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신년특집 8] 한인 최초 미 연방상원 도전 ‘앤디 김’ 하원의원의 위대한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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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자 후예로서 ‘아메리칸 드림’ 미국사회에 심겠다
◼ 국무부 시절 한국 계란 사실로 빠아픈 인종차별 경험
◼ 민주당소속 한국계로 최초 연방하원 3선경력 정치인
◼ 2024년선거 상원의원 당선시 또 하나의 정치력 신장

미국 역사상 연방상원에 도전하는 한국인이 최초로 나왔다. 바로 한인 민주당 출신으로 최초의 연방하원 3선 의원인 앤디 김(Andrew Kim, 41세)의원이다. 그는 지난해 9월, 현직 밥 메넨데즈 상원 외교위원장(민주당, 뉴저지)이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기 시작하자, 연방 상원의원 선거 경선 출마를 선언해 워싱턴DC정계를 놀라게 했다. 다른 의원들 같으면 소속 정당의 거물 정치인의 눈치를 살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앤디 김 의원은 ‘우리당의 중진이라고 해서 눈감아 주면 안된다’라고 선언했다. 그에게 의미있는 일화가 있다. 바이든 대통령과 선거전에서 패배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 표가 도둑 맞았다.”며 지지자들을 부추겨 2021년 1월 7일 밤 폭도로 변한 지지자들이 의사당으로 몰려가 미국 역사상 전대미문의 폭거를 벌였다. 폭도들이 휩쓸고 지나가 난장판이 된 연방 의사당을 한 젊은 의원이 묵묵히 청소하는 장면이 당시 AP통신이 공개해 훈훈한 화제가 되었다. AP통신은 다른 의원의 말을 인용해, “그는 분명히 누구에게 보이려고 그러는게 아니었다”라며 “긴밤 속에 가장 가슴이 저미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 젊은 의원이 바로 앤디 김 의원이었
다. 트럼프지지 폭도들이 할퀸 의사당을 김 의원은 묵묵히 깨끗하게 청소했던 것이다. <성진 취재부 기자>

코로나 시절인 2021년 국회의사당 점거 폭동 이후 의사당에 남은 쓰레기들을 치우는 것을 도왔던 앤디 김 의원은 당시 입었던 정장을 스미소니언 박물관 측의 요청에 기부했다고 한다. 현재 앤디 김(Andrew Kim, 1982년 7월 12일생. 41세)의원은 중국계 부인과의 사이에 두 자녀를 두고 있다. 부모님 두분 다 이민 1세대이다. 아버지 김정한, 어머니 장재순은 둘 다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으로 특히 아버지 김정한 박사는 고아 출신으로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MIT와 하버드 대학교를 거쳐 미국에서 유전공학 박사가 된 입지전적 인물이다. 누나 모니카 김은 예일 대학교를 졸업 후 뉴욕 대학교에서 역사학과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그는 왜 정치에 나섰는가?

김 의원은 명문 시카고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후 ‘트루먼 장학생̓으로 발탁되었고 또한, 영국의 특별 장학생인 ‘로즈 장학생̓으로 선발돼 옥스퍼드대에서 국제관계학 석사와 박사를 받았고, 2009년 9월부터 미 국무부에서 이라크 전문가로 첫 근무를 시작했다. 2011년에는 미 중앙정보 국(CIA) 국장의 전략참모로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아프간에서 주둔해 근무했고,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3년부터 2015년 초까지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중동 담당 보좌관을 역임했다. 이어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사령관의 전략 참모로도 일했다.

특히 2013년에는 수니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 전문가로서 오바마 행정부의 IS에 대한 폭격과 인도주의 지원을 담당하는 팀의 일원으로 활약하기도 하며 미 국방 최전선에서 전략 전문가로 폭넓고 큰 활동을 했다. 이같은 그의 경력은 누가 보아도 미국 정부나 사회가 알아주는 엘리트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뼈아픈 인종 차별의 기억이 있다. 그의 부친도 미국에서 최고의 학부인 하버드와 MIT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2세 아들에게 엑센트없는 영어를 잘 하기를 원했다. 차별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미국 백인들보다도 유능하고 30대에 박사학위의 군사 전문가로 성장했지만 아버지가 그토록 걱정했던 차별을 일반사회도 아닌 미국 행정부 국무부 안에서 당했다.

앤디 김 의원은 최근 한인후원자들에게 보낸 글에서 자신이 어떻게 인종 차별을 당했는가를 고백하면서 자신의 정체성과 미국의 인식을 깨기위해 정치에 나선 동기를 솔직하게 털어 놓았다. (별첨 앤디 김 의원 글 참조) “나는 가족을 위해, 이웃을 위해, 나를 키워준 사회 공동체와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게 해 준 미국을 위해 싸우기 위해 정치의 길로 나섰다”고 천명했다. 뉴저지주 말튼에서 자란 김 의원은 델라웨어 강부터 대서양 해변까지에 이르는 넓은 지역인 뉴저지의 제3 선거구에 민주당 소속으로 36세 때 2018년 선거에 연방하원에 처음 도전했다.

새삼스런 인종차별에 정체성 깨달아

백인이 85% 정도로 절대 대다수인 지역에서 그는 그 지역이 자신의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뜨내기 후보로 표현하는 광고를 내보내는 상대편 현직 하원의원이었던 강력한 경쟁자를 상대해야 했다. 상대측은 얼음 위에 놓인 생선 사진에 그의 이름을 ‘찹수이̓ 폰트(중국계 식당 등에서 사용하는 글씨체)로 써서 얹은 메일을 지역 주민들에게 보내기도 했다. 명백한 인종차별이었다. 특히 경쟁후보는 당시 트럼프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던 보험회사 이사 출신인 백만장자 톰 맥아더 의원이었던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였다. 당시 투표 마감 후 개표시 부재자 및 임시투표 7000여표에 대한 개표가 지연되면서 선거 당일에 당선자가 바로 결정되지 않는 치열한 접전이었다.

선거 당일인 2018 년 11월 6일 개표에서 맥아더 후보에게 뒤지고 있다가, 선거 후 일주일이 넘은 11월 14일 오후에 이르러서야 선거 결과가 확정되는 접전이었다. 앤디 김 의원의 최종 득표율은 49.9%, 경쟁자였던 톰 맥아더 현직 의원 후보는 48.8%으로, 김 의원이 1.1%포인트 차로 불굴의 역전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어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정치인이 된 것이다. 특히, 그가 출마한 선거구는 유권자 65만 명 중 백인이 85%, 한인은 300여 명에 불과한 곳이어서 그의 승리는 더욱 놀라운 감격을 안겨줬다. 김 의원은 어린이부터 노인들에 이르는 다양한 수백명의 많은 자원봉사자로 선거 운동에 나서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비 옷들을 입고 가가호호 지역구를 방문하는 열정적인 모습에 감탄했고 더욱 도전 받아 끝까지 바르게 선전할 수 있었다고 도와 준 모든 사람들께 깊은 감사함을 전했다.

선거 유세가 한창이던 2017년 8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앤디 김의 선거 캠프를 직접 방문해 공식 지지를 선언할 만큼 그는 오바마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김 의원의 연방하원 입성은 1999년 1세의 김 창준(Jay Kim, 공화당, 캘리포니아) 하원의원 이후 한인으로는 역사상 2번째로 미 연방하원의원에 당선되어 전미 한인사회에 큰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그는 2020년 재선에도 여유로운 격차로 재선에 성공했다. 2022년 중간선거에서도 뉴저지 제3구 예비선거를 통과하면서 3선 도전에 성공했다. 이로써 1996년 김창준 전 의원에 이어 한국계 연방 의원 중 최다선을 기록했다.

한인이민 121년의 역사적 쾌거

2023년 9월, 민주당 밥 메넨데즈 상원 외교위원장(민주당, 뉴저지)이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기 시작하자, 2024년 대선에서 연방 상원의원 선거 경선 출마를 선언했다. 출마 선언을 한 후보들 중 압도적인 격차로 1위를 달리고 있으며 2023년 11월 16일 발표된 여론 조사에 따르면, 42% vs 19%로 출마를 선언한 필 머피 주지사의 부인인 태미 머피를 23%p라는 압도적인 격차로 누르고 있다. 이러한 우세가 쭉 지속되어 민주당 후보로 확정되면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워싱턴DC 정가의 예상이다.

기자는 김 의원이 처음 의사당에 입성한 후 지난 2019년 2월 22일 LA코리아타운에서 개최된 후원회에서 잠깐 만난 일이 있다. 그의 모습은 젊음과 열정, 솔직 담백하며, 사람들과 친근한 대화 를 이끄는 능력이 느껴졌다. 그는 언젠가 우리 한인도 백악관에 입성한 날을 꿈꾸어야 한다며 미소 지었다. 앤디 김의원에게 미주의 모든 한인들이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고, 더욱 많은 한인 인재들이 미 주류 정치사회에 폭넓게 활동하고 다방면에 큰 기여하길 기원한다. 2024년이 한인 정치력 신장의 또 하나의 역사가 창조되는 꿈을 이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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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김 연방하원의원이 한인 후원자님께 드리는 글

‘미국에 충성하는 자랑스런
한국계 미국인이 되겠습니다’

이번 주말에는 미주 한인의 날(1월 13일)을 기념하며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통 한복을 입은 아들들을 보면 정말 귀엽다는 사실 외에도 제가 살아오면서 힘들었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떠오릅니다. 부모님은 50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를 오셨고, 지구 서반구 전체에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셨습니다. 저와 제 여동생은 이곳에서 태어났고 약 7000마일 이내에 다른 친척이 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은 우리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하셨지요. 부모님은 우리가 악센트 없이 영어로 말하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부모님은 우리가 자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이로 인해 항상 외국인으로 평가받는다는 불안감을 느끼셨지요. 부모님은 우리를 영어와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키우려고 했지만, 제가 어렸을 때 말이 느려지자 겁을 먹고 한국어를 가르치지 않으셨죠. 저의 유산과 지리적 환경이 충돌하면서 조화보다는 갈등과 긴장감이 더 크게 느껴졌었습니다.

저는 한국계 미국인이나 더 넓게는 아시아계 미국인이 많이 사는 곳에 살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점심시간에 다른 음식을 먹는다는 이유로 놀림을 자주 받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방어적으로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최소화했습니다. 우리는 한인 교회에 다녔고, 그 교회는 여러모로 제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처음 접한 곳이 되었습니다. 주일 교회는 하루 종일 예배와 한국어 수업으로 가득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제가 한국인인 것처럼 느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부모님께 도시락에 한국 음식을 넣기 싫다고 말했어요. 그 후 한국어 수업을 듣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는 누가 저를 한국계 미국인이나 아시아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면 그냥 미국인이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외교정책을 공부하러 갔을 때 선생님들은 제가 아시아를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하셨어요. 아마도 그것이 제가 중동과 아프리카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다르푸르에 관한 강연에 참석했을 때 누군가 “아프리카에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제 유산이 제 정체성과 더 큰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외교 업무를 담당하던 국무부에서 어느 날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이유로 한국 관련 이슈에 대한 업무가 금지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깜짝 놀랐어요. 중동 전문가로서 한국 이슈를 다룰 생각도 없었는데 말이죠. 국무부는 왜 저를 금지했을까요? 기본적으로 저를 믿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조국 대한민국을 위해 일한다고 해서 미국에 100% 충성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제 정체성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100% 미국인으로 보일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굴욕감을 느꼈고, 제가 안보 위험인물로 간주된다면 외교 정책 분야에서 제 경력이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몇년 후 저는 의회에 출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시에는 의회에 한국계 미국인이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것은 제가 처음에 깨뜨리려고 했던 장벽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야당 측에서 “앤디 김, 그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광고를 TV에 내보내기 시작했을 때, 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느꼈습니다. 전문가들은 백인이 85%, 아시아계 미국인이 3%도 안 되는 이 선거구에서 제가 이길 수 없다고 말했죠. 하지만 저는 해냈습니다.

저는 최근 아빠가 되었습니다. 두 명의 아름다운 한국계 미국인 아들이 있습니다. 저는 이제 부모님을 대신해 가족 유산과 국적 사이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던 것은 다른 사람들이 제 인종과 민족 때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결정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도 다른 누구와 마찬가지로 제 커뮤니티를 대표할 권리가 있습니다. 제 이야기는 한국계 미국인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국인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하원 의사당 바닥에 서서 취임 선서를 하고 있는데, 아래를 내려다보시는 어머니를 바라보았 습니다. 저는 아직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완전히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누구인 지 알고 있고, 한국인이라는 것과 미국인이라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원에 감사드리며 곧 다시 소식 전하겠습니다.
앤디 김 의원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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