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잊지 말자] 이런 치욕의 수모를 겪고도 아직도 日에 목매는 후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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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명 꿈꾸던 고종은 1919년 1월 의문의 급서
◼ 윤치호 일기 ‘고종은 일본의 의해 독살이었다’
◼ 1905년 을사능약으로 대한제국은 ‘망국의 길’
◼ 1912년까지 약 51명이 ‘순절한 것으로 추정’

올해 8월 29일은 ‘국치일’ (國恥日)로 치욕의 역사인 일제강압 36년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이 망하는 소위 “한일병합 조약”(한일병탄)은 실제로는 1910년 8월 22일(월) 조약이 체결되었으나, 일본 측에서 1주일 동안 발표를 안 하고 있다가 8월 29일에야 순종 황제의 조칙 형태로 발표했다. 그러나 8월 29일 발표된 조칙에는 칙명지보(勅命之寶)라는 행정 결재에만 사용하던 옥새가 찍혀 있었을 뿐 조선의 국새가 찍혀 있지 않았고 황제의 서명조차 없었다. 이는 한일병합조약이 조선의 정식 조약이 될 수 없으며 따라서 ‘조약은 원천 무효’ 라는 주장의 강력한 근거다.

굴욕과 치욕의 역사 ‘경술국치’

경술년(1910년) 8월 22일에 일본의 조선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조선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사이에 조인된 이 조약이 1주일이 경과된 이날 공표됨에 따라 황제의 조칙이 발표되어 8월 29일 조선은 일본에 완전히 병합되어 일본의 일부가 되었고 국어는 일본어가 되었으며 조선의 백성들은 일본의 2등 국민이자 일본인의 노예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1392년에 고려를 무너트리고 태조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5백여 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조선의 마지막 충신이었던 학부대신 이용직은 “이 같은 망국안에는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고 반대하면서 뛰쳐 나갔다. 반면 이때 일제에 협조한 매국노는 “경술국적”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미 마지막 통감이자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가 계획서를 가지고 입국했는데 이토 히로부미 생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경술국치로 인하여 일본에 병합된 것이 사실이지만 이 조약 하나만으로 조선이 일본에 병합된 것은 아니다. 이전의 주변국들 간의 전쟁, 여러 차례의 조약과 이권 침탈로 인해 이미 사실상 일제의 종속국이 된 상태에서 경술국치는 이전의 조약들 과는 달리 서류상 명의 이전의 성격이 강하다. 당시 일제는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7년 정미 7조약을 통해 입법권과 인사권, 행정권을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까지 장악해 이미 중앙통치권력을 무력화한 상태였으며, 이후 같은 해 보안법을 통해 각종 집회와 모임을 제재하여 조선인들의 회합을 차단하고 신문 지법을 통해 통감부의 방향에 반하는 언론을 원천 차단했다.

이 때문에 한일병합조약 당일에는 이미 일련의 피탈 과정에 따른 만연한 무력감과 국내 저항세력 부재로 인해 1905년 을사조약 당시보다 저항이 적었으며, 상대적으로 조용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이는 이미 을사조약, 군대 해산, 고종 퇴위 등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위같은 측면에도 불구하고 자결/순국자는 경술국치 당시에 가장 많았다. 대표적으로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시아공사로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매 자결하였으며『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위 관료를 역임한 장태수, 이재윤, 송도순, 정동식, 김석진, 이만도 등도 이때 순국하였으며, 1912년까지 약 51명이 순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일부는 일찍이 행적이 증명되어 1960년 대에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바 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명심할 것은 당시 황실의 전권위임을 받은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고종의 친형 흥친왕 이재면이 직접 조약에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완용과 흥친왕은 제대로 된 전권 위임을 받은바 없기에 이 사항은 이 조약의 합법성의 증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며 애초에 조선에는 이런 중요한 사항을 전권 위임하는 규정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설령 전권 위임을 받았어도 그런 전권 위임은 원천 무효이다.

자결/순국자 경술국치 당시 가장 많아

당시 동아시아 정세를 주시하던 열강들, 특히 영국과 미국이 이 병합조약을 지지하고 말고는 한일병합조약이 당대 현실에서 실제로 기능하고 말고의 문제지, 당대 국제법상에서 불법이 되는 요건과는 전혀 무관함 또한 명심할 사항이다. 이게 근거라고 생각하는 건 일각의 순전히 자의적인 납득 요건에 불과하지 상식적으로 논할 수 있는 주장이 아니다. 한일 병합 조약은 한국이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사건일 뿐 사실상 일본령 으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 작업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일제는 영일동맹,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의 외교적 작업을 진행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함에 따라 일제의 한반도 장악에 방해가 되는 국제 열강 세력들을 제거하면서 1904년 한일의정서를 시작으로, 1905년에 을사 조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어 1907년(광무 11)에는 정미 7조약으로 행정권과 입법권 박탈 및 군대 해산, 1909년에는 기유 각서로 사법권을 박탈했고 이듬해 1908년 6월에는 한일약정각서로 경찰권까지 박탈하였다. 경술국치 즈음의 조선은 명목상으로만 독립국이었고 주권을 박탈하는 서류상의 절차가 진행되지 않았을 뿐이지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던 상태였던 셈이다. 이에 일부 해외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의 시작점을 아예 을사조약이 맺어진 1905년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난 후에는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와 국가인 애국가도 금지되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대한제국의 수도였던 한성부가 경기도 경성부로 격하되면서 경기도 관할 지역 으로 편입되었고 일본의 일개 지방 도시로 격하되었다.

3‧1 운동 이후 태극기 애국가 금지

한편 대한제국 황실은 황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황제도 이왕(李王)이라는 봉호로 강등되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과 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당한 순종은 조선의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 물론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는 대접해 주었다. 일제는 경성 부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 주었다.

또 구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 만 해도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영친왕도 일본에서 일본 귀족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1919년에는 구 황실 지급 세비를 180만 엔으로 증액시켰다. 한편 합병 전후 고종과 의친왕은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고종은 정신적으로나 재정 적으로 초기 독립운동의 지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1895년의 을미의병, 1905년의 을사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한 최익현·이인영·민종식·신돌석·정환직·허위 등은 대부분 고종의 밀지를 받거나 재정적 후원을 받으며 의병 활동을 벌였다. 이는 국권 상실 이후의 독립운동으로도 이어져, 1920년대까지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치고 직간접적으로 황제와 맥이 닿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고종은 황제직속 비밀정보기관인 제국익문사를 창설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제국익문사는 친일파 감시, 안중근 구명 시도, 독립군에게 자금 전달, 정세 보고등을 하였다. 고종은 1919년 파리회의에 의친왕을 특사로 보내려 하지만 일제의 독살로 실패하였다. 고종은 합병 전부터 후까지 여러 번 망명을 시도하였다. 1915년 7월 26일 성낙형 등은 내관 염덕인을 통해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에게 중·독·영·러가 연합해 일본을 공격할 것이 대세라는 등의 보고서를 올리게 했다. 이 보고서를 보고 만족한 고종은 성낙형에게 ‘한중의방조약안’을 가지고 직접 알현하라면서 승낙의 징표로 과거 정조가 사용했던 ‘온여기옥(溫如其玉)’이란 인영 (印影· 도장)을 찍어 주었다. 그러나 고종 면담 직전 성낙형을 비롯해 김사준·김사홍·김승현 등 다수의 관련자가 검거됨으로써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것이 보안법 위반 사건이다. 이때 고종의 아들이였던 의친왕도 적극 협력했었다.

고종의 해외 망명이 다시 추진된 해는 1918년이었다. 그리고 이 망명은 고종의 생전 마지막 망명 시도가 되었다. 이번에는 우당 이회영이 중심 인물이었다. 이회영의 장남 규학의 아내 조계진이 고종의 생질(외조카)로서 고종과 사돈인 데다 이상설과 헤이그 특사사건을 기획했던 경험을 갖고 있어 고종 망명 계획에 나서게 했다. 이회영과 민영달은 육로 대신 수로를 이용하기로 하고 상해와 북경을 저울질하다가 우선 북경에 행궁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민영달이 행궁 구입 자금으로 5만원을 내놓자 이회영은 1918년 말께 이득년·홍증식에게 건네 북경의 동생 이시영에게 전달하게 했다. 계획은 순조로웠다. 이제 고종이 덕수궁을 나서 일본의 감시를 피해 신하들과 합류하면 됐지만 이때 고종이 1919년 1월, 갑자기 급서하면서 실패한다.

윤치호 ‘고종황제 비참하게 독살’

고종의 사인이 독살이었음을 윤치호 일기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진창씨는 광무태황제가 틀림없이 독살되었다고 믿고 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완벽하게 건강하던 광무태황제가 식혜를 마신지 30분 안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사망했다.
2. 하루 이틀 사이에 광무태황제의 팔다리가 엄청나게 부어 올라서 바지를 벗기기 위해 통 넓은 한복 바지를 찢어야만 했다.
3. 민영달과 몇몇 사람들이 약용 솜으로 광무태황제의 입안을 닦아낼 때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있고, 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4. 목에서부터 복부까지 30센티미터 가량 검은 줄이 길게 나 있었다.
5.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직후 궁녀 2명이 의문사 했다. 민영휘 나세환 강석호 등과 함께 염을 한 민영달 씨가 한진창 씨에게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자)

일제가 편찬한《순종실록 부록에 덕수궁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세상을 떠나기 바로 전날인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에 있는 황태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실기는 ‘(고종이) 밤중에 식혜를 드신 후 반 시각이 지나 갑자기 복통이 일어나 괴로워하시다가 반 시간 만에 붕어하셨다’고 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망명시도는 아예 헛되지는 않아서 훗날 연해주는 항일의병들의 주 거점이 되었으며 많은 의병단체들이 연해주에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게 된다. 1917년 함흥부 순행은 눈여겨 볼 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순행하는 순종도 황제 복식을 갖추었다.

게다가 함흥 주민들도 순종의 함흥 방문이 조선 왕조 임금으로서는 태조 이성계 사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거의 환영 일색이었다. 그와 별개로 500년간 조선 왕조의 백성으로 살아 온 이상 고종 생전에는 엄연히 복벽이 우세했다. 문제는 순종. 제대로 왕 노릇 해본 적도 없고 독차사건 후유증으로 건강이 심하게 쇠약해져 독립 해도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그가 고종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당시 한민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벌어진 3‧1 운동부터 공화정을 지향하게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에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이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대하자는 것이다.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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