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비밀문서에서 드러난 1987 KAL폭파와 무지개공작계획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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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하루 전 12월 15일 김현희 전격압송…

‘북괴만행’ 국민감정 자극 노태우 당선

김현희지난 1987년 KAL기 폭파사건당시 범인 김현희를 대통령선거 투표일이전에 국내로 데려와 노태우 대통령의 당선을 도우려 했다는 사실이 지난달 30일 공개된 외교부 비밀문서공개를 통해 확인됐다. 하지만 이번에 공개된 비밀문서는 김현희 신병인도를 둘러싼 박수길 당시 외무부 차관보등이 보낸 비밀전문이며, 실제 이를 대선에 활용하려 했음을 기록한 문서는 무지개 공작보고서이다. 당시 안기부가 작성한 무지개공작계획서는 ‘대선사업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한다는 공작 목적이 뚜렷하게 기재돼 있다. 2006년 국정원 과거사진상조사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김현희 활용 대선공작을 살펴본다.
안치용(시크릿 오브 코리아 편집인)

지난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상공에서 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목숨을 잃은 KAL858기 폭파사건, 직선제 대선을 불과 18일 앞둔 시점에서 발생한 이 사건은 김승일과 김현희등 북한공작원 2명이 범인으로 지목되면서 당시 전두환정권이 노태우후보 당선을 위해 악용했다는 의혹이 제기됐었고 이미 지난 2006년 국정원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를 통해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됐었다.
당시 전두환정권이 이 사건을 대선에 활용하기 위해 작성한 문건이 이른바 <무지개공작 계획서>이다. 원래 이 공작계획서는 4페이지 중 일부가 공개됐지만 대선에 활용하려 했음을 명백히 알 수 있는 문구가 기재돼 있다.

이게 바로 무지개공작 원문

이 문서에는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북괴음모 폭로공작’이라는 제목이 기재돼 있고 그 아래에 괄호로 ‘무지개공작’이라고 적혀 있다. 1페이지 목적에는 ‘11월 29일 버마상공에서 폭파 실종된 대한항공여객기사건이 북괴의 테러공작임을 폭로, 북괴만행을 전세계에 규탄하여 북괴를 위축시키고 국민들의 대북경각심과 안보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능한 대선사업환경을 유리하게 조성’이라고 기재돼 있다. ‘대선사업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셈이다.

무지개공작계획서중 ‘가’와 ‘나’항목은 공개되지 않았고, 다. 폭로시기 및 방법, 라. 국내홍보 방향등이 공개됐다. 폭로시기및 방법에는 ‘1) 12월 5일경 외교부장관 명의로 ‘북괴가 사건배후에 게재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조사진행상황을 중간발표하고 국내외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도록 유도한다. 2) 12월 5일이후 적절한 시기를 선택, 12월 16일 이전 수사중간결과를 발표한다’고 돼 있다. 12월 16일이 대선투표일임을 감안하면 12월 5일부터 분위기를 띄우고 대선일 이전에 중간수사결과를 발표, 보수표를 결집시킨다는 것이다.

▲ 무지개공작계획서 - 목적에 ‘가능한 대선사업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한다고 기재돼 있다.

▲ 무지개공작계획서 – 목적에 ‘가능한 대선사업환경을 유리하게 조성’한다고 기재돼 있다.

라. 국내홍보방향에는 1, 북괴가 대통령선거및 88서울올림픽방해를 위해 자행한 사건으로 또 다른 만행을 준비 중일 가능성 폭로, 2, 일부 국내 좌경용공사상의대두와 오염이 국가안보에 크게 저해됨을 알림, 3, 일부후보들이 집권욕에 어두워 우리의 안보현실을 망각하고 좌경용공분자들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음을 규탄, 4, 북괴의 또 다른 만행 및 오판방지를 위해 국내안정이 절실함을 인식시킴’이라고 돼있다. 즉 좌경용공세력 대두, 일부후보의 좌경용공분자 지원기대, 국내안정절실등을 대대적으로 홍보, 야당후보에게는 붉은 색 덧칠을 함으로써 노태우후보에게 도움을 주려 했음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무지개공작 계획수립 때 공작기간은 1987년 12월 2일부터 1988년 5월 31일까지 이었으며 소요예산은 1347만원이 편성됐다. 대선을 15일 앞둔 시점에서 무지개공작이 가동된 것이다. 국정원 진상조사를 통해 이 문건의 존재가 드러난 뒤 일부에서 이 문건의 정보공개를 요청 했으나 2007년 국정원이 다시 공개한 문건도 국정원 진상보고서에 실린 것과 동일하게 가항목과 나 항목은 삭제됐었다.

‘일부 후보 좌경용공지원’ 대대적 홍보

무지개공작문서뿐 아니라 또 다른 문건에서도 이 사건을 대선에 활용하려 했음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1987년 12월 6일 작성된 ‘KAL기 실종사고 정부 실무대책본부 제4차 회의 결과 보고서’가 바로 그 증거다.
이 회의는 1987년 12월 6일 10시30분부터 12시까지 외무부 제1차관보실에서 열렸다. 12월 6일은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고위관계자들이 긴급 소집된 것이다. 외무부에서는 아주국장, 내무부에서는 치안본부 5차장, 법무부에서는 법무심의관, 교통부에서는 항공국장, 노동부에서는 직업안정국장, 문공부에서는 공보국장, 안기부 부국장등 정부부처 국장급 7명외에 민간기업인 대한항공의 대책반 책임자가 참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보고서 2페이지에는 ‘대선사업등 정치차원의 활용은 정치부서에서 결정’이라고 기재돼 있다. 또 ‘안기부 주관으로 12월 9일부터 전국 각시도 2-3개소에서 궐기대회를 열고, 12월 13일 서울여의도에서 백여만 동원 하에 대북괴 궐기대회개최계획수립’ 이라고 기재, 대선을 3일 앞둔 시점에서 서울 한복판에서 1백만명이상을 동원, 궐기대회라는 명칭 하에 사실상 노태우후보 지지대회를 열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 1987년 12월 6일 작성된 ‘ KAL기 실종사고 정부 실무대책본부 제4차회의 결과 보고서’에는 ‘대선사업등 정치차원의 활용은 정치부서에서 결정’이라고 기재돼 있으며, 대선 3일전인 12우러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백여만명을 동원 대북괴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계획을 세운다고 명시돼 있다.

▲ 1987년 12월 6일 작성된 ‘ KAL기 실종사고 정부 실무대책본부 제4차회의 결과 보고서’에는 ‘대선사업등 정치차원의 활용은 정치부서에서 결정’이라고 기재돼 있으며, 대선 3일전인 12월 13일 서울 여의도에서 백여만명을 동원 대북괴 궐기대회를 개최하는 계획을 세운다고 명시돼 있다.

12월 6일 실무대책본부 4차 회의직후인 같은 날 오후 8시 10분 외무부는 WJA-5425 전문을 통해 ‘혐의자 인수에 대한 일본 측 입장보고’를 주일한국대사관에 지시했고, 주일대사는 JAW-7026과 7040 비밀전문을 통해 ‘일본정부는 바레인정부가 한국 측에 혐의자를 인도하는 경우 일본 측은 양해한다는 사실을 통보받았다’고 보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현희를 대선전날인 12월 15일까지 압송하려 했음은 바레인주재 안기부파견관의 보고서에서도 드러난다. 1987년 12월 10일 안기부 파견관은 ‘마유미의 신병은 늦어도 12월 15일 오전중 서울에 도착해야 하는바’라고 표현한 것으로 확인됐다. 12월 15일이라는 데드라인이 정해져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박수길특사, 8일 현지 도착 뒤 3개방안 보고

김현희 신병인도를 위해 특사신분으로 바레인에 파견된 박수길 외무부 차관보는 12월 8일 새벽 3시 바레인도착 뒤 첫 비밀전문에서 12월 15일 김현희 서울도착을 위한 3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박 특사는 이 전문에서 ‘현지파견수사팀은 제1안 12월 10일 23시-24시 당지출발, 제2안 12월 11일 23시-24시 당지출발, 제3안 12월 12일까지지 도착 가능한 시간출발 등을 명일 바레인측에 비공식제기, 양측 실무자간 검토코저함’이라고 보고했다. 박 특사 도착전날인 12월 7일 바레인대사는 비밀전문 BHW-331을 통해 ‘바레인 범죄수사 대장 면담결과, 아국 전세기가 도착하는 대로 여자혐의자 신병, 남자용의자 사체 및 관련 증거물 인도준비완료’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전두환정권은 12월 11일까지만 해도 12월 15일 한국도착이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파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1987년 12월 11일자 KAL기사고 조사상황9 보고서에는 ‘마유미가 12월 15일 이전 한국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바레인으로 부터 12월 12일까지 인도통고를 받아야 하나 12월 11일이 정기휴일, 12월 12일이 요르단 국왕방문계획임을 감안시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분석했다. 12월 14일, 데드라인 하루 전까지도 신병인도가 불확실했다. 1987년 12월 14일 KAL기사고 상황보고 12에 ‘아측은 마유미의 신병이 아무리 늦더라도 12월 15일 화요일 오후 6시까지 서울에 도착해야 한다는 방침아래 바레인측과 다각적인 인도교섭중임’ 이라고 보고했다. 바레인이 갑작스레 김현희 신병인도를 24시간 지연함으로써 14일까지 압송여부가 불투명했고 우여곡절끝에 12월 15일 김현희를 서울로 압송해온 것이다.

북한이 1988년 1월 21일 한민전 중앙위원회 선전문을 통해 ‘한국정부가 김현희 압송을 위해 바레인에 수천만달러를 제공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입증한 자료나 정황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당시 최광수외무부장관은 2006년 2월 23일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면담을 통해 ‘외무부 입장은 마유미가 일본사람이라면 데려올 수 없고, 수사에 협조하는 수준에 그칠 수 없다는 것이었는데, 당시 마유미의 국적이 불분명하고 일본이 인수의향이 없다는 이야기가 있어 한국으로 데려오기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일간지, KAL 858기 폭파사건 보도

▲ 한국일간지, KAL 858기 폭파사건 보도

당시 바레인주재 한국대사관 김모서기관도 2005년 8월 2일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면담에서 ‘일본은 압송을 포기했고, 바레인은 빨리 다른 나라로 보내기를 원했으므로 최대 피해국인 한국이 압송해온 것은 문제가 없었다’고 증언했다. 또 압송대가 제공설에 대해 ‘바레인은 그런 돈이 필요할 만큼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라며 의혹을 일축했다. 또 바레인에 파견된 한모 안기부 과장도 2006년 2월 22일 과거사 진상조사위원회 면담에서 ‘용의자들의 음독자살기도, 독약앰플사용등이 전형적인 북한 간첩의 수법과 동일해 북한공작원일 것으로 판단했고, 바레인당국에 간첩 신광수사례, 김포공항 폭파사건 등 북한의 테러수법과 자료를 제시하며 신병인도를 요청했다고 밝혔다.

1989년 악어공작 – 김승일 접촉인물 추적도

한편 안기부는 1989년 바레인에서 자살한 김승일이 1984년 서울을 방문, 대구의 한 전직 대학교수와 접촉했다는 정황을 포착, ‘악어공작’이라는 작전명하에 이 교수에 대한 추격전을 펼쳤던 것으로 드러났다.
‘악어공작계획서’라는 이 문건은 ‘김현희의 진술에 따르면 김승일이 일본여권으로 1984년 9월 21일 KAL906편으로 서울에 침투, 자신이 직접 포섭한 60세가량의 전직 대학교수를 만나려 했다’며 1989년 7월부터 6개월 동안 이 교수를 색출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 교수는 1984년 당시에는 대구에서 사업체를 경영 중이었으며, 이 남자의 동생이 평양에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라고 적고 있다.
악어공작계획에 따라 안기부는 전직 대학교수명단을 입수, 연령별로 분류한 뒤 1984년 대구에서 사업체를 경영하는 전직 대학교수를 선별하고, 그중 월북한 동생이 있는 사람을 추적했다. 그러나 악어공작이 성공했는지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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