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특집2] ‘6·25전쟁의 크리스도’ 에밀 카폰 군종신부의 헌신적인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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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료 포로들에게 삶의 의지를 심어준 성직자
◼ 자신의 음식마저 동료 병사에게 나누어 주다
◼ 교황청은 카폰 대위를 성인품을 위한 준비중
◼ 미국의회 불문율깨고 카폰에 ‘명예훈장’ 추서

6월은 한국에서 ‘호국보훈의 달’로 기념하고 있다. 6‧25전쟁 때문이다. 미국 연방의회는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가 전사했거나 중상을 입은 장병들에게 명예훈장을 수여했는데 이 자랑스러운 훈장을 마지막 받은 용사는 이미 고인이 된 에밀 카폰 대위 (Emil Kapaun, 1916~1951)로 전사한지 62년이 되는 2013년에 추서되었다. ‘6‧25전쟁의 성자’ ‘전장의 그리스도’로 불리는 에밀 카폰(Emil Joseph Kapaun, 1916~1951)신부는 미군 군종 사제로 참전해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인 사랑을 실천한 영웅이다. 그는 중공군이 관리했던 포로수용소에서 굶주림과 혹한에 맞서 포로들의 영적,육적 안식처가 되었으며, 35세의 젊은 나이에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선종했다. 그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해 미국 정부는 2013년 군인에게 주어지는 최고 등급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 (Medal of Honor)을 추서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2021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했다. 한편 교황청 은 지난해 2월, 그의 영웅적 덕행과 희생을 인정해 성인품에 올리기 위한 준비로 시복 전 단계인 ‘가경자(Venerable)’로 선포했다. <성진 취재부 기자>

1916년 미국 캔사스 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출생한 에밀 카폰 신부는 1940년 사제품을 받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1950년 7월 미 육군 군종사제로 한국전선에 파견됐다. 카폰 대위는 6‧25 전쟁 당시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헌신하며 “전장터의 예수”라 불렸던 미 육군 군종신부였다. 총 대신 사랑과 형제애를 무기로 포로수용소에서 수많은 미군 장병들의 생명을 지켜낸 영웅이다. 그는 1950년 11월 미제1기병 사단 8기병연대 3대대 소속의 군종신부로서 참전했다. 1950년 11월 운산 전투에서 부대가 중공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그는 탈출할 기회를 포기 하고 자발적으로 부상병 곁에 남아 그들을 돌보다 포로가 되었다. 그는 벽동 포로수용소에 서 그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부상병을 간호했다. 간수들의 눈을 피해 음식과 약품을 구해 나누어 주고, 절망에 빠진 포로들을 위해 기도하며 인종과 종교를 초월한 사랑을 실천했다.

오랜 굶주림과 부상, 혹독한 추위가 겹쳐 1951년 5월 23일 수용소에서 선종했다. 그의 사망 70년 만인 2021년,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유해 중 그의 유해가 기적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는 포화가 빗발치는 전선에서 지프 보닛에 담요를 덮어 제대를 만들고 미사를 집전했다. 총알이 날아오는 최전방에서 부상병을 치료하고, 죽어 가는 병사들의 임종을 지켰다. 밤낮없이 참호 속 병사들을 찾아다니며 고해성사를 주고 위로를 건네 “전장의 아버지” 역할을 했다. 악명 높은 벽동 포로수용소에서 카폰 대위는 자신의 배급 식량을 쪼개어 굶주린 병사들 에게 나누어 주었고, 적군의 창고에서 몰래 음식을 훔쳐와 포로들을 먹였다. 또한 부상 당한 적군 병사들까지 국적을 불문하고 돌보아 중공군조차 그를 존경할 수밖에 없었다. 열악한 환경과 고문 속에서도 포로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그는 심각한 영양실조와 세균 감염이 악화되어 1951년 5월 23일, 35세의 젊은 나이에 수용소 병원에서 선종했다.

부상병 치료와 병사들 임종을 지킨 신부

2013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죽은 장병에게는 훈장을 수여하지 않는 불문율을 깨고 그에게 미군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추서했다. 2021년에는 하와이 무명용사 묘역에 묻혀 있던 그의 유해가 DNA 감식을 통해 70년 만에 기적적으로 확인되어 고향 캔자스로 귀환 했으며, 대한민국 정부도 최고 등급인 태극무공 훈장을 추서했다. 교황청은 1993년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한데 이어, 2025년 복자 전 단계인 ‘가경자(可敬者)’로 선포하며 성인으로 추대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가톨릭교회에서 성인(Saint)으로 추대되는 시성 절차는 매우 엄격하고 까다롭다. 에밀 카폰 대위는 현재 전체 4단계 과정 중 2단계인 ‘가경자(Venerable)’ 단계에 와 있다.

카폰 대위의 고향인 미국 캔자스주 위치타 교구가 주도하여 성인 추대 운동을 시작했다. 교황청이 이를 받아들여 시성 조사를 공식 개시하면서 ‘하느님의 종’ 지위를 부여했다. 남을 위해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목숨을 바친 이들에게 적용되는 비교적 새로운 심사 기준 이다. 카폰 대위가 포로수용소에서 전우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남아 헌신하다 선종한 공로가 완벽히 입증됐기 때문이다. 특히 2021년 하와이 무명용사 묘역에서 그의 유해가 기적 적으로 발굴 및 신원 확인이 되면서 가경자 선포 절차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었다. 앞으로 성인이 되기 위해 남은 과제는 총 2건의 ‘기적(Miracle)’이 교황청으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아야 한다. 카폰 대위의 전구 (전달 기도)를 통해 일어난 첫 번째 기적이 인정되어야 한다. 현대 의학이나 과학으로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치유 현상 등이 기적으로 분류된다.

현재 위치타 교구에서는 카폰 대위에게 기도를 바친 후 치유를 경험한 5~6건의 유력한 기적 후보 사례를 수집해 놓았으며, 교황청 시성부가 이를 본격적으로 검토·조사하기 시작했다. 복자가 된 이후에 두 번째 기적이 추가로 일어나고 이를 교황청이 공식 인증 하면 최종적으로 교황이 시성식 을 집전하여 성인으로 선포하게 된다. 카폰 대위는 한국 전쟁의 참상 속에서 인류애를 증명했기 때문에, 미국 위치타 교구 뿐만 아니라 한국 천주교계(특히 군종교구)에서도 그의 시복시성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하며 동참하고 있다.

미국과 한국가톨릭 카폰 시성을 위한 기도

6.25 전쟁 당시 북한 평안북도 벽동의 제5 유엔군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참전용사들은 에밀 카폰 대위를 “우리들의 아버지이자 기적의 인간(Miracle Man)”으로 기억하고 있다. 생존 포로들이 전한 생생한 증언들은 우리들에게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최고의 음식 도둑이었다. 벽동 포로 수용소의 하루 배급량은 옥수수 한 줌이 전부였고, 수많은 장병들이 영양실조로 굶어 죽어갔다. 카폰 대위는 스스로 굶주리면서도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썼다. 당시 포로 수용소에 함께 있었던 조셉 오코너(Joseph O’Connor) 육군 대위는 “그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음식 도둑이었다. 신부님은 밤마다 몰래 빠져나가 중공군의 창고에서 감자, 옥수수 등을 훔쳐 왔다. 한 번은 어떻게 구했는지 모를 100파운드(약 45kg)짜리 감자 자루 를 메고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도둑질을 하러 가기 전 항상 ‘선한 도둑 성 디스마스(St. Dismas)’에게 성공(?)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바쳤다”고 회고했다. 마이크 맥그리비(Mike McGreevy) 참전용사는 “신부님은 자신의 얼마 안 되는 배급 식량마저 다른 굶주린 병사들에게 전부 나누어 주었다. 그가 없었다면 우리 중 대부분은 굶어 죽었을 것이다. 그는 진정으로 우리의 목숨을 구한 영웅이었다.” 그는 종교를 초월해 모두의 정신적 기둥이었다. 벽동 포로수용소의 겨울은 영하 30~40도까지 내려가는 지옥이었다. 절망에 빠진 병사 들이 삶의 의지를 놓지 않도록 카폰 대위는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다. 시드니 이센스테드(Sidney Esensten) 군의관(유대인)은 “저는 유대교 신자이지만, 카폰 신부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숭배했다.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병사들이 패닉에 빠지거나 이기적으로 변할 때, 신부님은 우리에게 거대한 도덕적 기준이자 정신적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그는 종교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모든 포로들을 똑같이 사랑했다.” 어느 개신교 신자 포로는 “신부님은 수용소 경비병들의 눈을 피해 장병들을 모아놓고 짧지만 깊은 설교를 하였다. 그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우리의 포로 생활을 연결해 설교할 때, 우리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낼 희망을 얻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들어 우리에게 십자가 성호를 그어 주며 축복해 주던 그 모습이 삶을 포기하지 않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가진 최고의 음식 도둑이었다”

카폰 대위는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어야 하네”라며 중공군 경비병들의 심한 감시와 폭력 속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며 행동으로 신앙을 증명했다고 증언한 한 19세 미군 포로 병사는 “수용소 마당 쓰레기 더미 옆에 십자가가 새겨진 카폰 대위의 철모가 나뒹굴고 있는 것을 본 한 어린 병사가 물었다. 신부님, 왜 철모를 저렇게 방치 하나요? 라고 하자 카폰 대위는 미소를 지으며 중공군들이 저 철모를 보면 너무 싫어하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괜찮네. 십자가와 예수님은 항상 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에 계시기 때문이지”라고 기억했다. 포로 수용소의 미군 병사들은 쓰레기장 옆에 뒹구는 그 철모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만 으로도 큰 위안을 얻고 기도를 이어갔다.

에릭 카폰 대위가 죽음의 수용소 병원으로 끌려가던 마지막 순간은 1951년 봄이었다, 심각한 영양실조와 혹독한 학대로 인해 카폰 대위는 폐렴과 이질에 걸려 한쪽 눈과 다리가 마비되는 등 쓰러지게 되었다. 중공군 경비병들은 그를 죽치고 방치하는 ‘죽음의 집(일명 수용소 병원)’으로 강제 이송하려 했다. 동료 장병들의 공통된 증언에 따르면, 병사들은 신부님을 보내지 않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중공군 경비병들에게 거세게 항의하고 가로 막았다. 하지만 카폰 대위는 오히려 울고 있는 전우들을 위로하며 미소를 지었다. “형제들이여, 너무 슬퍼하지 말게. 나는 내가 항상 가고 싶어했던 그곳(하늘나라)으로 가는 것 뿐이네. 내가 그곳에 도착하면, 하느님 곁에서 자네들 모두를 위해 꼭 기도하겠네.” 그리고 그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가는 중공군 경비병들을 향해 손을 들어 축복하며 마지 막 한마디를 남겼다. “저들을 용서 하소서. 저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누가복음 23장 34절 인용)

카폰 대위는 병원에 격리된 지 이틀 만인 1951년 5월 23일 홀로 숨을 거두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살아 돌아온 포로들은 카폰 대위의 전기 작가들과 미국 정부에 이 경이로운 증언 들을 쏟아냈고, 이 증언들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사후 62년 만인 2013년 미 최고 무공훈장 인 명예 훈장이 추서될 수 있었다. 한편 한국 가톨릭교회와 평신도들은 미국의 위치타 교구가 주도하는 에밀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 운동에 적극적으로 연대하며, 기도 운동, 전기 보급, 교구 차원의 공식 지지를 통해 그의 숭고한 삶을 알리고 성인 추대를 뒷받침하고 있다.

돌아온 포로들이 카폰 공적 다투어 증언

한국 가톨릭 군종교구는 각 본당에서 미사 전 카폰 신부의 시복·시성을 위한 기도를 공동으로 바치며 신자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있다. 과거 염수정 추기경과 유수일 주교 등 주교단은 국방부 장관 및 합동참모의장 등 군 수뇌부와 함께한 미사에서 카폰 신부의 시복 추진을 공식 설명하면서 “한국 신자들이 카폰 신부의 역사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며 교우들의 지속적인 기도를 당부했다. 6·25전쟁 당시 미군 통역관으로 복무했던 고(故) 정진석 추기경은 신학생 시절인 1956년, 카폰 신부의 전기를 최초로 한국어 번역해 출간했다. 정 추기경은 2021년 선종 직전까지 병상에서 개정판 작업에 몰두하며 이 책을 유작으로 남겼다.

평신도들에게 그의 박애 정신을 활발히 알리는 영적 발판이 되었다. 가톨릭신문과 가톨릭평화방송(cpbc) 등 가톨릭 언론 매체와 평신도 단체들은 카폰 신부의 유해 발굴 소식이나 가경자 선포 소식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신자들의 관심을 고취해 왔다. 가톨릭계는 정부 및 보훈 단체와 협력하여 카폰 신부의 희생을 국가적으로 기리는 데 기여했다. 이는 2021년 대한민국 최고 무공훈장인 태극무공훈장 대리 수여식에 염수정 추기경과 군종교구 장 주교가 직접 참석해 의미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한국 가톨릭계는 미국 교회와 발맞추어 카폰 신부의 성인품 전구를 청하는 기도 운동에 더욱 집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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