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역사학자 故 박병선 박사의 ‘직지’ 발견과 위대한 한국인의 꿈

이 뉴스를 공유하기
■ 정부, 학계가 방치한 문화재 발굴, 말기암 역사학자가 발견
■ ‘약탈 당한 문화재 찾아라’는 스승의 부탁으로 직지에 헌신
■ ‘직지’ 시연 및 홍보, 50주년 LA한인축제장에서 처음 마련
■ LA한국문화원, “직지, 금빛 미래를 열다”기념 ‘특별전시회’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 ‘직지’라는 사실은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직지’가 한국인이 처음으로 창조한 금속활자 문명이라는 사실을 새롭게 발견한 인물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가난한 시절, 33세의 최초 한국인 프랑스 유학생의 꿈은 인고의 삶이었다. 커피와 딴딴한 빵조각으로 살아가면서 그녀의 꿈은 우리 선조들이 발명한 금속활자를 찾는 일이었다. 끝내 ‘스파이 혐의’로 몰리면서도 굴하지 않고 직지가 서양사람들보다 78년이나 우리 선조들이 앞서 발명했다는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증거해 결국 유네스코가 2001년에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하기에 이르렀다. 2027년이면 직지 창제 650주년이 되며 미연방 의회도서관을 포함해 전세계 많은 도서관에서 ‘지난 1천년 역사에 가장 훌륭한 문명, ‘직지’를 기념하게 된다. 그래서 ‘직지’에서 한국인은 새로운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됐다.
<성진 취재부 기자>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가장 오래된)의 금속활자본은 한국 청주에서 간행된 ‘백운화상 초록불 조직지심체요절(이하 직지 直指, Jikji)’로 현재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가 무슨 연유에서 멀고 먼 프랑스까지 가게 된 것일까? 그리고 직지의 존재는 어떻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일까? 말기암을 지닌채 직지 고증과 외규장각에 바친 역사학자 故 박병선 박사(1928~2011. 11. 23)의 인생은 인고의 삶이었다. 대한민국이 한참 빈곤하던 1960년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생활과 (현 역사 교육과)에 졸업한 그녀는 33살의 늦은 나이에 프랑스 유학 길에 올랐다. 한국인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었다는 점에 그녀는 책임감을 깊게 담았다. 그녀의 스승은 유학길에 오르는 그녀 에게 “병인양요 때 프랑스가 약탈 해 간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한다.

당시 그것이 프랑스에 어디 있을 것이라는 추측만 있을 뿐,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아 그녀는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고서점 까지 홅으며 돌아다녔다. 그녀는 유학 초기 벨기에 루뱅에서 동양사학을 전공한 후 파리 제 7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취득 후, 1967년부터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하게 된다. 그녀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한 이유는 프랑스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의궤를 찾을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와 희망 때문이었다. 도서관은 넓었다. 매일 일과처럼 하루 종일 쉬는 시간도 없이 모든 장서를 뒤져보던 어느 날 그녀는 도서관 깊은 곳에서 먼지에 뒤 덮인 한 권의 두툼한 책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직지(直指)와의 첫 만남이었다. 직지(하, 下권)이었다. 당시 도서관에서 직지는 중국 고서로 분류된 채 어지럽게 분류가 되어있었고, 상(上)권은 찾을 수 없었고, 하권은 첫 장이 찢겨져 있었던 상태였다. 그녀의 눈에 1377숫자와 마지막 장에 적혀 있는 주자인시(鑄字印施/ 쇠를 부어 만든 글자로 찍어 배포하다.)라는 문구가 들어왔다. 1377이란 숫자는 그 책이 만들어진 연대였다.

고려 공민왕 때 쓰여진 백운화상초록불 조직지짐 체요절(이하 직지)는 1372년에 쓰여졌고,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인쇄되었다. 1377년, 그것은 서양의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무려 78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때부터 박병선 박사는 직지가 금속활자인쇄본임을 고증하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고증에 대하여 전문 지식이 없었던 그녀는 우선 한국의 학자와 교수 들에게 문의를 위해 수십 통도 넘는 편지를 쓰고, 동양의 활자사와 관련된 서적을 찾으려고 백방을 뛰었다. 박 박사는 직지가 금속 활자라는 것을 고증하면 된다는 생각에 지우개, 감자, 흙 등으로 활자를 직접 만들기 까지 했다.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했던 노력 끝에 그녀는 인쇄소에서 받은 금속활자를 찍어본 것과 책에 찍힌 활자의 형태가 동일 한 것을 보고, 직지가 금속활자본임을 마침내 검증해낸다. 5년간의 고증 끝에 직지는 1972년 5월 29일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 도서의 해’기념 도서 전시회에 출품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故 박병선 박사에게 있어 ‘직지’란

직지는 대한제국 시기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1853~1924)가 주한 프랑스 공사로 지내다 본국에 가져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외교관들은 자신이 주재한 나라의 책을 수집하여 외국 어 학교인 동양어학교에 보내는 것이 관습이었고,그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에 머물렀는데 한 번씩 많은 양의 고서를 수집하여 모교인 동양어학교에 보냈다. 1896년과 99년 사이에 수집하여 프랑스 로 가져갔다고만 알려져 있을 뿐, 정확히 그가 어떻게 해서 <직지>하권을 수집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그 경위는 현재까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프랑스로 건너간 직지가 1900년대 파리 만국박람회 한국전에서 대중들에게 공개된 이후 2023년 까지 일반 대중들에게 공개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박병선 박사의 필사적인 노력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직지는 지금도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채 차갑고 어두운 프랑스 국립도서관 책장에 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한계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박병선 박사는 외규장각 도서 반환과 직지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2001년 9월 4일 금속활자본 직지는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가 더 널리 알려지게 된다.박병선 박사가 외규장각 의궤들을 발견한 것은 ‘직지’ 발견 몇 년 뒤의 일이다. 휴일 어느 날 국립 도서관 의 베르사이유 별관에 파손된 고서 보관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 때마침 바람 쐬러 나온 고서 더미 속에서 의궤들을 발견했다. 피탈 109년 만인 1975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고서들의 존재를 알린 대가로 국립도서관에서 해고되고 말았다. 죄명은 비밀 누설 죄였다. 약탈이라는 그들의 ‘원죄’를 드러낸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이후에도 그는 일반인 자격으로 날마다 도서관을 찾아 의궤 297책의 목차와 내용을 정리했다. 끈질긴 집념의 결과였다. 박병선 박사는 한 평생을 우리 문화재 연구와 반환 운동에 전념했다. 그녀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을 때도 다시 일어나 연구에 매진했다. 2011년 5월 27일 외규장각 도서는 ‘대여’의 형식으로 나마 145년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암투병 중중이던 박병선 박사는 휠체어를 타고 외규장각도서 귀한 대국민 환영식에 참석하여 국민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도서가 다시 프랑스에 가지 않고 한국에 영원히 남도록 노력 해 주길 부탁한다” 누구도 그녀의 연구를 알아주지 않았지만 홀로 조국을 위해 외규장각 의궤 반환이라는 본인의 꿈 을 위해 한평생을 바친 박병선 박사가 있었기에 우리들은 보다 더 큰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국립박물관(BnF)은 지난 4월 12일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직지)’ 원본을 무려 50년 만에 ‘인쇄하다! 구텐베르크의 유럽(Imprimer! L’Europe de Gutenberg)’ 특별전의 사전 공개 행사를 통해 일반에게 공개됐다. 직지는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유럽인들에게 처음 공개됐다. 이후 70여년 이상 도서관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1972년 유네스코 ‘책의 해’ 전시회에 특별 출품되어 다시 세상에 나왔다.

도서관측은 처음 기증 받을 때부터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 임을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직지가 구텐베르크 성서(1455)보다 78년 앞선 세계 최고 금속활자본이라는 사실은 1972년 4월 28일자 조선일보 신용석 파리 특파원의 보도를 통해 세계적 특종이 됐다. 직지와 관련해 박병선 박사의 공로 중에는 1972년 12월 ‘직지’ 사진을 들고 와 국내 학자들이 연구 할 길을 열었고, 프랑스 군대에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를 서고에서 확인해 귀환의 단초를 마련 했다. 1972년 ‘세계 도서의 해’ 전시 도록에는 ‘1377년 흥덕사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됨’이라고 간략히 소개됐지만, 1년 뒤 열린 ‘동양의 보물’ 특별전 도록에는 비교적 상세한 설명이 들어있다. 첫 전시 가 개최된 후 박병선 박사가 들고 온 직지 흑백사진 자료를 통해 손보기 선생 등 국내 학계 에서 많은 연구가 진행된 덕분이다.

1천년의 역사 돌려논 위대한 발견

직지에 대해서 LA에서 문화 칼럼을 통해 우리들에게 많은 상식을 주는 장소현 작가가 지난 2021년 아주 쉽게 주중앙일보에 칼럼으로 소개했다. 당시 코로나-19 기간이었지만 직지 LA 홍보위원회 (회장 이순희)가 ‘직지유네스코 등재 2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한 것을 소개하면서 직지를 설명했다. 전세계를 통해 ‘직지 유네스코 등재 20주년 기념 행사’는 당시 LA한인사회가 유일했다. 세계에 널리 자랑할 만한 한국의 빛나는 문화유산은 참으로 많다. ‘직지’는 직지심체요절 (直指心 體要節) 약칭으로 대표적인 유산으로 꼽힌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고 표현하는 까닭은 현재 남아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 뜻이다.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도 금속활자 인쇄물이 존재했으나, 안타깝게도 오늘날에 전해지지 않는다.

고려시대의 금속활자가 발굴되어, 연구 중이기도 하다. 금속활자의 발명은 지구상에서 지난 천년 동안에 일어난 가장 위대한 사건이며, 인류 문화역사 최대의 발명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책을 대량으로 지속적으로 또 빠르게 찍어낼 수 있게 되어 지식과 정보의 기록과 확산에 획기적 전기를 마련하였고, 인류문화 발달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요새로 말하면 컴퓨터에 맞먹은 큰 영향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발명이다. 그런 획기적 지식 혁명의 선두에 한국이 서있는 것이다. 그러니 당당하게 자랑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제대로 알고 사랑하고 자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최초임은 인정하나, 당시 기술의 한계를 명확히 직시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라는 전문가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글자 그대로 가장 오래되기는 했지만, 인쇄의 기술적인 면이나 사회에 미친 파급력 등에서도 으뜸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운 점이 많다는 설명이다. 반면에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직지에서 배워서 만든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지가 자랑스러운 것은 그 책에 담긴 내용과 그런 책을 발간한 시대정신이 위대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금속활자를 만드는 기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팔만대장경을 새기는 것 같은 고려 사람들의 빼어난 정신세계의 정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이란 활자의 발명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종이나 먹(잉크) 등의 기술이 함께 발달되어야 하고, 지식의 확산을 바라는 사회적 욕구도 있어야 한다. 즉 사회 전체의 수준과 시대정신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점도 바로 이런 정신적 유산이다. 현재 남아 있는 직지는 하권 뿐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약탈품이 아니 기 때문에 반환 운동은 불가능한 상태다. 이같은 ‘직지’는 올해 50주년을 맞이한 LA한인축제에서 처음으로 소개되어 한인은 물론 타인종 들에게도 색다른 감동을 주었다. 지난 10월 12일부터 15일까지 LA서울국제공원에서 개최된 한인축제장에 설치된 ‘직지’ 부스에는 한국의 직지 박물관으로 알려진 청주고인쇄박물관(관장 차영호)에서 라경준 (고인쇄 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문용호(고인쇄박물관 학예사),임인호(국가 무형문화재 금속활자 장), 홍종진(충북 무형문화재 배첩장), 임규헌(국가무형문화재활자-조교) 그리고 이순희 LA직지 위원회 회장 등이 직지와 관련된 시연과 홍보 행사로 많은 관람객들의 뜨거운 인기를 모았다.

‘직지’ LA한인축제장에서 살아나다

지난 14일 토요일 LA한인축제 체험장에 마련된 직지 부스에서 금속활자 주조과정 시연 및 인쇄 체험을 지켜본 많은 관람객들은 활자를 깎아 내는 사범과 이를 한지에 찍히는 활자를 지켜보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 내었다. 특히 현장 시연장에서 우리나라 태극기를 한지에 찍어 관람객들에게 추억의 선물로 제공하자 너도 나도 몰려들어 잠깐 동안에 시연장은 북새통을 이뤘다. 이 자리에 마침 코리안 퍼레이드에 참가했던 한인 보이스카웃 단원들도 직지 시연장에서 한지에 새겨진 태극기를 선물로 받고는 “우리집에 보물로 모시겠다”며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펼처 보였다. 특히 타인종인 라티노 가족들도 태극기를 선물로 받고는 “오늘 우리는 행운을 얻었다”며 가족들이 기뻐했다.

이번 직지 부스에서 직지 홍보 행사를 담당한 이순희 LA직지위원회 회장은 “청주고인쇄박물관 에서 제공한 여러가지 직지 홍보물도 인기리에 모두 나눠주었다”면서 “내년 축제를 위해서 다양한 계획을 준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편 LA한국문화원(원장 정상원)은 지난 13일(금)부터 27일까지 캘리포니아주 ‘직지의 날’(9월 4일)을 기념하여 청주고인쇄박물관(관장 차영호)과 공동으로 “직지, 금빛 미래를 열다”(JIKJI Opens the Golden Future)라는 주제로 LA특별전을 성황리에 개막했다. 지난 13일 개막식에는 김영완 LA 총영사를 포함해 한인사회 이순희 LA직지위원회 회장 등 주요 문화예술계 인사 60여명이 참석했 으며, 전시설명회 후 임윤호 금속 활자장과 홍종진 배첩장 무형문화재 명인들과 임규헌 활자 조교 등이 직접 시연을 보이기도 했다.

전시는 10.27(금)까지 LA한국문화원 2층 아트 갤러리에서 전시 됐다. 이번 전시는 세계 최고수준을 자랑하는 한국 기록문화의 상징 직지의 가치를 미 한인사회와 주류 사회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개최했다고 문화원은 밝혔다. 문화원은 이번 전시를 통해 고려시대 금속활자기술이 조선시대에 계승 발전하여, ‘조선왕조 실록’, ‘훈민정음’ 등 한국의 기록 문화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며, 직지 원본을 최대한 재현한 직지 복본, 금속 활자장이 복원한 활자 인쇄판을 비롯한 인쇄 도구, 금속활자와 관련된 기록유산 등의 자료가 전시했다. 특히 세종대왕이 금속활자기술 개발에 노력하여 마침내 한글 금속활자를 주조하였고, 한글 금속 활자로 세종 본인이 직접 노래한 ‘월인천강지곡’을 인쇄한 이야기도 담았다. 정상원 문화원장은 “이번 전시가 650여년 전 제작된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가 가져온 기록 매체의 진화와 근대 인문사회의 혁명적 변화를 살펴보고, 오늘날에도 지속되는 직지의 가치와 중요성을 느껴 보는 소중한 기회가 되길 바랬다”고 말했다.

@SundayJournalUSA (www.sundayjournalusa.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뉴스를 공유하기

선데이-핫이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