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보훈의 달 특집3]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받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헌신과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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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문제는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1880-1953)는 그의 변호사 생애를 통하여 일제하에서 조선인 독립 운동가들과 일본과 조선에서 온갖 차별을 받는 조선 농민들을 위해 헌신한 투사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4년에야 일본인 최초로‘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다. 당시“아무리 공로가 있어도 불구대천의 원수인 일본인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건 말이 안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자국 일본의 모진 핍박과 탄압에도 평생을 한국인과 한국에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오히려 우리 정부가‘일본인’이라는 정체성 때문에 반세기 넘도록 우리 건국의 은인을 방치하고 잊어버렸던 셈이었다. 우리는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우리의 진정한 친구이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정부로부터 온갖 차별과 탄압을 받은 은인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업적을 이규수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의 글과 동아일보, 월간조선, 주간조선의 기사들을 발췌해서 소개한다. <성진 취재부 기자>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그의 좌우명을 “살아야 한다면 민중과 함께, 죽어야 한다면 민중을 위해” 라는 말로 삶을 살아간 사람이다. 또한 그는 “평생 약자를 돕고 살겠다” 면서 “조선 문제는 결코 조선에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조선 문제는 동양의 발칸 문제이다. 조선은 세계 평화와 혼란을 좌우하는 열쇠이다. 전 세계의 문제이자 전 인류의 문제다”라며 한국이란 나라의 역사성과 정치적 의미를 일찍부터 간파한 인물이었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는 1880년 11월 13일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보면서 전쟁과 제국주의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가졌다. 동시에 묵자의 겸애사상과 톨스토이의 사상을 접하며 이에 많은 감명을 받고 사람들을 돕고 헌신하는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가 어렴풋 하게나마 조선의 처참한 현실을 인식하게 된 것은 동학농민운동 후였다. 동학농민 운동을 진압하러 갔다가 돌아온 귀향 군인들이 “일본도를 한번 날리니까 조선인 두 놈의 목이 동시 에 떨어졌다”고 늘어놓는 ‘무용담’을 들으며 그는 조선인에 대해 동정과 연민의 정을 느꼈다. 조선인을 처음 만난 것은 1899년 입학한 도쿄의 메이지 법률학교(메이지 법대의 전신)에서였다. 그는 조선인 유학생 들과 어울리며 조선의 현실을 조금씩 알게 됐다.

▲ 박열열사와 후미코

이후 정교회 신학교까지 들어갔으나 3개월 만에 자퇴하였고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우쓰노미야 지검 검사로 부임했다. 하지만 검사로 활동하던 중 생활고로 동반 자살을 시도하다 아들만 죽고 어머니는 살아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그녀를 살인미수로 기소하는 법률의 미비점과 적용에 대한 문제점에 회의를 느끼고 검사직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었다. 1911년에 그는「조선의 독립 운동에 경의를 표함」이라는 글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강제 병합 (1910년)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한국의 독립 운동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이 글을 쓴 것 때문에 일본 제국 경찰에게 조사를 받는다. 이후 그는 주로 항일 독립 운동가들의 변호를 맡았다. 후세 변호사가 ‘자신이 가야할 길’을 결심하고 이를 대외에 공표한 것은 마흔 살 때인 1920년 이었다. 5월 15일 지인들과 언론에 배포한 ‘자기혁명의 고백’은 “평생을 탄압받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서겠다”는 굳은 의지의 표명이었다. 후세 변호사는 ‘고백’에서 “앞으로 주요 활동 장소를 법정에서 사회로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구체적으로는 ‘자본가와 부호의 횡포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사건’ ‘인간차별에 맞서 투쟁하는 사건’ 등 변호활동의 기준을 마련했다. ‘조선인과 대만인의 이익을 위한 투쟁사건’도 그 기준 속에 있었다. ‘자기혁명의 고백’은 1920년 6월 1일 창간한 자신의 개인잡지 ‘법정에서 사회로’에 실려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후세는 ‘자유법조단’을 결성,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이 가야할 길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조선인과 관련된 사건이라면 그것이 독립운동이든 사회주의운동이든 아나키스트운동이든 운동의 성격을 가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일화가 많지만 일제 시절 그가 처음 서울을 방문했던 때를 그려본다. 그가 서울 경성역에 내린 것은 1923년 8월 1일 새벽이었다. 진작부터 오고 싶었으나 차일피일 미뤄지다가 이날 처음 서울 땅을 밟은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각종 단체의 ‘성대 출영-새벽의 경성역’이라는 제목으로 그 새벽의 모습을 전했다. 환영행사가 펼쳐지는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후세 변호사는 그가 조선에서 해야 할 세 가지 임무를 마음속으로 곰곰이 되뇌었다.

조선인과 관련된 사건 묻지마 수임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고, 형평사 운동에 힘을 실어주며,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의 사상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서의 연설이었다. 오랜 여정에 몸이 파김치가 됐는데도 그는 그날 밤 서울 경운동 천도교당에서 열린 북성회 주최의 강연회에 참석, ‘인간생활의 개조운동과 조선 민족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연설로 일제를 비판했다. 연설 도중 단상에 앉아있는 일본 고등계 형사가 수차례 경고를 보냈지만 개의치 않았다.

의열단원 김시현에 대한 변호도 맡았다. 김시현은 김지섭 등 의열단원들과 함께 총독부, 경찰서, 동양척식회사 등 주요 건물을 1923년 3월 15일 일제히 폭파하기 위해 사전준비를 하던 중 의열단 안으로 파고든 밀정의 밀고로 체포돼 재판을 받고 있었다. “‘흉계’로 포박함은 정치도덕에 위반하는 것”이라는 후세 변호사의 변론에도 불구하고 김시현은 1923년 8월 징역 10년형을 언도받고 5년 5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했다. 1923년은 운동이 전국에서 맹렬히 전개될 때였다. 형평사 운동은 이 땅의 마지막 차별적 존재였던 백정들이 그들의 권익을 확보하고자 전개했던 차별 철폐 운동이었다. 1923년 4월 25일 경남 진주 에서 발족된 후, 보수적인 양반과 일부 농민들의 반대 속에서도 세를 규합해 나갔다. 후세 변호사는 지방으로 순회연설을 도는 한편, 형평사 운동 관련자들을 만나 지지·격려한 뒤 1923년 8월 말 조선 을 떠났다.

후세의 조선인 변호는 당시가 처음은 아니었다. 1919년 도쿄의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 백관수, 송계백 등 조선청년독립단의 변호를 맡았었다. 당시 그는 “만약 일본 재판관이 이를 내란 음모 등 중죄로 다스린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무법의 야만국가로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될 것” 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1923년 8월 말 한 달간 조선에서의 연설과 변호와 격려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온 후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9월 1일의 관동 대지진이었다. 일본 전체가 공포와 혼란에 휩싸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시내 곳곳에 불을 질렀다”는 유언비어로 조선인에 대한 악감정이 극에 달했다. 일본도와 죽창으로 무장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을 발견하면 막무가내로 무기를 휘둘렀다. 계엄군·경찰들까지 일본 정부의 ‘불령 조선인 단속 공문’을 빌미 삼아 폭력에 가세했다. 후세 변호사는 겁에 질린 100여명의 조선인을 받아들여 숙식을 제공하는 한편 유언비어를 날조한 계엄당국과 경찰서를 항의 방문해 야만적 행위를 따져 물었다.

“일본은 야만국가로 전락할 것”

▲ 후세 다쓰지 변호사(오른쪽)과 박장중(중) 박열열사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인연을 맺게 된 대표적 인물이 박열(1902~1974) 열사다. 9월 3일 검속된 박열은 일본 천황을 폭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애인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1924년 1월 ‘대역죄’로 기소됐다. 후세 변호사는 법정에서 “조선인 학살이라는 범죄행위를 감추기 위해 조선인의 범죄를 조작해낸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으나 박열과 가네코는 1926년 3월 25일 사형을 선고받고 열흘 후인 4월 5일 무기로 감형됐다. 사형선고가 있기 전인 3월 1일, 후세 변호사는 박열과 가네코의 옥중 결혼식을 성사시켰다.

1926년 7월 23일 가네코가 창살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는 의문의 죽음 소식이 전해졌다. 후세 변호사는 박열의 동지들과 함께 야밤에 가네코가 묻혀있는 곳을 찾아가 시신을 발굴·화장해 유골 을 자기 집에 안치했다가 경찰의 감시망을 피해 박열의 친형에게 전해주었다. 이 같은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구나 조선인도 아닌 일본인이 한많은 조선인 박열의 일본 부인의 유골을 함께 모셔 남편의 고향 땅으로 전한 일은 진정한 친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맡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의 재판은 한 둘이 아니다. 그것도 거의 무료 변론이었다. 1924년 1월, 김시현과 함께 8개월 전 서울에서 일제의 주요 건물을 폭파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돼 상하이로 탈출했던 김지섭이 천황을 폭살할 계획으로 도쿄에 잠입했다. 김지섭은 1월 5일 황궁과 가까운 ‘이중교’에 폭탄을 투척한 후 체포돼 후세 변호사가 변호에 나섰으나 무기징역이 선고됐다. 김지섭은 복역 중 단식투쟁으로 일제에 항거하다 1928년 2월 20일 일본 땅에서 순국했다.

후세 변호사가 두 번째로 조선을 방문한 것은 1926년 3월이었다. 동양척식회사의 토지수탈에 항의하는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직접 일본으로 찾아와 혈서와 소송 의뢰서를 건네며 도와줄 것을 부탁한 게 방문의 계기가 됐다. 당시 궁삼면에는 “왔소! 왔소! 후세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 라는 환영 벽보가 붙을 정도로 후세에 대한 기대가 컸다. 후세 변호사는 토지수탈 현장을 정밀 조사했으나 총독부 고등계 형사들의 방해로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두차례 복역에 변호사 자격박탈까지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변호사 자격을 회복한 뒤엔, 한신 교육투쟁(한신 교육 사건)이나 도쿄 조선 고등학교 사건 등, 재일 한국인 사건 및 노동 운동에 대한 변호를 맡았다. 그 후 6·25까지 목격한 그는 정전 협정이 체결된 직후인 1953년 9월 13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한국의 독립 운동의 변호에 힘써서 노력해왔던 것에 대한 공로로, 2004년 일본인 최초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후세 다쓰지 본인이 이미 고인인 관계로 외손자인 오이시 스스무 씨가 대신 전달받았다. 이전까진 독립 운동이라는 것 자체가 일본 제국에 항거하는 것인데 “아무리 조선을 도왔다고 해도 우리의 원수였던 일본의 국민을 독립 유공자로, 건국 기여자로 볼 수 있겠는가?”라는 의견도 일부 있었으나, 그의 경우 일생 동안의 행적이 명백하고 일관되게 한국의 독립에 도움을 준 것이었고 자국에서도 온갖 탄압과 핍박을 받아가면서까지 헌신을 한 점을 매우 높게 인정받았다. 그의 업적 자체에는 누구도 의심을 품지 않았으나, 일본인이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운동을 한 적이 있다는 점 때문에 독립 유공자로 지정되 어려움을 주는 요인이 되었다. 2001년부터 서훈 논의가 이루어졌으며 2004년에 이르러 훈장이 추서되었다. 추서 당시 유일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였고, 2018년 후세 다쓰지 본인이 직접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에게 애국장이 추서되면서 일본인 건국훈장 수훈자가 2명이 되었다. 위에서 말했듯 그가 변호했던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일본인으로서 건국훈장을 수여 받았을 정도로 공적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국사 교과서에는 지학사 교과서를 제외하면 소개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동아시아사 교과서에는 등장한다.

2012년 3월 1일에 방영된 KBS1 역사스페셜〈3·1절 기획 조선 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일본인 변호사 후세 다츠지〉편과 2014년 10월 30일 EBS <역사 채널e>의〈조선 민중과 함께, 후세 다쓰지〉편에서 다루어졌다. 2017년 영화 <박열>에 등장한다. 2019년 3·1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다시 그의 공적이 재조명되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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