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후 20년 미국은 과연 무엇을 변화시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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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와의 20년 전쟁’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년전 9월 11일 뉴욕 고층 빌딩으로 돌진한‘미국 여객기를 이용한 자살테러’는 미국을 전혀 다른 나라로 만들었다. 80년전‘진주만 공습’은 상대편이 누구인지가 분명했다. 그런데 20년전 미국 여객기를 이용한‘자살 테러’는 상대편이 누구인지를 처음에는 몰랐다. 지금도 의혹은 남겨져 있다. 9·11 자살테러는 미국 역사상 유례가 없는 테러 공격이었다. 세계도 충격 그 이상이었다. 미국이 어떻게 나올지에 대하여 전전긍긍했다. 당시 이 사건은 당장 세계 증권가에 폭풍적인 파장을 몰고 어면서 주가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쳤고 각각의 국가마다 마치 계엄령을 방불케하는 삼엄한 분위기로 만들었다. 미국이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세계 역사의 흐름이 뒤바뀔지도 모를 사태이기 때문이다. 역사가들은“제2의 진주만 공격”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1941년 12월 7일‘진주만 공습’ 이전과 이후의 미국은 전혀 다르고 진주만 공습 이전의 미국은 그날로 사라졌다. 2001년 9월 11일‘자살 테러’이후의 미국도 그 이전의 미국이 아니다. 9·11 이후 20년이 지나면서 코로나-19가 엄습하면서 미국과 세계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화시키고 있다. <성진 취재부 기자>

web911terror9·11자살 테러는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외부로부터 직접 공격을 당했다는 점은 같지만, 차이점도 크다. 진주만 공습은 단지 예상을 못했던 기습일 뿐, 일본의 전형적인 군사작전이었다. 게다가 진주만은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었고, 때문에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는 그 피해와 위협이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으며, 죽거나 다친 사람들도 대부분 군인이었다. 그러나 9·11은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의 민간 항공기를 납치하여 미국의 심장부인 최대도시 뉴욕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과 미국방부 청사를 공격한 테러였다. 무엇보다 비행기가 고층 건물에 자살 돌격을하고 빌딩이 무너져 내리고 앞이 보이지 않는 먼지 폭풍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광경을 주위에서 TV를 통해 생생하게 실시간으로 눈 앞에서 목격한 사건이었다. 대다수의 미국인 들에게 준 충격과 두려움은 진주만 공습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9·11 테러의 여파로 미국은 “PATRIOT Act”(애국자법)등을 통과시키며, ‘국가위기사태’라는 명목 하에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연방정부의 관료주의의 벽으로 인해 정보 공유가 안된 점이 사태를 막지 못한 원인이라 보고 국토안보부와 같은 최고 국가기관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로 민주주의 사회, 특히 미국같이 자유를 제일로 하던 사회에서 특히 이민법에 보기 드문 제약 이 가해졌다.

무슬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게

한편, 2004년 10월 당시, 오사마 빈 라덴은 인터넷을 통해 “왜 9·11 테러를 계획하게 되었는가?”를 비로소 밝혔다. 1982년 6월 이스라엘 공군의 무자비한 폭격(레바논 내전)으로 붕괴되는 베이루트 고층 빌딩과 무고한 희생자들의 모습을 TV로 지켜보며 이를 갈았던 오사마 빈 라덴은 이스라엘의 후원자인 미국의 건물을 공격해서 그대로 되갚아줄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또한, 9·11 사건은 미국 내와 전 세계의 모든 무슬림들을 잠재적 테러리스트로 인식되게 만들었고, 사건 이후 미국에서만 1년 동안 400여 명의 무슬림들이 증오범죄를 당했다고 한다. 알카에다의 테러 때문에 애꿎은 무슬림들까지 피해를 본 셈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9·11 테러 이후, ‘테러리스트’라는 아랍인들을 칭하는 인종차별적 표현이 하나 더 생겼다. 이때부터 그 유명한 슬로건인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20년간 지금까지 테러와의 전쟁은 끝이 없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9·11당시 한국은 그야말로 초비상사태였다고 한다. 그 사건이 혹여 북한측의 소행이었다면 바로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날 것은 자명했다. 당시 테러사건은 2002 한일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있는 상태였기에 더더욱 문제였다. 한국은 그해 9월 13일과 14일을 전국적으로 추모일로 정하고 5분간 묵념 시간을 가졌으며, 비인도적인 테러에 대해 공식적으로 애도를 표하는 성명서를 내고 국회도 규탄 결의안을 냈다. 북한 역시 이례적으로 꼬리를 내리고 미국에게 애도를 표하며 자신들의 소행이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북한 정권은 평소 원수처럼 여겼던 미국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테러 규탄 및 희생자 애도 성명까지 발표하면서 더 나아가 그해(2001년) 11월 3일에는 반테러 국제 협약에 전격적인 가입을 선언하였다.

911-4그러나 2002년 1월에 부시 대통령에게 ‘악의 축’으로 지목되면서 북미관계가 더 틀어 졌고, 이는 하반기 영변 핵 파동으로도 이어졌다. 일본은 미국의 우방국이자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국 입장으로서도 매우 중대한 사안이 었다. 그후 일본은 ‘테러대책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그동안 준비한 ‘유사법제 3법’ 통과에 박차를 가해 2003년에 최종 통과시켰다. 중국 정부도 당시 장쩌민 국가주석이 직접 미국 정부에게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 성명을 내긴 했지만 당시 반미 감정이 팽배해있던 터라, 일부 중국인 들은 테러 속보를 듣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2010년대 이후 중국도 극단 이슬람 세력의 테러에 맞은 경력이 있어서 이슬람 테러리스트 세력에 관한 문제만큼은 지금까지 미국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아프가니스탄은 당시 알 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을 내놓으라는 미국의 요구에 탈레 반은 거절을 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전혀 상관없다고 발뺌을 했다. 특히 당시 탈레반의 현대문물 탄압으로 미국에서 9·11 테러가 있는지도 몰랐던 수많은 아프간 주민들은 뜬금없이 갑자기 미국과 전쟁이 났다는 소식만 전해 들어야 했다.

20년 아프간 전쟁의 발단이 된 9·11 사건

당시 파키스탄은 탈레반 정권의 후원자였으나, 당장 길을 비키라는 미국의 요구에 조용히 길을 비켰다. 물론, 처음에는 파키스탄이 미국 전투기들의 영공통과를 거부했으나, 미국의 리처드 리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의 “영공을 통과시켜주지 않으면 폭격 당할 준비나 하시오. 석기시대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바로 길을 비켜주었다. 당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9·11 테러는 신의 응징’ 이라는 공식 성명을 발표하면서 항전했으나 나중 참변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등 서유럽 국가: 당시 온 유럽도 이 사건으로 인해 엄청난 충격에 빠졌으며 자본주의 진영이자 서방세계의 대표적인 나라들인만큼 전반적으로 미국과 입장이 같았다. 각국 정상들은 직접 미국 정부에게 애도 성명과 테러집단에 대한 비판 성명을 냈다.

한편 평소 무슨 테러만 일어나면 서로 자기들이 했다라고 자랑하며 말하고 다니기 바빴던 테러 조직들은 9·11 테러 직후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적극적으로 부인하고 다녔다. 그뿐 아니다. 이들 테러 조직들은 미군 및 미국의 정보기관들에게 자신들이 한 짓이 아니라고 말한 것은 기본이고, 더 나아가서 다른 테러 조직자들이 전부 의심스럽다고 앞다투어 밀고하고 다녔다. 처음에 1순위로 지목을 당한 알 카에다 역시 자기들이 한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다. 오사마 빈 라덴 본인도 미국이 자기 뿐 아니라 탈레반을 통째로 멸망시켜버리겠다고 덤벼들자 겁을 먹었는지, “난 모르는 일이다”라고 발뺌을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서 결국 자신들의 소행이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했다.

그러나 9·11 테러 이후 10여 년간 미국이 다시 전 세계적인 영향력을 휘두르면서, 이러한 낙관적인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사라졌다. 당장 9·11 이전에 나온 90년대 세계 국가들과 역사, 미래를 전망한 책들과 9·11 이후를 포함하는 세계와 역사, 미래를 예측하는 내용을 다룬 책들만 봐도 분위 기가 일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그나마 9·11의 영향이 약간 사그라 들었다고 하지만 2008년 미국을 강타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세계적인 공황을 불러오면서 팍스 아메리카나 체제 아래서 인류의 영원한 번영을 외치던 낙관주의는 사라져버렸다. 이로 인해 이슬람공포증이 본격적으로 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비 이슬람 문화권 국가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혐오, 분노, 공포를 은연중에 드러내게 되었고 이슬람교 포교가 쉽지 않게 되었다.

인류의 번영을 외치던 낙관주의 사라져

또한 문화적으로도 신나고 흥겨운 음악이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당대의 라틴 팝 음악가인 라 오레하 데 반 고흐가 남미와 스페인에서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틴 팝이 미국 내에서 힘을 못쓰게 되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2001년 9·11 테러 20주년인 11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가 당시 테러에 연루됐는지에 관해 조사한 문건을 공개했다. 이번 공개는 조 바이든 대통령 지시에 따른 것이다.

이 문건에는 사우디 측 인사가 테러범의 여행, 숙박 등을 지원했다는 진술이 있지만, 9·11 유족들이 의혹을 제기한 것처럼 사우디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관여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없다는게 외신의 평가다. CNN방송 등에 따르면 FBI가 기밀을 해제해 공개한 16쪽짜리 문건에는 사우디아라비아인 오마르 알-바유미(Omar al-Bayoumi)가 적어도 2명의 9·11 항공기 납치 테러범을 돕기 위해 통역과 여행, 숙박, 자금 지원을 제공하는데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기술돼 있다. 이 문건은 당시 로스앤젤레스 사우디 영사관의 지도부와 개인적 교류를 유지해온 한 남성을 상대로 2015년 11월 진행한 조사를 토대로 작성됐다. FBI는 로스앤젤레스 지역 대학생인 알-바유미를 사우디 정보 요원이나 사우디 영사관 관료로 의심했다. 실제 2017년 미 법원에 제출된 기록에 따르면 FBI가 알-바유미가 비밀정보요원이라는 증거를 발견했다는 내용도 있다. 과거 미 의회의 9·11 테러 조사위원회는 알-바유미가 사우디 정보 요원이거나 아니면 납치범을 지원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알-바유미는 한 식당에서 이들을 우연히 만났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알-바유미는 9·11 테러 몇주 전 미국을 떠났다.

이번 문건 공개 조치는 9·11 피해자와 유족이 그간 사우디 정부의 9·11 개입 의혹을 제기하며 관련 문건 공개를 요구한데 따라 이뤄졌다. 미 정부는 과거 일부 사우디 국적자와 비행기 탈취범 간 관계를 개략적으로 설명했지만 사우디가 직접 연루됐는지는 분명히 하지 않았다. 9·11 위원회는 2004년 최종 보고서에서 사우디 정부가 조직적으로, 또는 고위 당국자가 개인적으로 알카에다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결론낸 바 있다. 지난달 미 법무부는 FBI가 비행기 탈취범과 공모 의심자 간 조사를 완료했다고 밝혔다.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3일 9·11 테러 조사와 관련한 문건의 기밀해제 검토를 법무부 등에 지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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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BI, 한국계 웨슬리 유 등 순직 요원 조명

web911영웅 웨슬리 유FBIFBI가 9·11 테러 20주기를 맞아 그를 포함해 테러 현장 수습 후유증으로 이후에 사망한 요원들을 재조명했다. FBI 요원 중 9·11 사후 투병자 등을 합쳐 17명이 희생됐다. 이중 유일한 동양계인 한국계 웨슬리 유 요원도 조명했다. FBI에 소개된 한국계 요원 웨슬리 유. 1996년 FBI 요원으로 합류해 활약하다 2015년 10월 안타깝게 숨졌다. 9·11 당시 서른 두 살이던 한국계 연방수사국(FBI) 요원 웨슬리 유는 현장에 출동해 훼손된 건물과 비행기 잔해 그리고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분류하는 역할을 맡았다. 보관 시설에서 테러 수사를 위한 물증과 유독 물질 등을 분리하는 것도 그의 일이었다. 악취를 뿜어내는 유독가스와 매연으로 자욱한 공간에서 그는 사후 수습에 헌신적으로 임했다. 1969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미국 이민 후 버지니아주 페어펙스 카운티에서 자랐고, 수사 기관 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1996년 FBI요원의 꿈을 이룬 한국계 요원이었다. 그러나 9·11 테러가 벌어지고 4년이 지난 뒤 그는 골수종 진단을 받고 힘겨운 암투병을 시작했다. 그리고 2015년 10월 아내와 자녀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미 질병통제예방센터(CDC) 등 보건 기관들의 조사를 통해 웨슬리 유의 암 발병은 9·11 테러 현장 수습 당시 과도하게 유독물질에 노출됐기 때문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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