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수 머리모양이 왜 저렀습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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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은 지구촌을 흔든다. 자유세계는 말할 것도 없이 사회주의와 공산세계에서도 흥분을 심어주고 있다. 북한에서도 이번 월드컵을 한국측의 전폭적인 협조로 비록 녹화중계이나마 북한주민들이 월드컵의 흥분을 맛보고 있다. 이번 월드컵에서 한국인의 응원전은 전세계로 뻗어나가 지구촌의 새로운 문화로 형성되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재중동포가 가장 많은 연변에서도 응원전이 한창이라고 한다. 지난 13일 한국과 토고 전때는 현지 동포?유학생 1천 여명이 체육관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탈북자들도 섞여서 생전 처음 월드컵의 흥분을 느꼈다고 한다. 데일리NK 김영진특파원의 현지 르포를 재구성한다.


정리-데이빗 김 객원기자


















▲ 지난 13일 밤 중국 연변한국국제학교에서는 교민 유학생
1천여명이 토고전 응원을 펼쳤다. (데일리NK제공)


이날 체육관 구석에 자리잡은 탈북자 김순기(가명.34세)는 유학생들과 교민들의 응원함성이 울려 퍼질 때마다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참으로 부럽습니다. 저런 세계대회에 한국팀이 등수에 든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외국까지 나와 저렇게 열성적으로 응원을 펼치다니 대단합니다. 저 사람들 모두가 자기 의지대로 모였겠지요?”
그는 연변한인회에서 교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준 붉은색 응원 T셔츠를 그냥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인쇄된 태극기가 그를 망설이게 했다. 응원구호도 따라 하지 못하고 어정쩡한 박수로 대신할 뿐이었다. “솔직히 이 자리에서 나는 이방인 아닙니까? 제가 지금 한국에 있다면 나도 누구보다 열심히 응원했을 겁니다.”
김씨는 태극기가 인쇄된 옷을 입고 입으로 ‘대한민국’을 외치는 일이 어색하다고 했다. 이렇게 축구경기도 보고, 한국사람들도 구경하고, 공짜 옷이 한 벌 생겼으니 이것도 만족스럽다는 것이다. 전반 31분 토고의 쿠바자에게 선취 골을 빼앗기자 교민 응원단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북 소리, 꽹과리 소리, 응원구호가 잠잠해지자 김씨가 작정한 듯 질문을 던진다.


[왜 하필 ‘붉은악마’]
 
“그런데 왜 하필 응원단 이름이 ‘붉은악마’ 입니까? 고상하고 멋진 이름도 많을 텐데 어째서 ‘악마’를 자청합니까?” 순간 기자의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김씨는 웃고 있었지만 질문은 쉽게 웃어 넘길 수 없는 무게를 담고 있었다. “우리는 일생을 ‘붉은 것’에 내쫓겨 살았습니다. ‘붉은 사상’이다, ‘붉은기 쟁취 운동’이다, 사회든 사상이든 모두 ‘붉게 만들자’는 교육만 받고 거기에 시달리다 보니 이제는 아주 지겹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이 스스로 ‘붉은 것’으로 응원색을 정했는지 의문이 생깁니다. 거기다가 ‘악마’까지 갖다 붙일 필요가 있습니까?”
함경북도가 고향인 김씨는 만 5년째 중국 생활을 하고 있다. 2003년 가을에는 용정의 농촌마을에서 중국공안에서 붙잡혀 강제송환을 당하기도 했다. 8개월간의 노동단련형을 마치자마다 다시 중국으로 넘어왔다. 8개월 동안 죽도록 일하며 조국을 배반한 죄값을 치렀지만 여전히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붉은악마’란 1984년 멕시코 청소년 축구대회에서 한국팀의 인상 깊은 플레이에 대한 외국 언론의 칭찬에서 비롯됐다는 설명을 듣고서도 그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토고전은 동점골 없이 전반전은 종료되고 말았다. 패배의 불안감이 교민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 성급한 교민들 사이에서 “내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러면 그렇지!”라는 자조 어린 한숨이 들려왔다. 
 











[한국국제학교 진입계획]
 
 이때 김씨가 ‘내가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겠다’며 한국국제학교와 관련된 자신의 에피소드를 털어놨다. “2004년 다시 연변으로 탈북하고 나서 ‘아, 내가 한번 더 잡혀가면 이제 목숨을 장담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한국에 가야겠다고 결심했죠. 다른 탈북자들이 외국 대사관이나 외국인 학교를 통해 한국에 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이곳으로(연변한국국제학교) 들어가야겠다고 계획을 세웠던 적이 있었습니다.”
김씨는 ‘죽어도 후회는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품고 평소 교회에 같이 나가는 탈북자 2명을 설득해 함께 행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그들과 함께 사전답사에 나섰다. 그러나 연변한국국제학교는 그들이 상상했던 ‘국제학교’가 아니었다. 공안 경비병은커녕, 학교 정문을 지키는 수위도 없었다. 철조망 울타리도 보이지 않았다. 1m 높이나 될까 싶은 허술한 울타리 틈새로 책가방을 맨 꼬마아이들이 들락날락 거리고 있었다.
“같이 갔던 다른 탈북자들의 당황한 표정을 보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한국국제학교라고 해서 속으로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는데 막상 와서 직접 보니 평범한 학교였어요. 한눈에 봐도 ‘이런 평범한 학교에 들어가서 우리들의 정치적 요구를 주장해봐야 미친놈 취급밖에 더 받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탈북자들에 핀잔만 듣고 발길을 되돌렸지요.”
그날 이후 김씨는 ‘한국행’의 꿈을 완전히 포기했다고 한다. “2천 달러만 내면 한국에 보내 줄 수 있다”며 접근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럴 돈이 있으면 고향의 아이들에게 생활비부터 보내주겠다’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그의 두 아들은 60이 넘은 노모 혼자서 키우고 있다.
 
[“이천수 한국사람?”]
 
후반 9분 이천수의 프리킥이 토고의 골문을 가르자 연변학국국제학교는 교민들의 떠나갈 듯 한 함성소리로 가득 찼다.
“짝짝~짝~짝짝! 대한민국!”
이천수의 골 세레머니가 이어지는 동안 김씨도 자리에 일어나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연신 ‘만세! 만세!’를 외친다. 경기가 다시 진행되자 그도 마음을 진정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저 선수(이천수)는 국제경기에 나와서 왜 머리모양을 저렇게 합니까? 저렇게 멋진 골을 넣어도 외국사람들이 볼 때 한국의 대표선수인지 미국의 대표선수인지 구분도 못할 것 같습니다.” 김씨는 북한의 축구선수들은 모두 짧은 스포츠형 머리를 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공화국’에서는 ‘축구도 곧 전투’이기 때문.
후반 26분 ‘반지의 제왕’ 안정환이 회심의 역전골을 작열시켰다. 유학생 응원단들 중에는 서로 얼싸안고 체육관 바닥을 뒹구는 학생들도 있었다. 한국팀의 2-1 역전승. 월드컵 원정경기 첫 승이었다. 십년 묵은 체증을 다 날려 버린 듯 동포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장군님’만 응원하는 북한]
 
동포들이 모두 체육관을 빠져 나가도록 김씨는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쓰레기를 줍고 체육관을 다시 정돈하는 유학생 응원단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냥 부럽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한국이 축구를 잘해서 부러운 것보다 일반 백성들이 저렇게 자발적으로 모여서 자유롭게 응원을 펼치고, 또 저렇게 대학생들이 앞장서서 응원도 조직하고 청소도 진행하는 모습들은 북한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니까요. 제 나라가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외국에 나와서까지 저렇게 열성을 다할까요?”
김씨는 3시간 동안 한국 사람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했다. “한국 팀의 승리는 곧 우리 민족의 승리”라며 기자에게 덕담을 던졌지만, 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장군님’만 외칠 수 있을 뿐이지, 우리 국가와 우리 민족을 외칠 수 있는 자유가 없습니다. 이게 바로 나라 없는 설움이 아니겠습니까? 그래도 뭐 우리 조선도 앞으로 좋은 날이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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