무실에서 자리를 함께 한 ‘YS의 사생아 가오리 생모’ 이경선 씨.
ⓒ2005 Sundayjournalusa







본보와 이경선 씨의 단독 인터뷰가 이뤄지기까지

이경선 씨는 본보가 예약 주선한 비행기 표로 지난 1월 14일 UA(United America) 항공편으로 LA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 비행기 편은 한국에서 출발해 동경에서 2시간을 경유한 뒤 LA에 도착하는 경로를 거치게 되어 있는 항공편이었다. 따라서 이 씨가 70세의 고령인 점을 감안할 때 무려 16시간이 소요되는 일정임에도 공항 터미널에 모습을 드러낸 이 씨는 대단히 피곤한 기색을 보였으나 필자가 보기에도 맑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자그마한 키(약 155 cm)에 강아지 그림이 있는 검은색 스웨터를 입고 터미널을 걸어 나오는 순간 직감적으로 한 눈에 이경선 씨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본보가 당초 입수해 공개했던 사진보다는 세월이 흐른 탓에 다소 연세가 지긋하게 든 모습이었지만 누가 본들 도무지 70세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건강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를 엿볼 수 있었다.

이경선 씨는 LA 공항에서 차편을 이용해 숙소로 향하는 도중 긴 여정에 따른 피곤함을 호소하여, 인근 약국에 들러 감기약과 사론 파스(통증 등에 바르는 스틱)를 구입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5시, 본보는 이 씨를 코리아 타운 내 한 일식당에서 만나 약 4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가졌다. 이 씨는 처음에는 다소 주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맥주를 한잔 마시고 나서부터는 ‘지난 43년에 걸친 인생 역정’에 대해 거침 없이 토로했다.

이 씨는 지난 1960년 YS와 만났던 처음부터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YS의 숨겨놓은 딸’에 대한 사실 여부 공방전에 종지부를 찍는 파란만장의 인생역전을 털어 놓았다. 이날 이뤄진 이 씨와의 단독 인터뷰는 한국 언론으로서는 본보가 처음으로 이뤄낸 개가다.


“가오리 아버지 이제는 뿌리를 찾아주세요”

드디어 김영삼 前 대통령의 버려진 딸 <가오리(42) 한국 명 주현희> 양의 모친 <이경선(70)> 씨가 본보와의 인터뷰를 통해 43년 만에 입을 열었다.

가오리 생모 이경선 씨
YS와의 부적절한 관계에 대해 처음으로 입을 열다


이경선 씨는 YS와의 첫 만남과정에 대해 묻자 침착한 어조로 “내가 김영삼 씨를 처음 만난 시기가 5.16 직후였습니다.

평소 저와 친하게 지내던 ‘미스 김’이라는 친구가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애인(조병옥 박사의 조카 조승만 씨)하고 절친한 아주 똑똑하고 젊은 정치인이 있는데 5.16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며 ‘너도 애기 아빠(이경선 씨는 前 독립산업 함창희 사장의 후처였음)하고 헤어져 쓸쓸하고 하니 내가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길래 네 사람이 함께 자리를 하게 된 것이 첫 대면이었죠”라고 운을 떼었다.

이어 이 씨는 “그 이후 친구 집에서 몇 번 만나 수 차례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던 것이 급기야 연인으로 발전되었죠”라며 “차츰 시간이 지나자 젊은 그에게 호감이 생기게 되었고 그 뒤 내가 살고 있는 익선동 집을 매일 같이 드나들면서 열정적으로 사랑을 하게 되었죠”라고 만남 당시를 말했다. 또 이 씨는 “사실 그 전에 나이 먹은 사람의 후처로 있다가 30대의 젊은 사람을 만나게 되니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솔직한 감정을 털어 놓기도 했다.

“우리는 쉽게 사랑에 빠졌습니다. 가정에 정이 없던 그 사람은 집을 나오기 무섭게 제 집으로 찾아 왔으며 하루종일 집에서 함께 지내다가 한밤중이 되어서야 귀가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러나 하루도 자고 가는 일은 없었어요. 그리고 매일같이 집에서만 만났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 볼까 두려워 밖에서 데이트 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 흔한 극장 구경 한 번 가지 못할 정도로 집에서만 만났지요. 그리고 나가서 밥을 먹으려고 해도 돈이 없어 나가지 못할 정도로 당시 김영삼 씨는 궁핍했지요”라고 이 씨는 말을 이어갔다.

“금전적으로 어려웠으나 미안했는지 매일 집에 도착해서 20-30분 씩 전화를 해주는 자상하고 친절한 남자였다”고 젊은 YS를 떠올리며 연애시절 뒷이야기도 털어 놓았다. YS가 당시 때로는 집에서 몰래 전화를 하다가 부인에게 들켜 대판 부부싸움을 하는 소리를 잘못 놓여진 수화기를 통해 엿듣기도 했으며, 어쩌다가 이경선 씨가 부인에 관한 질문을 하면 “그는 ‘부친의 성화에 하는 수 없이 결혼을 했지만 보기도 싫고 아이들이 있으니 살고 있는데 솔직한 심정으로 헤어지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었습니다”라며 “물론 제 기분을 맞추려고 하는 소리였겠지만 당시 부부의 정이 없었던 것만큼은 사실이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 YS와의 부적절했던 관계를 고백했다.

비극의 씨앗 가오리의 출산
병원 찾아와 “수고했다” 위로



이경선 씨는 “YS와의 만남이 약 2년 정도 되었을 무렵인 지난 62년 10월 16일(음력) 서울 종로에 위치한 <김호태 산부인과>에서 ‘가오리’를 출산했죠”라며 “그 때까지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은 식을 줄 몰랐고 임신을 했을 때에도 그와 상의를 하니 유산을 하지 말라는 한마디(이는 이경선 씨가 인터뷰 과정에서 ‘임신 중절하라’는 의미를 착각한 답변으로 사료됨)의 소리도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왕이면 나 닮은 아들 하나를 낳아 달라’는 말까지 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었습니다”라며 가오리의 출생 과정을 설명했다.

“가오리를 출산한 지 불과 2시간 후인 오후 7시 그는 친구인 조승만 씨와 병원으로 찾아왔었죠. 딸이라는 소리에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약간은 기분이 좋지 않은 표정을 짓다가 조승만 씨가 ‘자네 딸이 아니라고 할까봐 꼭 닮았네’라고 농을 던지자 그제서야 ‘닮지 않으면 내 딸이 아니지’라고 멋쩍어 했죠”라며 이 씨는 가오리가 출생한 날의 상황을 소상히 기억해 냈다.

– 출산한 지 두시간 후에 병원으로 왔다고 했는데 다른 말은 하지 않았나

<약 1시간 정도 머물면서 농담조로 ‘딸 자식은 3명이나 되는데 또 딸이니 딸 부자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왕이면 이 사람아 아들을 낳아야지 계집애가 뭐냐’고 해 제가 ‘아들은 내 맘대로 낳느냐 당신 탓이지’라고 한 말이 생각난다>

– 왜 1시간만 있었나

<당시 김호태 산부인과는 지금과 같이 현대식 구조가 아니라 온돌 방이라 앉아 있기가 상당히 불편했고, 친구와 같이 와서 어색해 내가 빨리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딸 아이를 한번 안아주며 한참을 쳐다보더니 ‘잘 키우라’는 한마디를 하고 돌아갔다>

‘가오리’가 태어난 이후 YS는 매일같이 삼선동 집(익선동에서 이사를 함)으로 찾아와 딸 아이를 안아주고 귀여워했으며 고집을 피우는 딸아이를 보고 “고집이 나를 닮아 유난하다”며 대견해 했던 일화에 대해서도 이 씨는 전했다. 그 동안 가오리의 출생 논란이 불거지자 YS는 “자신은 당시 정관 수술을 했다고 주장하며 사생아 논쟁은 음해다”라고 주장했었다.

이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이경선 씨는 “정관 수술을 한 것은 가오리가 태어나고 2년 뒤로 알고 있으며 수술 후 자신에게 이 같은 사실을 말하기도 했죠”라고 덧붙였다.

이경선 씨는 가오리 출산 후 YS와의 관계에 대해 “가오리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5.16혁명 정치해금으로 한국 정치가 재개되었고 그는 다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바쁜 일정을 지내면서도 변함없이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집으로 찾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상스럽게도 점점 그에게 싫증을 느끼게 되는 것을 느꼈습니다”라며 “유부남인 그와의 만남이 상당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게 되자 과연 이러한 맹목적인 만남이 가능할까라는 인간적 회의가 들기 시작했고, 그는 수 년간 단 한푼의 생활비도 주지 않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데 다소 화가 났으며 생활 능력이 전혀 없는 그에게 마음이 떠나고 있음을 제 스스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솔직히 털어 놓았다.

“어찌 보면 그제서야 비로서 이성의 눈을 뜨고 현실을 직시하니 그가 찾아와도 반갑게 맞아줄 수 없었고, 제 표정부터가 일단 냉랭해지기 시작했으며, 그의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생활태도에 불만을 표시하고 헤어질 결심으로 어느 날 그에게 ‘당신이 돈이 없고 나는 식구도 많으니 일본에 가서 돈을 벌은 후 다시 만나자’고 말하자 ‘정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허락해 64년 2월 경에 가수로 취직해 일본으로 건너갔죠”라며 자신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경위에 대해 이 씨는 설명했다.

이어 이경선 씨는 “이화여고 재학 당시 소프라노를 전공한 덕분으로 가수로 픽업될 수 있었습니다”라며 “당시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오사까-고베 등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기도 했죠”라고 덧붙였다.

이 때가 YS의 숨겨놓은 딸 가오리 양이 두 살 때였고, 과거 함창희 씨와의 사이에 둔 아들 함영준 씨가 8살 때였는데, 이경선 씨는 두 아이를 자신의 모친에게 맡기고 홀홀 단신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에서 이 씨는 다시 나중에는 YS와도 인연을 맺게 되는 남편 윤달용 씨를 만나게 되는데…






지난 92년부터 13년 여간의 발자취
‘김영삼 씨의 숨겨놓은 딸 보도 공방전’의 전말

















▲ 본보 자매지였던 LA 매일신문 1992년 2월 20일 자 1면.
ⓒ2005 Sundayjournalusa

지난 92년 본보의 자매 일간지였던 LA 매일신문 보도 이후 세간에 알려진 ‘YS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놓은 딸 가오리 양’에 대해 ‘사실 무근’임을 줄곧 주장해 왔던 김영삼 前 대통령.

하지만 이번 본보가 비밀리에 추진한 ‘가오리 양의 생모인 이경선 씨와의 단독 인터뷰는 지난 92년 경 본보 자매지(LA 매일신문)의 보도가 사실이었음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이번 인터뷰를 통해 그가 본보 자매지의 기사화를 통해 자신의 부도덕한 사생활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순간까지도 거짓과 모략으로 일관했던 추악한 이면상을 알 수 있어 씁쓸함(?)마저 느껴지는 인터뷰였다.

본보가 끈질기게 김영삼 前 대통령의 숨겨놓은 딸에 대해 추적 보도하는 이유는 지난 92년 본보 자매지 보도 이후 김 前 대통령을 비롯 한국의 언론들조차도 이 문제를 ‘조작, 음해, 허위사실’로 몰고 가는 등 사실을 왜곡시켜왔기 때문이다.

이에 그 진실을 밝혀냄으로써 소위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냈던 인물이 그간 얼마나 허구와 위선에 가득차고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었던가를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그 동안 진실을 추적해 온 10여년 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는 언론의 사명때문이었다.

한편 본보와의 인터뷰를 마친 이경선 씨는 LA에서 3박 4일을 체류했으며, LA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딸 가오리 씨와는 끝내 만나지 못하고 다음 일정지인 뉴욕으로 떠났다. 두 모녀가 상봉하지 못하게 된 배경에는 ‘호적정리를 비롯 금전적 문제’ 등으로 인해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되어 딸 가오리 씨가 의도적으로 모친 이 씨를 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대권에 눈이 먼 김영삼 씨의 진술서
‘가오리 이름도 들어 본 일이 없다’


지난 92년 2월 본보 자매지였던 ‘LA 매일신문’은 20일 자를 시작으로 총 3회에 걸쳐 ‘김영삼 씨의 30년 숨겨진 딸 가오리 뉴욕에 거주하고 있다’는 제하의 특종 보도와 함께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의 대통령 후보자인 김영삼 씨의 비화(秘話)를 공개했다.

이러한 비화(秘話) 내용은 이어 한국의 월간 잡지인 <인사이드 월드>가 5월 호를 통해 전재하는 과정에서 해당 잡지사 발행인인 손충무 씨가 전격 구속되는 일대 파란을 몰고 왔다. 이는 당시 집권당이었던 민자당의 김영삼 대표가 이례적으로 검찰에 진술서를 제출해 손 씨를 형사처벌 해줄 것을 요청함에 따라 이뤄졌으나 구속 20일만에 풀려나게 되었던 급작스런 해프닝이었다.

당시 김영삼 씨가 제출한 진술서에 의하면

1) 본인은 민주 자유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2) 본인은 손충무가 <인사이드 월드>라는 잡지에 본인이 30여년 전 사생아를 출산하고 그 모녀가 지금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는 기사를 게재하여 출판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3) 그 기사에 나온 ‘이경선’이라는 여인, 또 ‘가네꼬 가오리’라는 사생아에 관하여 지금까지 이름 조차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4) 지금까지 본인에 대해서 어느 누구로부터 내가 당신의 딸을 키우고 있다는 단 한마디의 말도 들어본 일이 없습니다.

5) 따라서 본인은 사생아인 딸이 있다는 위 기사에 내용은 완전히 허위사실이며, 이는 과거에도 본인에 대해 온갖 음해를 했던 부도덕한 일부 세력들이 또 다시 본인에게 정치적 위해를 가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날조 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본보 자매지였던 LA 매일신문의 기사와 사진을 자신이 발행하던 인사이더 월드 지에 지난 92년 5월 전재해 기사화한 뒤 구속 당할 당시의 손충무 씨. 손 씨는 지난 제15대 대선 때는 ‘김대중의 X 파일’로 잘 알려진 출판물 제작과 관련 권영해 前 안기부장과의 커넥션 관계가 모 월간지를 통해 알려지면서 구설수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손 씨는 이후 DJ가 집권하게 된 뒤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죄’로 2년에 걸친 만기 실형을 살고 풀려났고, 이어 지난 2001년 미국으로 망명한 뒤 이와 관련 ‘무고’를 주장하며 DJ, 박지원 씨 등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놓은 상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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