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 특집] ‘크리스마스의 기적’ 레인 빅토리호 한국인수 관련 잡음이 계속되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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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으로 인수 떠들며 정치권 종교계 민간인 뒤섞여 ‘사기성 행태’
■ 국가보훈부까지도 레인 ‘빅토리호’ 인수에 나섰다가 ‘망신살’ 자초
■ 민간에서 정부 지원으로 ‘빅토리 호 인수추진단’ 결성해 매입추진
■ 일부 사기꾼들 행태 논란”LA총영사관과 연결 시켜주겠다”며 농간
■ 레인 빅토리호 1990년 12월 14일 ‘국가 역사적 선박 박물관’지정
■ 갖가지 뜬소문과 실체 없는 언론보도로 혼선… ‘절대 사실 아니다’

LA산페드로 항구에 자리 잡고 있는 레인 빅토리호(SS Lane Victory, Berth 52, 2400 Miner St, San Pedro, CA 90731)는 영화 ‘국제시장’을 통해서 LA한인들에게나 국내에서도 잘 알려진 선박이다. 한국전쟁 1‧4 후퇴 당시 크리스마스 이브(1950년 12월 24일)에 ‘흥남철수 작전’에서 북한 피란민 7천여 명을 구해 남쪽으로 내려온 소위 “크리스마스의 기적”의 주인공 선박이다. 그런데 이 레인 빅토리호를 한국으로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한국 정치권에서부터 종교계 그리고 민간단체까지 설치고 나와 정작 레인 빅토리호 운영 재단 측이 ‘황당하다’는 입장에 놓였다. 이전에는 한국의 지자체끼리 인수 경쟁까지 벌어지는 웃지못할 사태까지 벌였다. 현재 레인 빅토리호는 미국정부로 부터 ‘국가 역사적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된 선박박물관(Ship Museum)으로 비영리(a non-profit 501(c)3 organization)재단과 함께 자원봉사자 승무원들이 두 개의 선상 박물관을 유지하고 운영하고 있다. 미국 정부가 역사적 기념물로 공식 지정한 국가 기념물을 제 3국에서 인수하려 한다니 한마디로 ‘웃기는’ 행태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LA에서 부동산 관계로 한국과도 거래를 많이 해 온 한 전문인 L 브로커는 최근 ‘황당한’ 의뢰(?)를 받았다. 교계의 재산가로 알려진 K목사를 비롯 한국에서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그룹이 산 페드로항에 있는 레인 빅토리호를 매입할 수 있는 방안을 주선해 달라는 요청에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L브로커는 전부터 레인 빅토리호 와 관련된 사기성 소문을 익히 듣고 있었다. L 브로커는 “한동안 수그려졌던 레인 빅토리호 인수설이 또 나돌고 있는데, 이번에도 사기성이 농후하다”면서 “LA에 있는 P모씨는 한국의 인수 희망자들에 대하여 ’미국에 오면 LA총영사관의 담당 영사도 만나게 해주겠다’는 말로 마치 총영사관으로부터 자신이 이 역할을 하는 것처럼 위세를 부리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한국의 국가보훈부(전 국가보훈처)는 지난해 8월 9일 당시 보훈처 박민식 처장(현재 보훈부 장관) 은 서울 용산 대통령 집무실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업무보고에서 6·25 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서 민간인 철수에 투입됐던 <레인 빅토리함>(SS Lane Victory)을 국내로 들여오기로 했다고 동아일보와 아시아 투데이가 보도했다. 인수 계획이 아니라 모든 조치가 끝나 최종 인수만 남았다는 인상이 짙다. 이 매체들에 따르면 당시 박민식 처장은 보고에서 용산 미군기지 터에 조성되는 용산공원은 미국 워싱턴의 <내셔널 몰>처럼 국가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추모하고 호국보훈 정신을 되새기는 상징공간으로 꾸밀 계획이며 아울러 베트남전 파병의 관문이었던 부산 북항 부두에도 기념공원이 조성된다고 보고했다. 그 같은 보도가 있은 지 이미 1년이 지났다. 그동안 보훈부는 한차례 레인 빅토리호를 방문했다는 설이 있었지만 확인되지 않았다. 그 후 지금까지 보훈부는 대통령 보고계획에 대한 ‘레인 빅토리 호(SS Lane Victory) 국내 인수에 대한 후속 발표는 없었다.

LA총영사관 ‘아는 바 없다’ 손사래

정작 레인 빅토리호를 운영하고 있는 마리타임 센터(Maritime Center)은 전혀 아는 바 없다’입장을 밝혔다. LA총영사관 측도 “우리도 아는 바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국가보훈부의 레인 빅토리호 인수설의 의혹은 올해 또 다른 면에서 나타났다. 박 장관은 지난 2월 당시 LA동포사회의 큰 이슈로 등장한 LA 흥사단 단소가 철거 위기를 두고 있는 상황에서 “보훈처가 최초로 단소를 매입했다”고 발표해 국내외적으로 호응을 받았는데, 본보의 탐사보도로 해당 단소 매입자는 정부보훈처가 아니라 북가주 거주 윤행자 SF 광복회장이 설립한 단체 명의로 되어있는 ‘허위 발표’로 나타났다. 보훈부는 9월 15일 현재까지도 흥사단 단소 매입 과정의 실체를 밝히지 않고 있다. 또 한편 레인 빅토리호 국내 인수설 보도는 2017년 당시에도 연합뉴스를 포함해 국내 많은 매체들이 다투어 보도했다. 지난 2017년 7월 14일자 연합뉴스는 <흥남철수 기적, 레인 빅토리호 국내 인수 본격 추진>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작전에 참여해 피란민 7천여 명의 목숨을 구한 레인 빅토리호의 국내 인수가 본격적으로 추진된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인근 항구에 정박해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레인 빅토리호를 우리나라로 가져와 평화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기념공원을 만들기 위한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고 했다. 또 이 매체는 ‘레인빅토리함 한국인도 추진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윤경원(당시 59세) 예비역 해병준장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조만간 레인 빅토리호의 한국 인도를 위한 비영리법인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착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추진단은 전날 서울 마포구 KT빌딩에서 회의를 하고 구체적인 사업 추진 방안을 논의해 이같이 결정했다고 윤 단장은 설명했다. 추진단은 지난 2013년 결성됐지만 그동안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하다가 레인 빅토리호에 대한 미국 정부의 지원이 끊겨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을 알고 한국 인도를 다시 추진키로 했다는 것이다.

재정이 어렵다고 국가 기념물을 매각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지닌 한국 측 관계자들의 망상(?)을 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매체는 특히 지난2017년 6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방미 중 버지니아주 콴티코의 국립 해병대 박물관에 있는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아 헌화한 뒤 기념사를 통해 흥남철수작전 때 남한으로 온 부모의 사연을 소개한 것도 레인 빅토리호 인수 추진의 계기가 됐다고 했다. 당시 문 대통령은 “67년 전 미 해병들은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난적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숭고한 희생을 치렀다”며 “10만여 명의 피란민을 구출한 흥남철수 작전도 성공할 수 있었고, 빅토리호에 오른 피란민 중에 제 부모님도 계셨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2년 후 저는 빅토리 호가 내려준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장진호 용사들이 없었다면, 흥남철수 작전의 성공이 없었다면, 제 삶은 시작되지 못했을 것이고 오늘의 저도 없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런 문 대통령의 기념사는 미국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왔다.

보훈부 ‘레인 빅토리호 인수할 것’

윤 단장은 이와 관련해 “레인 빅토리호 인수에 대해 미국 쪽 관계자들을 접해보니 미국에서 반대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인터뷰에서 윤 단장은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는 레인 빅토리호 역시 미국 정부의 재정 악화로 지원이 중단되면서 기금으로 운영되는 상황이다. 자칫하면 외부에 매각돼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전철을 밟게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윤 단장은 전했다는 것이다. 인수추진단은 정부와 민간의 지원을 받아 레인 빅토리호를 한국에 들여온 후 항구에 정박시키고 주변에 평화기념공원을 조성해 흥남철수의 기적을 되새기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한다는 계획이다. 레인 빅토리호가 피란민을 태우고 도착했던 경남 거제시가 유력한 장소로 검토되고 있다. 거제시는 2011년부터 이 사업을 추진했지만 진척을 보지 못했다. 한때 거제시와 부산시가 서로 자신들이 인수를 해야한다고 경쟁까지 했다고 한다.

레인 빅토리호를 한국에 들여오는 데는 50억여 원(미화 약 500만 달러)이 소요될 것으로 추진단은 판단하고 있다. 레인 빅토리호 내부를 흥남철수 작전을 기념하는 전시관으로 꾸미고 주변 지역을 함께 개발한다는 구상이다. 이처럼 인수설의 보도 내용에 따르면 ‘현재 레인 빅토리호는 미국정부 재정 지원이 어려워 자칫 다른 선박처럼 팔려 고철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과 ‘빅토리호 관련자들도 국내 인수에 반대하지 않을 듯’이란 점인데, 실제로 레인 빅토리호 측은 ‘그런 점이 인수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라며 레인 빅토리 호 운영에 코로나-19 기간에 어려움이 있었고, 그 같은 어려움은 비단 레인 빅토리호 뿐만 아니라 미국 전체가 겪는 고통이었다고 설명했다. 요점은 어느 누구로 부터도 레인 빅토리호에 대한 매입을 구체적으로 문의한 사례도 없으며, 설사 있었더라도 그것은 미국의 역사적 랜드마크에 대한 의미를 모르는 “행위”이기에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레인 빅토리호에서 자원 봉사자로 활동하는 한 봉사자는 “한국의 일부 정치인들이 가끔 방문해서 기념 촬영을 하고서는 이 ‘역사적 레인 빅토리호’ 운영을 돕고 싶다며 립서비스를 하는 경우를 보기도 한다”면서 “이런 점들은 모두 한국을 욕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1988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국 상선 참전 용사들에 의해 인수된 후, 레인 빅토리호는 1989년 6월 12일에 산 페드로 항구로 예인되었다. 레인 빅토리호는 선박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미국정부는1990년 12월 14일에 레인 빅토리호를 ‘미국 역사적 랜드마크’(National Historic Landmark)로 지정했다. 현재 자원봉사자 승무원들이 두 개의 선상 박물관을 유지하고 운영한다. 2000년 9월 13일, 미연방의회는 SS 레인 빅토리호를 분쟁의 시기 동안 국가에 대한 미국 상선의 봉사와 희생의 대표로 인정하는 결의안 327을 통과시켰다. 레인 빅토리호와 같은 미국 상선 함대의 선박들은 전쟁 노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장비, 보급품 및 인원을 운반함으로써 나라에 중대한 물류 지원을 제공하였다. ‘미국 역사적 랜드마크’로서 사적지는 미국 정부가 역사적으로 훌륭한 의미를 지닌 중요성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한 구조물을 의미한다.

현재 미국의 국가 사적지 예정 명부에 등재된 90,000여 곳 중 약 2,500여 곳, 즉 약 3%만이 국가 사적지로 인정받았는데, 레인 빅토리 호는 2500 사적지 중의 하나다. 레인 빅토리호 매리타임 센터 이사회(The Board of Directors for the Lane Victory Maritime Center)의 임무는 S.S. 레인 빅토리호를 완전한 가동과 해양에 적합한 상태로 복구하고 유지하는 것이며, 살아있는 역사적 기념물로, 그리고 박물관으로서 이 나라를 보호하고 전쟁 기간 동안 중요한 보급선을 유지하는 데 있어 미국 상선과 미국 해군 무장 경비대의 중요한 기여와 희생을 강조하는 역할을 수행했음을 기리고 있음을 목표로 하고 있다. 레인 빅토리호는 자원봉사자들이 상주하고 있으며, 역사적 의미 외에도 소방, 경찰, 항만경비, 군 장병들의 훈련장과 해양학생, 학교, 스카우트단, 일반인들의 역사교육의 중심지를 제공하고 있다.

황당한 빅토리호 인수 놀음 장난

한편 레인 빅토리 호에 대하여 다큐멘타리로 조명해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한인 1.5세의 크리스토퍼 H.K 이 감독(Christopher H.K. Lee, Producer Director)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포가튼 빅토리(잊혀진 승리-Forgotten Victory)”가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이 작품은 지난 2021년 11월 13일 LA코리아타운의 CGV 극장에서 최초로 상영되었는데 당시 약 300명의 관객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포가튼 빅토리’는 한국전쟁 ‘흥남철수작전’에서 많은 피란민을 성공적으로 탈출시키고 퇴역 후 현재 샌피드로 항에서 역사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레인 빅토리호를 조명한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레인 빅토리호는 한인들에게 더욱 깊은 인상을 주었고, 미국인들에게는 “영웅적인 크리스마스 기적의 선박”으로 새롭게 자랑하는 랜드마크로 알려졌다. 당시 그 영화가 CGV에서 상영되는 동안 관객들은 전쟁의 참상에 가슴 아파했고, 레인 빅토리호가 위기를 뚫고 피란민들을 거제도에 내려놓을 때는 눈시울을 적시며 감격해 했다.

이 감독과 영화작업을 함께 한 이지영 프로듀서는 “포가튼 빅토리는 중공군이 흥남항을 점령하기 전날인 1950년 12월 24일, 성공적으로 레인 빅토리호에 7000명의 피란민들을 실어 탈출한 흥남철수 작전이 왜 ’크리스마스 의 기적’이라는 불리는 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레인 빅토리호는 1950년 12월 흥남항에 미군과 군수물자 철수를 위해 동원된 미국 상선이다. 하지만, 적군의 공격이 예정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피란민을 외면할 수 없었던 미군 지휘부는 군수물자를 버리고 레인 빅토리호에 피란민 7000여명을 태워 탈출시키는 영웅적 결정을 내렸다. (별첨 박스 기사 참조) 이 작품을 제작한 한 크리스토퍼 이 감독은 “포가튼 빅토리”를 통해 한국전쟁의 긴박했던 상황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레인 빅토리호라는 역사적인 유산을 길이 간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레인 빅토리호와 함께 흥남철수의 “또 다른 영웅”인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993년 중국에 팔린 후 고철로 해체됐다. 이 감독이 “포가튼 빅토리”를 제작하고 시사회를 통해 관객들과 소통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감독은 “포가튼 빅토리”를 대학 초청 영화의 밤 또는 국제영화제를 통해 계속해서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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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사람이 없었다면 모두 죽었을 것’

“크리스마스 기적”을 만든
아몬드 장군 그리고 현봉학 박사

한국전쟁 중 레인 빅토리호의 피란민 구출작전이 벌어진 ‘흥남철수작전’에서 북한 피란민 10만여 명 구출에는 한국인 의사 현봉학(1922~2007년)과 미군 아몬드 장군이 주인공이었다. 현 박사는 1949년에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 소재 버지니아 커먼웰스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에서 임상병리학 펠로우십 과정을 수료하고 1950년 3월,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모교인 세브란스 병원에서 교수 및 의사로 근무했다. 그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국가를 위해 무언가 뜻 깊은 일을 하고 싶다고 하자 당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그를 미 육군 25사단의 통역관으로 배속시켰는데, 나중에 강원도 고성에 주둔 중이던 김성은 부대에서 해병대 소속 통역관으로 ‘봉사’를 이어갔다. 그때 마침 함경도 함흥에 주둔하던 미 제10군단장 아몬드 소장이 고성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 해병대를 시찰하기 위해 왔다가 통역을 맡은 현봉학과 만나게 됐다. 아몬드 소장은 현봉학이 미국에서 리치몬드주립 의대에서 공부했다고 하자 깜짝 놀라며 자기 고향이 바로 버지니아 루레이라며 반가워했다. 아몬드 소장은 결국 현봉학을 자신의 미군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임명했다.

현봉학 통역관 ‘살려 달라’읍소

한편 9‧15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국 해병대와 미군은 북진에 북진을 거듭하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큰 곤경에 빠졌다. 아몬드 소장 휘하의 동부 전선 미 10군단은 함경도의 높은 산악지대에 있는 장진호 지역으로 전진하던 중 갑작스럽게 중공군에게 포위를 당했던 것이다. 이른바 ‘장진호 전투’였다. 1950년 겨울,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17일 간 미군 3만 명이 중공군 6만7000명에 의해 포위됐다.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몰아닥친 한파로 동사자가 속출했다. 중공군의 총격에 의한 희생보다 추위로 인한 인명 손실이 더 많았다. 미군은 악조건에서도 공군기의 대대적인 엄호사격을 받으며 포위망을 간신히 뚫을 수 있었다. 미군 자료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미군 1029명이 전사하고 7338명의 비전투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행방불명자는 4894명에 달했다. 그렇게 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장진호 지역의 포위망을 벗어난 미군이 집결한 안전지대가 바로 항구도시 흥남이었다. 그때 흥남에는 12월초부터 많은 피란민이 모여들고 있었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피란민들이 너도 나도 항구도시 흥남으로 모여 들었던 것이다. 미군 역사학자 찰스 브리스코 박사(Charles H. Briscoe, PhD)는 2011년에 펴낸 자료에서 ‘미군은 북진하면서 점령한 북한 여러지역에서 지유민주체제의 자치대를 구성했는데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어 북한군이 함께 내려오면 미군이 조성한 자치대 관련자들이 학살당할 것으로 보고 남쪽으로 피란길에 오르면서 탈출 항구인 흥남으로 대거 몰리게 됐다는 것이다.

10만 피란민 안전하게 대피

이때 현봉학은 흥남부두에 몰려온 피란민의 운명을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며 그들을 구출할 방도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10만여 명에 달하는 피란민을 육로로 흥남에서 원산을 거쳐 남쪽으로 피란시킨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비행기로 공수하기에도 그 수가 너무 많았다. 현봉학은 고심 끝에 뱃길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결론짓고 김백일 육군 제1단장과 함께 아몬드 사령관을 찾아갔다. 간절한 마음으로 해군 수송선을 이용해 피란민을 남쪽으로 옮겨달라고 간청했다. 이들의 제안을 들은 아몬드 장군은 처음에는 헛된 망상쯤으로 치부하며 냉정하고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사령관으로선 피란민보다 흥남부두로 몰려온 유엔군 약 10만 명과 많은 군수 물자를 후송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긴박한 과제였기 때문이었다. 현봉학은 물러나지 않았다. 피란민을 살려달라고 끈질기게 애원했다. 적지 흥남에 남겨두면 피란민은 공산군에 의해 모두 비참하게 죽게 될 거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며 계속 설득했다.

현봉학이 아몬드 장군을 만날 기회는 현실적으로 제한적이었다. 이걸 해결해준 이들이 있다. 한 사람은 당시 장군의 참모로 있던 에드워드 포니 해병대 대령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도쿄의 맥아더 총사령관이 전선의 상황을 직접 보고하라고 파견했던 알렉산더 헤이그 육군 대위였다. 현봉학의 간절함이 차츰 아몬드 사령관의 마음을 열어 작전의 실현 가능성을 검토할 즈음 연락장교 헤이그는 흥남부두에 모인 피란민 10만 명의 구출 필요성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진지하게 보고했다.

마침내 맥아더 사령부로부터 구출하라는 명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많은 사람이 흥남 철수를 아몬드장군의 작전으로만 알았다. 아몬드 소장은 유엔군 사령관의 흥남 철수 지시를 받고 철수 계획을 수립했다. 200여척의 배가 최대 규모의 해상 수송 작전을 진행할 동안 항공 지원과 함포 사격도 지속됐다. 1950년 12월 14일 흥남부두에 구름처럼 모여든 10만명의 피란민은 눈보라 치는 혹한의 날씨 에도 언젠가는 승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노약자는 물론 젖먹이 어린이도 많았다.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서도 조용히 기다리는 피란민의 염원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미 해군 수송선 LST가 부두에 접안해 선두의 큰 문을 양쪽으로 활짝 열었다. 그리고 피란민의 승선이 시작됐다.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선원들은 선두의 문이 열리면 피란민이 너도 나도 몰려와 아수라장이 되리라 믿고 만반의 준비를하고 있었다. 그런데 피란민들은 의외로 차분하게 여러 줄로 나뉘어 질서정연하게 승선했다. 나중 한국을 방문한 15명의 미국 노병 중 한 분은 당시 상황을 회고해주기도 했는데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많은 피란민이 큰 소요 없이 차례로 승선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대 탈출 작전을 시작한 지 열흘째가 되던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전야까지 흥남부두에서 거제도로 선박에 실려 온 피란민의 수는 무려 9만1000명이었다. 열흘이라는 짧은 기간에 이루어진 대 역사였다. 실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이동으로 기억되기에 충분했다.

흥남철수 영웅 ‘현봉학’의 토로

흥남 피란민 철수 작전 또는 흥남 대 탈출은 젊은 현봉학의 역할이 없었으면 분명 불가능한 프로젝트였다. 지난 1992년 현봉학 박사가 아주대 교수로 재직할 당시 총장이 현 박사에게 흥남 피란민 철수 작전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그러자 그의 밝은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속내를 토로했다. “나를 두고 흥남 대탈출의 장본인, 흥남 철수의 영웅이라고 하는데 그런 수식어를 들을 때면 인간사의 다른 쪽을 보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나는 흥남 철수로 인해 수백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니까요.” 그러곤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머리를 숙이기까지 했다. (출판사 기파랑이 출간한 ‘이 나라에 이런 사람들이’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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