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제4의 헤이그 밀사였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한국이“은둔의 나라”로 고종황제의 대한제국이란 명칭으로 존재하던 시절, 23세의 미국 명문 가의 청년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는 감리교 선교사로 1886년 최초의 신학문 영어 교사로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그후 63년 동안 그는 선교사, 교육자, 언론인, 역사 학자로 활동 하면서 오로지 삶의 목표는‘대한민국의 독립과 통일’이었다. 그는“한국인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라며 살았던 미국인이었다. 그는‘아리랑’악보를 최초로 기록한 장본인이고, 한글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글임을 알고 최초로 한글 교과서를 제작한 주인공이며, 일찍이‘직지’ 가 세계 최초 금속활자라는 사실을 미국사회에 알린 사람이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 판인 ‘텬로력뎡’(천로역정)을 출판한 주인공이다. 사민필지(士民必知)라는 한국 최초의 세계 지리 교과서도 만들었다. 더욱이 그는 고종황제의“제4의 헤이그 밀사” 였다. 그는‘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라고 알려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재미한인들이나 한국인들은 그의 이름은 얼핏 들었어도, 진정 그가 어떻게 한국과 한국인들을 자신의 삶의 목표를 두고 살았던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헐버트 박사, 그는 진정 우리가 기억해야 할“푸른눈의 한국인” 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의 김동진 회장은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와 국민이 해야 할 사명을 대신하여 호머 헐버트 박사와 그의 가족들에게 조금이나마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일찍이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헐버트 박사의 삶을 소개하고, 후세들을 교육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지난 2010년 을사늑약 100주년에 ‘월간조선’을 통해 헐버트 박사를 소개하는 글을 기고 했다. 헐버트 박사의 ‘한국 사랑’에 대하여 여러 언론 보도와 연구논문들이 소개되고 있지만 김 회장의 글이 가장 헐버트 박사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김 회장은 헐버트 박사를 가리켜 “고종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외국인으로서 고종 황제의 특사를 세 번이나 맡았다. 1905년 을사늑약 직후 자결한 애국자의 대명사인 민영환과는 참된 지성의 교감을 나눴다. 서재필, 이승만과는 독립운동을 같이한 동지였다. 이상설, 이준과는 함께 헤이그 특사였다. 또한 일본과 이토 히로부미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였다”고 말했다.
이어 김 회장은 “하지만 고종 황제와 이승만 대통령, 그리고 구한말 선각자들이 그토록 감사를 보냈던 한민족의 은인이 역사의 뒤편으로 밀려나 버렸다. 김 회장은 그의 이름이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조바심에 헐버트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고자 수십 년을 동분서주했다. 헐버트와 한민족의 인연은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인연은 참으로 질기고도 장미꽃처럼 아름다웠다”고 기록했다. 헐버트는 안중근 의사가 존경한 인물이기도 하다. 안중근은 일본경찰에게 조사를 받던 1909년 12월 2일에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남겼다. 헐버트는 외국인이 한국을 위해 활동하려면 우선 한국말과 글(한글)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인지했다. 그의 한글에 대한 학구열은 대단했다. 그는 자비로 한글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3년 만에 한글로 책을 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게 되어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1891)’를 완성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회고록에는 “배우기 시작한지 4일만에 한글을 읽고 썼으며, 1주일만에 조선인들 이 위대한 문자인 한글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적혀 있다. 그는 조선인들끼리 말하는 것을 유심히 익혀 말을 배우기도 했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헐벗 또는 흘법(訖法), 허흘법(許訖法), 할보(轄甫), 허할보(許轄甫)였으며, 한글을 깨친 후,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에 매료돼 미국 언론과 영문 잡지에 기고와 논문을 통해 한글과 한국문화를 홍보했고, 한글에 띄어쓰기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여 오늘날 띄어쓰기가 본격적으로 한글에 도입되도록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헐버트는 1863년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미들베리 칼리지의 총장을 지낸 목사였고 어머니는 다트머스 대학교 창립자의 증손녀였다. 다트머스 대학교를 졸업 하고 유니언 신학대를 수료한 뒤 1886년 길모어(George W. Gilmore) 부부, 벙커(Dalzell A. Bunker) 부부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에 영어 교사를 파견해 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응해 국내에 들어 왔다.
4일만에 한글을 읽고 쓰기도
그러나 그는 점차 한국의 생도들이 학업에 열정을 보이지 않자 이에 실망하였고 1891년 12월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다가 일시 귀국한 헨리 아펜젤러 목사의 권유로 1893년 10월 14일,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았으며,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배재학당에서 서재필, 이승만, 주시경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한성부(서울)에 오기 전 미국의 한 출판사에서 출판에 대한 교육을 받고 왔으며 신시내티에서 신식 인쇄기를 들여왔다. 삼문출판사는 그가 부임한 지 1년이 안되어 전도지와 종교 서적 1백만 여 면을 인쇄하여 경영을 자급자족할 수준에 이르렀다. 1895년 2년간 휴간했던 영문 월간지 ‘한국소식’(Korea Review)을 다시 발행하였고, 최초의 영문 소설 한국어 번역판인 ‘텬로력뎡’(천로 역정)을 출판 하였다. 그해 8월에는 한글 로마자 표기법을 고안하였다. 1896년 4월 헐버트는 서재필, 주시경 등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독립신문’은 헐버트가 책임자로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인쇄하였다. 또한 배재학당에서 가르쳤던 제자 주시경과 함께 한글을 연구하며 띄어쓰기, 마침표, 쉼표를 도입했으며 국문연구소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여러차례 건의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외국 서적의 한글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는데 1896년, 구전으로만 전하는 형편이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도 그였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그는 언더우드 그리고 에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헐버트는 특히 1895년 11월 27일 춘생문사건(1895년 을미사변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던 고종이 친미파의 도움을 받아 주한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 당일 권총을 가슴 속에 품고 고종을 보호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불침번
1897년 5월 조선정부와 고용계약을 맺고 학생수 50명이 되는 한성사범학교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관립영어학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다. 1900년부터 1905년까지 현 경기고등학교의 전신 관립중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으며 일본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다양한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1901년부터 영문 월간지 ‘Korea Review’를 발행하였다. 헐버트 부인도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 쳤으며 외국인 자녀들을 자신의 집에서 가르쳤다.
한편 그는 한글 발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주시경 선생과 함께 한글 표기에 띄어 쓰기와 쉼표, 마침표 같은 점찍기를 도입하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 연구소를 만들도록 했다. 이 공을 인정받아 2014년 10월 9일 한글날에 금관 문화 훈장을 받게 되어 그의 증손자가 행사에 참석해서 훈장을 대신 수여 받았다. 한글 학회에서는 주시경을 위시한 여러 근대 국문 학자들 가운데 유일한 외국인으로 존경받고 있다. 헐버트는 현 동대문교회인 볼드윈 교회를 맡아 담임목회를 하였다. 이때 외국 서적의 번역 작업과 외국에 대한 한국 홍보 활동을 벌여 많은 서적과 기사를 번역, 저술했다. 한국의 역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1903년에 윤기진이 쓴 조선역사서 ‘대동기년(大東紀年)’의 출판을 도왔고, 1908 년에는 관립중학교의 제자 오성근과 함께 ‘대한역사’라는 순 한글 역사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일본의 한국침략 저지 건의
이 책은 상,하권으로 기획되었으나 하권은 출간하지 못하고 상권만을 발행하였다. 이마저도 1909 년 일제의 검열에 의하여 금서조치되어 일본 경찰에 의하여 출판사에 있던 책이 모두 몰수되어 불태 워졌다. 1906년, 고종은 헐버트를 ‘특별 위원’에 임명하여 외교 업무에 전권을 부여하고, 조선과 수교한 나라들 중 미국을 비롯한 9개국의 국가 원수에게 1906년 6월 22일자로 된 을사늑약 무효를 선언 하는 친서를 전달하게 했다. 그러나 헤이그 특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1907년 7월 20일자로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 당하여 헐버트의 밀사 임무는 중단되고 만다.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미국으로 강제 출국 당했으나, 이후에도 독립 활동에 힘을 보태는 등 한국을 잊지 않았다. 그는 1918년에는 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열릴 파리 강화 회의를 앞두고 여운형과 함께 ‘독립 청원서’를 작성하였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는 글을 서재 필과 함께 올리기도 했으며, 1942년에는 이승만의 한미협회에도 참여했다. 헐버트는 특히 3·1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한국을 어찌할 것입니까?>(What about Korea?)라는 제목의 진술서를 미국 상원에 제출하면서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그는 또 1942년 워싱턴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에서 고종 황제에 대해 “휜 적은 있으나 결코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다”라고 증언했다. 헐버트는 생을 마감하기 전 두 가지 소원이 있었다. 하나는 한국의 통일을 보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일본이 탈취해 간 고종 황제의 내탕금(조선시대에 임금이 개인적으로 쓰던 돈)을 찾는 일이었다.
헐버트는 1909년 미국 정부에서 보낸 경호원과 함께 서울에 잠깐 들렀을 때 고종 황제로부터 예상치 못한 부탁을 받는다. 고종 황제가 자신의 조카 조남승을 통해 위임장과 예치금 증서 등을 헐버트에게 보내면서 은행에 맡겨놓은 자신의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한 것이다. 상하이에 있는 독일계 은행인 덕화은행(德華銀行)에 예치한 내탕금을 찾아 미국은행에 예치해 두라는 것이다. 고종 황제는 1903년 덕화은행에 독일화(貨) 51만 마르크 상당의 금괴와 상당액의 일본 엔화를 예치했는데, 1908년에 일본이 이 돈을 탈취해 갔다. 물론 독일 측은 예금인출을 방조했다. 이 돈은 당시 대한제국 총세입의 1.5%나 되는 돈이다. 오늘날의 가치는 정확히 산출할 수 없으나 이 돈을 연리 10%로 100년을 계산하면 2010년 현재로 약 2조원(미화 약18억 달러)이 된다. 덕화은행 행장이 직접 써준 1903년 12월 2일자 1차 예치금 영수증에는 “이 예치금은 황제 폐하의 지시에 의해서만 처분될 것”이라고 영수증 말미에 적혀 있다. 헐버트 기념사업회의 김동진 회장은 이러한 사실을 1989년 헐버트 손자의 집에서 헐버트가 남긴 서류들을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 20여 년을 이 문제와 씨름했다. 마침내 고종 황제가 예치 시 덕화 은행장이 써준 예치금 영수증, 통감부 외무총장이 독일 측으로부터 돈을 받고 써준 영수증 등 증거 를 찾아냈다. 김 회장은 이어 내탕금의 예치 과정, 고종 황제가 헐버트에게 내탕금을 찾아오라고 위임하는 경위, 일본이 예치금을 탈취하는 과정, 헐버트의 내탕금을 찾으려는 분투, 광복 후 우리 정부가 이 사실을 헐버트로부터 접하고도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됐다.
헐버트는 40년 동안 이 돈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으며, 그는 생전에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국은 이자까지 합쳐서 꼭 돈을 받아내야 한다고 울분을 토했다. 김 회장은 “이 문제가 흥밋 거리로 보거나 사소한 문제로 치부해서는 아니 되며 민족정기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문제는 새로운 한일 문제로서 헐버트가 소원한 대로 이자까지 합쳐서 돌려받아야 하며 경술국치 백 년 2010년을 맞아 고종 황제와 헐버트의 100년 한을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이 문제에 대해 2010년 당시 김영일 광복회장, 김삼열 (사)독립 유공자 유족회장, YMCA 안창원 회장 등과 협의했으며, 모든 분이 일본이 탈취해 간 내탕금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소송을 해서라도 기필코 받아내야 한다며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 회장은 “우리 젊은이들이 헐버트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면서 ‘정의는 헐버트다’라고 할 만큼 그는 항상 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한 정의의 사도였다고 강조 했다.
정의의 편에 서서 행동한 양심
1949년 7월 29일,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대되었으나 기관지염으로 8월 5일에 한국 땅에서 별세 했다. 당시에 한국으로 가는 배편에 오르면서 AP통신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장례식은 대한민국 최초의 사회장으로 거행되었으며, 합정역 근처의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