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차 한국어 교사 학술대회 미주 한국학교 비젼과 미래상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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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 이후 변화한 교육방식 개발 설정
■ LA공관은 차세대 네트워크 사업 적극 지원
■ 한국교사 세계 품어 한국어 세계를 품어야
■ 교사, 차세대강사, 전현직임원 300여명 참석

 “세계를 품은 한국어 통합교육”이라는 주제로 미국한국학교총연합회(KOSAA 회장 용 승, 이사장 최정인)가 재외동포재단, LA총영사관, LA한국교육원, 종이나라 후원으로 제23차 한국어 교사 학술대회를 2022년 8월 1일~6일까지 Webinar/Zoom 방식과, 라 미라다 홀리데이 인(Holiday Inn) 특별 회의장에서 교사, 차세대, 강사 및 연합회 전현직 임원 등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쳤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는 코로나 19 이후 변화한 교육 방식(온라인, 오프라인)의 장점을 살려 차세대 리더십, 신임 교사 집중 연수, 교사 교육 심포지엄과 교장 및 실무자 워크샵을 진행하여 미주 한국학교의 비젼과 미래상을 집중 조명해 큰 성과를 이룩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미주에서 한국어 교육의 목적은 언어와 역사를 통해 한국인 정체성을 함양시키고, 인재들을 교육 하는데 있어, 과연 어떤 나라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목표를 두고 있다. 지난 6일 KOSAA창립 40주년 기념으로 실시된 학술대회 개회식은 라 미라다(La Mirada) 소재 Holiday Inn 호텔 특별 회의장에서 개최됐다. 용 승 KOSAA 회장은 양근영 재무의 사회로 진행된 개회식에서 인사말을 통해 “우리는 코로나 재난을 통해서 이를 극복할 변화의 개혁을 선도하고 있으며 미래 비젼에 도전할 것”이라고 천명했으며, 최정인 이사장은 환영사를 통해 “40주년 기념학술대회를 위해 힘써 준 국내외 기관 단체장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특히 일선 교사들의 열성적인 참여 의식을 높이 평가 한다”고 말했다.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의 정신”

이날 김성곤 재외동포재단 이사장은 영상 축하 메시지를 통해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은 홍익인간의 정신을 한민족 정체성의 중심철학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1982년 미주한국학교총연합회가 창립 이래 40년을 이어 오면서 재미동포사회에서 뿌리교육에 앞장 서 왔음을 축하한다”고 치하했다. 김영완 LA총영사는 “미주한국학교총연합회가 한글 교육을 통한 정체성을 노력을 경주함에 높이 평가 하며, 미주류사회에서도 제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면서 “ 본 공관은 차세대 네트워크 사업 등을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라고 축하 영상 메시지를 통해 밝혔다.

이 자리에 참석한 서니 박 부에나팍 시장은 축사를 통해 자신의 과거 한국학교 교사 경험을 소개하면서 한국인의 정체성과 한국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미국사회의 다양성을 조화 시키며 한국어 교육을 발전시켜 주기를 당부했다. 이승우LA평통 회장은 축사를 통해 자신의 한국학교 교사 경험을 공유하면서 “이제 한글은 한국인에게만 국한시키지 말고 전세계로 펄처져 세계를 품어야 한다”면서 “한국어교사들이 세계를 품어 한국어가 세계를 품기를 기대한다”고 당부했다. 이날 개회식에 40년전 총연합회를 창설한 노재민 초대 회장이 참석해 많은 참석자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창립 40주년 기념 감사패를 받았다.

심도있고 열정적인 학술대회

이날 개회식 행사에서 기조 강연으로 주진오 교수는 <100년전의 재미한인 청소년들>이란 주제로 미주한인 이민사에 큰 족적을 남긴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를 중심한 초창기 이민 청소년 리더들의 공헌도를 소개하였으며, <K종이접기 세계화로 새 한류 창조>를 주제로 노영혜 이사장 (종이 문화 재단·세계 종이접기연합)이 기조 강연을 했으며 정규일 대외협력이사, 곽정훈 대한민국 종이 접기 명인과 종이문화재단 세계 종이접기연합 LA 연합 소속 임원들(조영옥 세계 종이접기 연합 이사, 조민정 LA 연합회장, 엔지 문 LA종이문화교육원장, 서부연 종이접기 지도 사범 마스터) 이 맞춤형 교사 연수에서 K어린이 종이접기 급수 3급, 2급, 1급 지도에 대한 집중 강의에 참여해 인기를 모았다.이 행사는 종이나라(회장 정도헌)에서 K종이접기 교육 교재 일체를 후원했다.

이번 2022년 제 23차 한국어교사 학술대회는 총연합회 이혜진 부회장의 총괄 운영으로 6일간의 일정을 효율적으로 집행하여 주목을 받았다. 학술대회는 KOSAA의 가장 핵심적인 사업활동이다. 한편 KOSAA창립 40주년 기념으로 실시된 이번 학술대회에는 1일부터 6일에 걸처 각 분야의 전문가 13명 (정문성 교수, 전영은 교수, 노영혜 종이문화재단 이사장,노규식 박사, 진정란 교수, 홍윤기 교수, 김택수 강사, 강용철 교사, 주진오 교수, 임정은강사, 김효정 교수, 이승만 강사,전후석 감독) 강사들이 코로나 이후의 학교수업을 포함한 다양한 교육 개발 프로그램들을 효율적으로 개발하는 과제에 대하여 심도있는 연구 결과를 제공하였다. 진정란 교수는 ‘비대면 수업에서의 효율적인 한국어 교수학습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로 비대면 수업의 다양한 방식들과 비대면 수업을 활성화하는 교수법 등을 제공하였다. 홍윤기 교수는 ‘한국어 교사가 꼭 알아야 할 한국어 문법’을 해설하였고, 강용철 교사는 ‘웃음과 감동이 있는 한국어 수업’이란 주제로 디지털 미디어 활용법 등을 포함, 한국어능력을 키우는 다양한 수업들을 소개하였다.

김택수 교수는 “놀이로 아이들이 주인공이 되는 마술 같은 시간”을 만드는 교실에서의 교사 교육을 제공하였다. 또한 아이들을 융합형 인재로 성장시키기 위한 페들렛 응용의 다양한 한국어 및 역사수업 등을 소개하였다. 한편 모델수업으로 재외동포를 위한 한국어 3, 4(김보영 교사), 한국어 5, 6(채은경 교사) 발표가 있었으며, 노규식 박사는 교사 토크 콘서트로 “문해력의 차이가 아이의 인생을 바꾼다”라는 주제를 인도했다. 정문성 교수는 “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를 위하여 신임 교사들을 위한 좋은 수업을 위한 다양한 방법들을 소개하였으며, 전영은 교수는 학령전기 아동과 청소년기의 인지 발달과 언어발달 등과 한국 이해를 위한 모의수업 등을 소개하였다. 특히 올해가 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아 미국 땅에서의 독립운동 역사를 조명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임정은 강사(독립기념관 교류협력부장)가 한국의 독립운동과 미국과의 관계를 조명하면서 교사들을 위한 역사수업 자료들을 소개하였다.

한국학교의 교육비젼과 목표 설정

학술대회 교장 및 실무자 연수에서 정신교양으로 김효정 교수의 ‘한국전통사상의 올바른 이해와 사회철학으로서의 유학’을 강의를 했으며, 이승만 교사는 ‘정체성 교육의 동반자로서 미국 한국 학교총연합회의 역할’에 대하여 발표를 했으며, 참가자들은 모범학교인 남가주새누리 한국학교와 베델 한국학교의 교육비젼과 목표를 포함해 학교반 구성, 온라인 수업과 대면 수업 방법 등을 공부 하였다. 특히 이번 학술대회에서 차세대를 위한 한국역사, 문화 리더십 세미나에서는 김아영 UN본부정치 담당관은 글로벌 리더십에 대해서, 조셉 전 다큐 감독은 디아스포라의 리더십, 이창엽 글렌데일 시 커미셔너는 커뮤니티 참여방법 등에 대하여 각각 발표를 하였다.

[미주한국학교총연합회(KOSAA)는 4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위해 기념 학술 책자(인쇄,출판: 엑셀 프린팅USA)를 발간했다. 이 학술 책자는 이혜진 부회장이 편집을 담당했는데, 한국학교교사 교육 심포지엄, 신임교사 집중 연수, 차세대 리더십 세미나, 한국학교 교장 및 실무자 워크샵을 위한 15 명의 전문가들의 논문 주제 발표 등이 수록되어 교사 및 관계자들의 교육 지침서로 활용되고 있다. 이 학술지는 코로나 이후 KOSAA의 핵심적 교육 프로그램을 수록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100년전 찹수이 도매상차려…

미주한인 독립운동에 헌신

정안회사 1925년 당시 연간 매출액 약 $65,000(현재 약1,400만 달러)

KOSAA창립 40주년 기념으로 실시된 이번 학술대회 개회식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주진오 교수(전 역사박물관장, 상명대 교수)는“100년전 재미한인 청소년들-한인소년병학교를 중심으로”란 주제 강연에서 100년전 초기 미주 이민사회에서 한인청소년들의 구국운동과 사회 생활에서의 활약상을 소개하면서 상거래에서 중국 상인들을 빰치는 상술을 소개하여 화제를 모았다.

오늘날 “투-고”(To-go)나 “딜리버리”는 아주 흔한 상술이지만, 100여년전에 이를 처음 실시했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 이전이다. 그것도 우리 선조들이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찹수이’(Chop Suey, 잡채)는 중국 음식이지만,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다. 미국에 오래전에 이민 한 중국 화교들이 미국땅에서 만들어 먹고 파는 음식이다. 중국에는 없는 음식이다. 화교들이 ‘찹수이’를 “중국 음식”으로 미국인들에게 알리는데는 성공했으나, 미국 대중들이 ‘찹수이’를 맛 볼 수 있도록 싸고 간편한 음식으로 배달한 것은 바로 100여년전 이 땅에 정착한 우리 선조들이다. 바로 오늘날의 패스트 푸드(Fast Food)의 대명사인 ‘햄버거’ 인 셈이다. 미국인들 입맛에 맞도록 튀긴 국수와 각종 야채, 고기를 한데 볶아 섞어서 만든 것이 ‘찹수이’이다.

1920년대 자동차의 도시 디트로이트의 포드(Ford)회사 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전화로 주문 받아 ‘찹수이’를 공장 현장에까지 배달해 주어 큰 인기를 모았으며, 당연히 돈도 크게 벌었다. 이 같은 주문을 받아 배달해주는 것은 비단 자동차 공장 뿐 아니라, 학교, 백화점, 식당 등으로 확장 시켰다. 이 같은 새로운 개념의 도매업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상술이었다. 이 새로운 개념의 상술은 기존 화교들이 온갖 솜씨를 보였던 전통적 상술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이 같은 주문형 배달업 회사인 ‘정안 회사’를 차린 주인공들은 바로 미주한인 독립운동사에 유명한 박용만이 세운 ‘한인소년병학교’ 출신들인 정양필, 안재창, 조오흥 등이다.

이들은 1909년 6월 박용만이 미국내 최초의 한인군사 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하자, 이에 입교하여 야구팀 및 육상팀 군사훈련부 등에서 활동하며 장차 독립전쟁 발발시 항일투쟁에 필요한 사관 생도로서 전투 훈련 수업을 받았다. 이들 3인은 원래 소년병 학교 출신인 유일한이 세운 ‘라 초이’ 회사에 있다가, 따로 나와 1921년에 합자회사를 차렸고, 중국음식 도매상인 ‘정안회사’를 디트로이트에 설립해 1925년에 주식회사로 발전시켰다. 당시 연 매출 6만3,000 달러(현재 가치 약 1400만 달러)까지 올려 당시로서는 미국 내 한인 이민이 세운 사업체 중에 서는 가장 규모가 큰 회사였다.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다. “찹수이” 배달로 천만장자 회사가 된 것이다.

포드 자동차 공장에 “찹수이” 납품

정양필(사진)은 7살 때인 1905년 박용만을 보호자로 미국에 도착했다. 정양필의 아버지 정순만은 박용만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그 당시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을 “삼만”이라고 불렀다.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서로 가까웠다. 정양필은 갖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1918년 네브라스카대학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9년에는 디트로이트에서 <서울식당>이라는 양찬관을 열었다. 1921년에는 다시 라초이 회사에서 일했다. 그리고 조오흥을 불러 드렸고, 숙주나물 재배와 곡물과 야채 저장을 관할 할 적임자로는 안재창을 추천했다. 훗날 세 사람 동업으로 ‘정안회사’를 설립하게 된 만남이었다. 원래 정양필은 한인소년병학교 졸업 후 1913년 네브라스카주립대학에 입학, 농학특업사 학위를 취득했다. 1919년 4월 13일 대표들이 서울에서 비밀회의를 갖고 국민대표 25명과 함께 한성 임시 정부 위원을 발표할 때 평정관으로 선임되었다.

1942년 12월 북미 대한인국민회 디트로이트 지방 총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42년 1월부터 6월까지 수차에 걸쳐 군자금을 제공하는 등 일생을 조국의 국권회복 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한편 안재창은 1903년 1월13일 30세 나이에 첫 이민선을 타고 102명의 노동이민자와 함께 하와이에 도착했다. 중국 음식인 찹수이로 큰 돈을 번 입지전적인 사업가였고, 돈을 버는대로 이승만 박사의 재정 후원을 했다. 안재창은 지역사회 지도자였다. 카리스마가 있는 개화기 독립 협회 소장파인 박용만을 지도자로 섬기고 성원했다. 하와이로 온 후에는 이승만을 후원했다. 안재창은 1907년 3월 샌프란시스코로 윤병구와 함께 이주했다.

1907년 6월 솔트 레이크로 이사를 가서 3년간 있으면서 첫 1년반은 노동을, 그리고 정원사로 일하면서 저녁에는 성인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다. 1910년 12월 네브라스카주 링컨으로 이주하여 박용만, 최경오와 투자하여 농장을 경영했다. 그리고 박용만의 한인소년병학교를 지원했다. 그리고 1916년에는 네브라스카 주 한인거류민회 회장이 되었다. 그는 남궁염의 권유로 워싱턴DC에 있는 구미위원부에서 대한 민국 시민이라는 신분증을 발급받았다. 그리고 이승만을 지지하는 동지회에 가입했다. 디트로이트에서 1942년에는 대한인국민회 지부를 세우기도 했다. 1963년 11월20일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미주 역사연구가 안형주는 종증조부인 안재창의 삶을 추적한 <1902년, 조선인 하와이 이민선을 타다> 라는 책을 2013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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