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정부 2019년도 「이달의 6·25전쟁영웅」 김영옥 대령 선정

이 뉴스를 공유하기

김영옥 탄생 100주년 모국에서 ‘영웅’으로 부활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처장 피우진)는 2019년도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1월)을 선두로, 김재호 육군 일등병(7월), 홍은혜 여사(8월) 등 12명을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이달의 6‧25전쟁영웅>은 전쟁사 연구기관, 경찰, 각 군 등에서 추천 받은 인물을 대상으로 군사 편찬연구소 연구원 등 내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에서 심층 논의하여 선정하였다. 올해에는 6‧25전쟁으로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전선을 넘나들며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이 발굴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195만 유엔 참전용사들의 활약상이 집중 조명되기도 했다. 김영옥 미국 육군 대령은 재미동포로 6‧25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

▲1944년 연합군이 프랑스 비퐁텐마을을 나치에서 해방시킨 직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사진제공: 김영옥평화센터)

▲1944년 연합군이 프랑스 비퐁텐마을을 나치에서 해방시킨 직후 마을 주민들과 함께. (사진제공: 김영옥평화센터)

원입대하여 탁월한 지휘력으로 한국 전선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제2차 춘계공세 때 구만산. 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에서 직접 부대를 진두지휘하며 부대원을 독려해 승리로 이끌었고, 유엔군 부대 중 가장 빠른 진격으로 제일 먼저 캔자스 선에 도달하였다. 켄사스선은 6‧25 전쟁 중 1951년 서울 탈환 후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구-양양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이었다.

콘라도 디 얍(Conrado D. Yap) 대위는 6‧25전쟁 중 필리핀 제10대대전투단 특수중대 중대장으로 참전하여 율동전투에서 군자산 좌측 257고지를 탈환하고 위기에 빠진 부하를 구출하던 중 적의 저격탄을 맞아 전사하였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유엔군의 일원으로 싸웠으며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아 필리핀 최고 무공훈장(Medal For Valor)을 수여받았으며, 2018년 7월 한국 정부로부터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또한 민간인으로서 6‧25전쟁 중 자신을 헌신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홍은혜 여사는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 제독의 부인으로 해군 최초의 군가 바다로 가자 등 다수의 해군 군가를 작곡하였으며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의 구매 자금을 모으는데 앞장섰다. 백두산함은 6‧25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 인민군 특수부대원 600여 명을 태우고 부산으로 은밀히 침투하던 북한수송선을 격침시켜 건국 이래 최초의 해전 승전기록을 남겼다. 홍은혜 여사는 6‧25전쟁 중 부상병과 유족들을 돌보는데 헌신했으며 평생 해군과 6.25 전사자 유가족을 위해 살았다.

“2019년을 유엔군에 감사해로”

그 외에도 대한민국 수호에 목숨을 바친 영웅들이 있었다. 김재호 육군 일등병은 수도사단 제26연대 1대대 소총수로 수도고지 전투에 참전하여 적의 전차포 사격으로 엄체호가 무너지면서 다른 전우들이 모두 전사한 가운데 단신으로 적중에 뛰어 들어가 총검을 휘두르며 용맹하게 싸웠으며, 조관묵 경찰 경감은 1950년 춘천경찰서 양구파견대 중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인민군 제10사단 1개 연대 4천여 명 규모의 패잔병에 맞서 싸웠으며 2천 여 명의 양구시민을 후방으로 안전 하게 피신시키던 중 전사하였다. 김금성 공군 준장은 승호리 철교폭파작전, 송림제철소 폭격작전, 351고지 근접항공지원작전 등 우리 공군이 출격한 거의 모든 주요작전에 참가하여 획기적인 전공을 세웠으며 한국 전투조종사로는 두 번째로 많은 195회에 달하는 출격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전쟁 당시 각 전투에서 보여준 영웅들의 살신성인 정신은 국민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번에 선정된 6‧25전쟁영웅은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각종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피난민

▲김영옥이 전투를 치른 프랑스 동북부 비퐁텐마을의 성당. 입구 동판에 당시 대위였던 김영옥을 기리는 문구가 있다.(사진제공  김영옥평화센터)

▲김영옥이 전투를 치른 프랑스 동북부 비퐁텐마을의 성당. 입구 동판에 당시 대위였던 김영옥을 기리는 문구가 있다.(사진제공 김영옥평화센터)

과 고아들을 구출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오늘날 자유롭고 평화로운 대한민국이 있게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국가보훈처는 6‧25전쟁에 참전한 국내외 참전용사의 공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2019년도 이달의 6‧25전쟁영웅 달력과 포스터를 제작. 배포하고, 유가족 초청행사 및 선정패 증정식 등 다양한 행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김영옥 대령은 전쟁 중에는 직접 무기를 들고 세상을 지키는 방패 역할을 한 ‘전쟁영웅’이었고, 전쟁이 끝나자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권익을 신장시키는 데 앞장선 ‘인도주의자’였다. 김영옥 전기를 출간한 재외동포재단의 한우성 이사장은 “김영옥 대령은 세계 젊은이들의 롤 모델 이 되기에 충분하다”며 “겸손과 헌신, 용기와 희생이라는 정신적 유산을 남긴 그의 영웅적 면모가 현대사에서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 이사장은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면 통일 한국의 영웅이 되기기에도 충분하다”고 강조했다.

“김영옥은 통일한국의 롤모델”

지난 2005년 세상을 떠난 김영옥 대령은 1919년 독립운동가의 아들로 LA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는 전설적 전쟁영웅으로, 미국 내 소수계나 사회적 약자들 사이에서는 그들의 인권을 대변하는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소설에서나 있을것 같은 용감하고 비상하며 인간미 넘쳤던 김영옥은 암울한 시대에 태어나 세계를 무대로 기상을 떨치고 사회적 약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자랑스러운 한국인이었다. 김영옥 대령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이라는 2개의 전쟁에 참전해 3개국에서 싸웠고, 그 3개국 모두에서 최고무공훈장을 받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전쟁영웅이다.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십자무공훈장, 1945년)의 김 대령은 당시 대위로 로마해방전의 주역으로 당시 활약상은 1944년 5월 UPI 통신을 타고 세계로 타전됐다.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피사를 해방시켜 제갈공명을 뺨치는 천재적 작전장교로서 명성을 재확인시켰다(이탈리아는 동성무공 훈장을 수여했다가 종전 후 공훈등급을 재분류,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또 프랑스 최고무공훈장(레지옹도뇌르, 2005년)인 김 대령은 당시 대위로 프랑스 동북부 보주 산맥의 브뤼에르, 비퐁텐의 해방자. 비퐁텐 마을 성당은 그의 이름과 활약상을 새긴 동판을 외벽에 붙여 그를 기리고 있다.

그는 ‘카피텐 김(김 대위)’이라는 이름의 전설로 남아 있다(프랑스는 종전 후 십자무공훈장을 수여했다가 최근 심사를 다시 해 최고훈장을 수여했다). 한국 최고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 2005년): 1951년 5월 하순~6월 초순에 있었던 유엔군 3차 반격 당시 미 육군 31연대 1대대를 이끌고 반격의 견인차가 돼,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중부전선에서 전선을 60킬로미터나 북상시켰고 이 전선이 오늘날 휴전선이 됐다. 한국정부도 한국전쟁 관련 무훈에 대해서는 서훈하지 김영옥4않는다는 입장을 바꿔 태극무공훈장 수여를 결정했다. 미국 최고무공훈장(명예무공훈장): 미국도 2등 훈장(특별무공훈장) 1개, 3등 훈장 2개, 4등 훈장 2개, 5등 훈장 2개 등을 줬으나, 아직도 미국은 최고훈장은 수여되지 않고 있다. 이는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인종차별, 한국과 한국인의 무관심, 재미동포사회의 정치력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김영옥 대령은 결코 전쟁광도 군인도 아니다. 그의 인도주의적 정신은 한국전쟁 당시 최전선을 지키 며 수백 명의 전쟁고아들을 돌볼 때부터 이미 발현되기 시작했다. 그는 1972년 예편 후 평생 을 사회봉사활동에 바쳤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살아남는다면 사회를 위해 일생을 바치리라”고 했던 맹세를 지킨 것이었다. 그는 국경을 초월한 영원한 인도주의자였다. 사회봉사를 위해 그가 남긴 업적은 세계가 인정하는 전쟁영웅으로서 그가 남긴 무공에 비해 결코 손색이 없다. 그는 여성, 아동, 청소년, 노인, 빈민, 유색인 등 사회적 약자의 권익 옹호와 신장에 평생을 바쳤다.

‘100% 한국인임을 자랑’

또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운동 노선을 지지했던 대한인동지회 소속이었던 재미동포 독립 운동가(김순권)의 아들답게, 죽는 날까지 “나는 100% 한국인이며 100% 미국인”이라며 한국인임을 자랑스러워했다. 한편 지난달에는 김영옥 평화센터 주최로 ‘아름다운 영웅’(저자 한우성)독후감 경연대회 입상자들이 국군장병 및 가족들이 김영옥대령의 유럽 전적지 답사로 뜻깊은 행사를 가졌다. 이번 전적지 탐방은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의 후원 5,000만원(미화 약 5만 달러), 군인공제회의 후원 1,000만원 (미화 약 1만 달러)을 주요 재원으로 실현되었다. 이번 김영옥 대령이 2차 세계대전 중 싸

▲1945년 2월 유럽 전선에서 돌아온 김영옥과 그를 마중 나온 어머니를 찍은 LA타임스 기사 사진.

▲1945년 2월 유럽 전선에서 돌아온 김영옥과 그를 마중 나온 어머니를 찍은 LA타임스 기사 사진.

웠던 전적지 답사는 김영옥 일대기 독후감 경연대회 입상 자 국군군장병들로 이뤄졌다. 이 행사는 (사)김영옥평화센터가 국군장병 대상으로 실시하여 입상자를 선정했는데, 입상자 국군장병과 일부 가족 31명은 김영옥 2차대전 전적지인 이태리-프랑스를 지난 11월 13~22일까지 답사했다. 유럽 답사지는 이탈리아에 김영옥의 2차 대전 전적지인 로마‧안지오‧피사‧몬테카시노 그리고 프랑스의 파리‧스트라스부르‧브뤼에르‧비퐁텐 등이다. 김영옥 대령이 2차대전 중 싸웠던 프랑스와 이태리에는 지금도 김영옥 대령을 기리는 역사적 사실이 숨쉬고 있다. 한예로 프랑스 동북부의 브뤼에르에서 불과 수㎞ 거리에 있는 작은 마을 비퐁텐. 이 마을 성당의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진 동판이 있다.

“100대대 영웅 중 한 명인 김영옥 대위가 성당 오른쪽에서 부상당해 포로로 있다가 치넨씨와 함께 탈출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치하에 있던 마을을 해방시켜 준 연합군에 대한 감사의 상징이다. 치넨씨는 당시 김영옥 대위와 함께 탈출한 위생병. 이 동판의 문구는 70여년이 지난 현재도 뚜렷 하다. 비퐁텐마을 사람들은 성당의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새겨진 이 동판을 수시로 보면서 자신들을 위해 피흘린 연합군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다. 당시의 연합군은 수만 명에 달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연합군을 ‘김영옥’이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이같은 김영옥 대령 전적지 답사 사업을 추진한 주역은 과거 김영옥평화센터 한우성 이사장 이었다. 그는 현재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우성 이사장은 ‘김영옥 전도사’로 불린다. 재미 언론인이었던 한 이사장은 잊힐 뻔한 김영옥의 숨은 공적을 세상에 널리 알린 인물 이다. 한 이사장은 김영옥 생전에 그를 8년 이상 취재하고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북스토리) 이라는 책을 냈다. 유럽과 미국, 한국을 발로 뛰며 김영옥 관련 자료와 증언을 발굴해서 재현해낸 생생한 평전 이다. 그가 3000일간 취재를 하며 흘린 땀방울은 비단 한 인물 스토리를 재현해내는 데 그치지 않는다. 6‧25전쟁을 전후로 한 한국 현대사와 2차 세계대전사의 상당 부분이 한씨에게 빚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취재로 듬성듬성했던 역사의 퍼즐이 한층 촘촘해졌기 때문이다. 한 이사장은 김영옥 대령 전적지 답사를 통해 우리는 실체적 역사를 눈으로 보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한 김영옥 대령의 영웅적 리더십이 느껴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