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칼럼 (이훈주-前플로리다 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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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하고 돌아온 후 예기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잡초 정치인을 뿌리 뽑자고 칼을 뽑았던 개혁파 의원들이 잠시 주춤거리고 있다. 대통령을 당선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20, 30대 네티즌들의 대통령에 대한 성토가 빗발치고 있고,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는 운동권 출신 대통령의 잠재적 지지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한총련의 데모대가 대통령의 행차를 가로 막는 일이 벌어 졌다.

반세기 넘게 지속되어온 종속적인 한미관계에 획을 긋기를 소망했었던 지지자들은 노 대통령이 미국 방문 기간 내내 굴욕 외교로 일관하여 큰 배반감을 안겨주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제 무서운 호랑이를 만나 한 고비를 넘기고 온 대통령에게는 자기를 지지해온 이들로 부터 융단 폭격을 받고 있어 진퇴양난에 빠져있다.

대통령이 즐겨쓰는 코드에 혼선이 생긴것이다.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초선 의원이 집권당의 개혁 방향에 대한 방향 구도를 제시하며 정치권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연합 공천을 준비하는 개혁당은 노무현 전위대라는 발언을 과감하게 던지기도 했다.

그의 돌출 행동이 있은 후 개혁 여론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방미를 기점으로 확실한 변신을 감행하고 귀국한 노 대통령의 바뀌어진 코드는 과연 무엇인지, 그 눈치를 살피기에 정신이 없다. 청와대 또한 ‘보혁갈등’이 증폭될 조짐을 보이자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야말로 보수, 개혁간의 싸움이 시작된것인가?

청와대 인사의 37 %가 386세대 인물들로 채워질 때 각 언론은 큰 관심과 함께 우려의 눈길을 보내었다. 검증되지 않은 386세대의 정치력에 대한 우려감을 갖는 그룹은 지나치게 앞서가는 개혁정신으로 인해 자기 우월적 노선에 빠질수 있다고 경계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오랜 세월을 노 대통령과 정치적 코드를 함께 하면서 개혁정부 수립에 이바지한 그들의 공헌이 이제는 잡초가 아닌 정치밭에서 성장하는 신선한 풀뿌리로 이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이렇게 우려와 찬사가 뒤섞이며 시작한 노무현 국정팀이 지난 8일 500 만 네티즌을 대상으로 “잡초 제거론”을 살포하자 우려를 표명하던 보수 진영의 사람들은 일제히 중국 공산당의 홍위병식 혁명을 한다고 일갈하였다. 다시 말해서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는 애들이 드디어 이분법적 사고로 일을 내는구나 하는 맥락에서 나온 비판이었다. 이렇게 사회에 가시적인 파장을 주고 있는 대통령 미국 외교 코드의 혼선이 어떠한 배경에서 비롯 되었는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필자는 96 년 말 부터 2000 년 초반 까지 노 대통령을 근거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당시 시민단체들 일을 통해서 만났던 노무현 전 의원과 각별한 인연으로 통추 출신의 전직 국회 의원들이 운영하는 요식 사업에 평민의 자격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고, 노 전의원은 필자가 진행하던 시사토론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이기도 하였다.

당시 노 전의원이 갖고 있는 큰 장점은 자신에 대해서 엄격하고 소탈한 개성이었다. 그래서인지 한번 만난 사람은 여지 없이 그에 매료되어 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류 사회에 늘 치여서 살아오면서 한이 맺힌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대리 만족의 꿈을 가질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결성된 것이 ‘노사모’라고 할 수 있다. 운동권에도 주류와 비주류가 있어 정치에 입문하는 기회는 항시 일류대학에서 회장을 했거나 운동을 주도했던 젊은이에게만 돌아갔다. 소위 지방대 출신의 운동권은 홀대를 받으면서 무대 뒤에서 조용히 지냈지만 노 대통령을 받치고 있는 386 인물들은 주류만으로 구성되지를 않았다. 공평한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노 대통령과의 인연 속에서 나는 몇 가지를 알 수 있었다. 첫째는 그는 깨끗한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립경제를 해야 한다는 틀에 자신을 묶어 놓으려고 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직접 생수 사업에 뛰어 들기도 했고 “하로동선”이라는 간판을 걸고 역삼동에 갈비집을 공동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제 와서 그 생수 사업에 정치자금이 들어갔느니 마느니 하는 공격을 받고 있지만 그 시작 동기는 우리 사회가 부여했다고 생각된다. 두번째로 정치인들이 만만하게 생각했던 그 사업들은 모두 실패로 이어지고 말았다.

다른 운동권 출신 사업가들이 겪었던 공통적인 문제이기도 했지만 사업은 운동권 정치처럼 이분법적으로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 들은 혹독하게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 또한 노 대통령에게는 좋은 경험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대통령이 국회의원과 다르게 갖는 임무 중의 하나는 바로 나라 살림을 직접 책임져야 한다는 소명이다. 이러한 연유에서 그는 “사업이 정치보다 어렵다”는 고백을 했었다.

그 당시 노 전의원은 대통령의 꿈을 꾸고 있었지만 옆에서 그를 바라보는 필자에게는 못내 아쉬운 점이 있었다. 바로 그의 미국관 부재였다. 반미라기 보다는 미국에 전혀 흥미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갖는 특징이기도 하였다. 필자는 노 전의원에게 국제사회에서 맹위를 휘두르고 있는 미국에 대해서 좀 더 객관적 시각으로 접근하면서 공부를 해 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조언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그 이후로 미국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그를 오랫동안 보좌해온 측근들도 입장은 마찬가지였기에 미국 정세에 대한 시각이 편협할 수 밖에 없었다. 노 대통령이 미국에 대한 코드를 바꾸어 지지자들을 실망시킨 배경에는 대통령 스스로가 미국을 공부하는 준비가 미흡한데 그 요인이 있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전직 대통령마다 닉네임이 붙어다녔다. 노 대통령의 닉네임은 “코드 대통령” 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새 정부들어서 코드라는 말이 대통령을 두고 무성했기 때문이다. 한국 정치의 텍스트는 이제 더 이상 단일코드(monosemic)가 아니다. 각 코드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는 다중코드(polysemic) 체계로 전환되었다.

대통령 자신이 단일 코드 방식에 억매여 고집을 부린다면 균형 감각을 요구하는 정치판에서 실패를 맛 볼 것이다. 대통령은 그를 위협하고 있는 보혁의 갈등, 그리고 힘으로 밀어부치면 통한다는 집단과의 갈등들에 휘둘려 끌려가기 보다는 이를 다 녹이면서 끌고 갈수 있는 용매 철학을 가져야 한다. “힘들어서 대통령 못해 먹겠다” 는 푸념을 늘어 놓을것이 아니라 이제는 선명한 정치 코드를 제시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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